서울에 산다는 건 편리하다. 많은 것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게 해준다. 어제까지 열려있던 닭갈비식당이 오늘은 문을 닫고 카페가
들어선다 적혀있다. 얼마 전까지 걸어다녔던 길에는 도시미화의 일환으로 일주일도 안되 예쁜 꽃들이 심어져있다. 그 전에는 어떤
잡초가 피어있었는지 기억 나지 않는다.
좋아하던 사람을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이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뜨면 싸늘함에 몸서리치던 날들이 조금씩 잊혀지고 그 자리를
다른 무언가가 차지한다. 댄스스쿨에서 애들을 가르치고 집에와서 영상자료들을 정리하고나면 눈이 감긴다. 그런 식이다. 이러다
김종인, 내이름 석자도 잊어버리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도경수와 헤어진지 366일. 백현이형 에게서 밤늦게 전화가 걸려왔다. 근처의 닭집에서 한잔 하자는 연락이 었다. 뒷날 간만에 쉬는
날이라 가볍게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백현형 이 팔을 번쩍들고 손을 휘휘젓는다. 테이블 위에 슬쩍 눈길을 주니 닭의 잔해와 맥주 몇
병이 있었다. 저녁을 먹지 못했던 나는자리에 앉자마자 프라이드와 양념반을 시키고 자켓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빈잔에 맥주를 따라주는 백현형의 눈이 나 오늘 무슨 일이 있었소. 라고 뻔히 말하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살피듯 관찰하며 담배를 피우는데 시킨 닭이 빨리도 나왔다. 태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세워놓고 닭부터 입 안으로 넣었다.
"찬열이가 헤어지재."
아까는 아무일 없다더니 나불나불 변백현이 어디갈리 없지.
"그래서 헤어졌어?"
"아니. 안된다고 했지."
"그럼 됐네. 왜 그래."
"나만 안된다고 한거지.... 찬열이는 헤어졌대."
평소의 형은 발랄하면서도 쿨한 면이 강하다. 대신 술만 들어가면 한없이 작아진다. 소심하던 사람이 술마시고 대담한 짓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면 술을 마셔도 아무런 미동이 없는 나 같은 성격을 지루하다고 표현한 사람도 있었다.
"형 능글맞잖아. 그냥 들러붙어."
"김종인, 너, 도경수랑 연락하냐?"
뜬금없이 나온 이름에 무표정으로 평소를 가장해 '아니'라고 말했다. 말하고서 내가 차갑게 대꾸했다는 걸 깨닳았다.
"나도 그렇게 되면 어떻하지? 찬열이가 나한테 연락도 안하고 살게 되면?"
"그럴일없어. 찬열이형은 그럴사람 아니야. 전화하면 받아줄껄?"
그럼 도경수는 뭐였단 말인가. 형은 찬열이형보다 더 다정한 사람이 었다. 아프다 하면 몇시가 되었든 집으로와서 병간호를 해주고 배고프다하면 어김없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었다. 전화하면 받아줘야 할 사람은 경수형이었다.
"아~~씨~~야, 맥주 좀 더 시켜."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뒤틀리는지 형이 두 손으로 거칠게 얼굴과 머리카락을 쓸어댔다. 바쁜 형을 대신해 내가 맥주를 몇 병을 더
시키고 재만 길어진 아까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와 맥주 그리고 닭을 번갈아 먹고 마시는 게 반복되어 본연의 맛들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에 익숙한 나에게 이건 일도 아니었다.
"아, 맞다. 나 도경수 봤어. 녹음실에서. 조만간 데뷔한다더라."
"그래?"
"그 새끼 남친 생겼어. 어디 기획사 엔지니어 라던데....."
그런 얘기들으려고 닭에서 담배 맛나고 맥주에서 닭맛나는 걸 참은 건 아닌데 싶었다. 헤어진 사람의 멀쩡한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망가진 이야기도 싫지만 말이다. 그냥 살아줬으면 좋겠다. 나보다 조금 더 힘들게.
"야, 너도 누구 좀 만나고 그래라, 임마."
"일 때문에 바빠서 잘 시간도 없어. 좀 여유 생기면."
형이 이렇게 빨리 누군가와 사귈줄은 몰랐다. 나 좋다고 밤낮으로 들이대고, 헤어질 때도 아무도 안사귀고 기다리겠다 했었다. 그게 다 거짓이었다. 아니, 이게 현실인가. 백현이형을 괜히 만났나 싶어졌다.
할말이 끝난건지 나와의 술자리가 지겨운건지 얼큰하게 취한 백현형은 알아서 잘 가겠다고 혼자 포마차 사이를 휘청거리며 걸어나갔다.
쌀쌀해진 날씨가 내 다리를 집 쪽으로 서둘러 움직이게 만들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담배가 고파졌다. 한개피 물고 검은 공기 속에
흰연기가 피어올랐다 내 뒤로 사라지는 걸 몇 번이고 반복한 후에야 집 근처에 도착 할수있었다. 언덕 위의 전봇대가 시선에
들어왔다. 눈 앞을 가리는 담배연기에 찡그리며 쳐다보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저 전봇대는 경수형의 기다림과 망설임이 가득한 장소다. 보슬비가 오던 날과 함박눈이 오던 날은 저 밑에 서있던 도경수가 유난히도
예뻐보였다. 검은 실루엣이 있는 걸 보니 오늘밤은 다른 누군가가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 었다. 아무래도 백현형을
괜히 만났나 싶었다. 분명 낮설어야 할 그것이 빌어먹게도 익숙해 보인다.
"종인아."
귀와 눈을 의심했다. 물고 있던 담배를 무의식 중에 손가락 사이로 옮기며 주의깊게 응시한 뒤, 경수형임을 알았다. 숨이 탁
막히더니 다음엔 확 놓였다. 그리고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약간 손가락을 떨고있는 걸 들켰는지 모르지만 침착하려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수천번은 지나치던 전봇대 쪽으로 걸어가는 찰나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걸음을 멈추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본 형은 약간 살이
빠졌지만 맑은 눈은 여전했다. 잘세워진 코도, 웃으면 예쁘게 벌어지는 입술도, 마지막 만났을 때 와 같았다. 형이 후디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왠지 망설였다.
"잘 지냈어?"
"응."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피우던 담배는 떨어뜨려 비벼껐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이거 주려고 왔어."
주머니에서 꺼낸 형의 손에 흰색USB가 들려있었다.
"나 데뷔해. 니가 먼저 들어줬으면 해서."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경수형은 노래를 정말 잘부른다. 언젠가 데뷔를 하게 되면 꼭 먼저 들려달라고 했던 내 말을 잊지않았다는 사실에
고마웠다. 그 반면에 이제와 서 무슨 소용인지 차갑게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거절 할수없다. 아직은 달콤한 호의를 피할만큼의
정리는 되지 않은 상태다. 고맙다하고 USB를 손에 들었다.
"데뷔하는 거 백현이형한테 들었어. 축하해."
"그래? 그랬구나, 고마워."
"....많이 기다렸어? 전화하지 그랬어."
"아...매니저가 폰을 못가지고 다니게 해서 어쩔수 없었어."
초가을이라고 해도 밤은 꽤나 쌀쌀한데 그 가운데 기다렸다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들어가서 차한잔하고 가라고 하기엔 너무 속보이는 짓 같아 망설이는데 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가볼게."
"어? 아...응."
"몸 조심하고 잘 지내."
이제와서 형에게 고마웠어라고 말해도 될까 순간 고민했다. 진짜 마지막이구나 싶으니 고마웠다는 말이 떠올랐다. 왜 진작 그 말을
못했을까 후회가 됐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뒤돌아 뛰어가던 형의뒷모습에서 난 왜 짜증만 났을까. 이렇게 속이 탈 줄 알았다면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할 걸 그랬다.
"응. 형도."
"간다."
"형."
언덕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는 형을 말로 붙잡아 세웠다. 추워보이는 형이 싫어서 후드라도 씌워주고 싶었다. 후드를 씌워주는대로
가만히 서 있는 얼굴을 내려보는데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내려깔린 속눈썹이 자꾸 헛된 기대를 가지게 한다.
내가 많이 힘들게 했지? 미안해. 진짜 고마웠어. 근데....한번만 돌아와주면 안될까? 형이 없으니까 죽을 거 같아. 아침마다 미치겠어. 그냥 미칠 것 같아.
사라졌던 아픔들이 불쑥 고개를 들고 내 머리를 휘져어놓았다. 그런데 소리내서 말하지 못하는 건 몇 번을 반복해 온 이별이라는 것에
나름의 방식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무의식 중에 행하는 그것은 내 연애를 방해만 해왔다. 자존심이 다치는 게 싫고 매달리는게
모양 빠지고 미련없이 구는게 남자라 허세부리는 연애만 해온 나에게 경수형의 깨끗한 진심은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가지지 못하는
빛나는 보석이다.
"고마워, 형."
나를 쳐다보는 형의 눈이 흔들렸다. 내 말의 의미가 다 전해진 반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봐."
어색하게 떨어지는 내 손가락에 묻어나는 망설임은 이제 그만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경수형이 돌아서 가기를 기다렸다. 마지막인데 뒷모습은 꼭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발이 박힌 것 처럼 고개를 푹숙인 형이 떠나지를 않는다. 우리 둘 다 말이 없어졌다.
나는 초조해 죽을 거 같았다. 숨조차 떨리는 듯 끊어져 밖으로 나왔다. 담배생각 이 간절해서 자켓주머니를 뒤적이니 그때서야 형의 입술이 열린다.
"담배 좀 나중에 펴봐."
형의 말대로 정지화면을 건 것처럼 멈췄다. 갈곳없는 손은 블랙데님바지주머니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눈치만 보다 입술이 타들어가서 아랫입술을 물었다.
"....누구....생겼어?"
그 물음에 아니라고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시 침묵이다. 미칠 것 같았다. 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리가 하얗게
멍해진 기분이 었다. 그래도 뭐라 말하려 입을 때려는데 형의 한쪽 손이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나와 내 자켓 깃을 쥔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 형이 날 아직 못잊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온 몸을 휘감아 내 가슴에 불을 지폈다. 이 순간만큼은 백현이형으로 빙의해서 말빨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뭔가 경수형이 나에게로 마음을 돌릴 한마디가 절실하다.
"잠깐... 들어갔다 갈래?"
그러니까 이런 말 말고. 나는 자신의 비루한 임기응변에질려버렸다. 다시는 이런 말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응."
내 자켓을 쥐고있던 경수형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일년하고 하루 전의 따뜻함이 작은 손에서 나의 온 몸으로 퍼졌다. 작은 불씨가 살아나는 기분에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다. 갑자기 몸이 뜨거워졌다.
도어락의 비번을 누르고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고 문이 닫히고 신발도 벗지 않은 나는 경수형을 돌아보았다. 날 올려보는 경수형이
시선을 피하며 쉴세없이 눈을 깜박였다. 당황하고 쑥쓰럽고 민망하고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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