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4월 21, 2015

세타라흐 - 프롤로그







저 넘어에 커다란 해가 넘실거리며 온 하늘을 붉게 물들어 몸을 감추고 있었다. 모든 만물을 태울 기세로 작렬 하던 태양이 완전히 떨어지면 사방이 트인 드넓은 이곳은 두 시간도 안가 기온이 영도를 찍고 세 시간 만에 마이너스로 극하강 한다. 서방 나라의 겨울이 사막에는 이렇게 찾아 온다. 특히나 알함브라왕국은 날씨의 변화가 변덕진 사막이 반을 차지하고 있어 나머지 반의 온화한 기풍을 가끔 잡아 먹기도 했다. 그의 애마, 소울댄서의 고삐를 단단히 잡은 카이는 콧잔등까지 두르고 있던 검은 색의 케피야 끝을 걷어내고 거대하게 이글거리는 해를 진한 속눈썹 넘어로 불안하게 비켜 보았다. 대체 경수는 어디에 있을까.


알함브라왕국의 국토에 속한 사막은 동사하라와 서사하라로 나뉜다. 동사하라는 모래가 곱고 하얀색을 띄고 있어 지역주민들이 세파에드데레야 즉, 흰색바다 라고 부를 정도로 아름답다. 서사하라는 자갈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면적이 광대하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동쪽 사막을 가로질러 국경을 넘을 작정이겠거니 확신했다. 모래바람에 가늘게 눈을 뜬 카이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왕국에 연고지 하나 없는 외국인인 경수가 탈출 하도록 도와 줄 사람은 정해져 있다. 국경까지 가려면 말이 아닌 낙타와 안내자가 필요하다. 카이의 할렘에서 나오지 못하고 살던 경수가 그 둘을 손에 넣으려면 어디로 보나 타오의 손길이 닿았을 것이다.


"왕자님. 금방 해가 질 것 같습니다. 지금 살라트(예배)를 하셔야 합니다. 벌써 하루와 반을 미루고 계십니다. 한번 더 미루시면 왕정의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되십니다."


자신의 말로 뒤 따라오던 '찬'이 정중히 호소했다.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모범을 보여야 하는 귀족 이상의 계급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일곱번 보다 더 살라트를 미룰 수 없었으며 그럴시에는 그 횟수만큼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렇지만 카이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찬을 노려보고는 아랑곳없이 해가 지는 동사하라의 불꽃 같은 사막을 달려 나갔다. 아무리 뱃속에서부터 알라(신)를 받들어라 강제주입을 시킨들 기도가 '세타라' 보다 중요 할 리 없었다. 카이는 경수를 어려운 한국어 이름 대신 '세타라' 라고 종종 불렀는데 이건 페르시아어로 별이라는 뜻이다. 사랑스럽게 웃는 경수는 사막의 길잡이인 밝은 별과 다르지 않았으며 동시에 그의 영혼과도 같은 존재였다. 찬이 아무리 알라가 어쩌고 말해봐야 그의 귀는 막힌 지 오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까지 왕국의 외곽지역을 정찰하고 왔는데 원래는 더 빨리 돌아올 계획이였으나 그곳에 시아파의 이스마일파(시아파의 한갈래)에서 어쎄신(암살단)이 구성되었다는 첩보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느라 늦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예정보다 삼일을 더한 일주일동안 왕궁과 할렘을 비우게 되었고, 돌아오자마자 탈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카이는 격노해서 자신의 할렘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는 시중을 들었던 하녀를 고문했다. 아기 소가죽으로 만든 채찍에 물을 먹여 전신을 때려도 만족스런 대답을 얻을 수 없자, 그 길로 왕정기사단의 부대장이자 자신의 오른팔인 '찬'과 같이 궁을 빠져나와 내달렸다. 평소 할렘에서 나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경수였다. 부르카(얼굴부터 몸 전체를 덮는 옷)를 입고 외출하면 허락 하겠다 했더니, 보고 싶은 게 많다며 모슬렘(부르카와 비슷하지만 눈은 따로 가리지 않는 옷)을 입게 해달라 청해서 한번 그렇게 내보냈었다. 그러다 경수의 크고 맑은 눈을 본 귀족신분의 남자가 한눈에 반해 그를 납치하려고 소동이 일어 났었다. 물론 즉시 놈을 대려다가 왕자의 소유물을 탐한 죄로 목을 배어 죽였지만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던 카이는 길길히 날뛰며 부르카를 입고 자신과 대동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는, 외출금지 명령과 별 다를바 없는 처단을 내렸다. 따지고 보면 법률상 할렘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나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이 정도만 해도 굉장히 자애로운 처사였다. 하지만 자유로운 나라에서 나고 자란 경수가 그런 결정을 곧이 곧대로 들을리 만무했고 그래서 매번 여기서 나가겠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를 갈며 곱씹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탈출을 결심하게 된 건 카이의 희롱 때문이었다. 원래 둘째왕자, 카이의 할렘은 여자 다섯명 정도의 수준이 였고 그마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의 선물로 받은 여자들이었다. 당연히 마음에 들리가 없었고 여자들도 카이의 폭력성이나 잔인함에 대해 익히 들어왔던 터라 그가 할렘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에 안심해 왔다. 하지만 경수가 들어오고 나서 모든게 달라졌다. 카이는 매일밤 그를 보러 할렘으로 걸음해 자신의 브론즈 피부와 대조되는 부드러운 흰살을 맛봤다. 밤마다 들려오는 욕정에 젖은 신음소리에 여자들은 초긴장 상태였다. 그런데 여자란 존재는 이상한게, 아무리 소문이 나쁘더라도 젊고 세기의 미모를 가진 미남왕자 앞에서는 없던 질투가 끓어 올라서 다 같이 결탁해 경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권력과 미모 앞에서야 가슴과 엉덩이를 살랑이며 유혹의 몸짓을 하니 알리 없었던 어느날, 티 없이 깨끗한 얼굴의 오른쪽 눈 위의 상처에 분노한 카이는 할렘의 여자를 전부 눈 앞에 놓고 일일히 심문해서 범인을 잡아냈다. 자신 이외에 관심이 없었던 왕자의 이러한 행동은 왕궁에 퍼져나갔고 그가 경수에게 얼마나 빠져 있는 지 모두에게 각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해는 순식간에 지평성 밑으로 들어가버렸고 덩달아 달이 그려진 어둠의 커튼이 머리 위를 덮쳐왔다. 알라가 도와 준 덕분인지 다행이 보름달이 밝아, 따로 램프를 밝히지 않아도 말을 달리면서 멀리까지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그렇게 멈출 줄 모르고 모래길을 달릴 것만 같았던 소울댄서가 급정지 했다. 전방 50미터 앞에 낙타 두마리의 달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모양새가 이상했다. 한 낙타 위에는 사람이 꼿꼿히 앉아있고 다른 낙타 위에는 짐짝 뿐이었다. 유심히 두 그림자를 비교하다 카이는 깨달았다. 탈출을 시키려는게 아니라 다른 음모가 있다는 것을! 카이는 짐짝이 경수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찬과 함께 무서운 기세로 달렸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소울댄서의 말발굽소리는 적막한 사막의 공기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경수를 대리고 국경을 넘어가려 하던 안내자의 귀에 들어갔다. 칼을 뽑아든 남자에게 질세라 그도 양쪽 허리에 차고 있던 쉬미르(반달모양장검)를 꺼내 들었다.


카이는 보이는 게 없었다. 그저깨까지 피를 묻혔던 날이 잘 선 쉬미르가 달빛에 번쩍이며 주인의 상태를 잘 말해 주었다. 남자는 검을 손에 쥐고 있어도 안절부절이였다. 그만큼 둘이 달려오는 박력과 위용이 대단했다. 알함브라왕국의 황실직속 호위 기병대, '흑불사단'의 표식인 검은 용이 그려진 말머리를 보고 겁에 질린 남자가 손에서 검을 떨어 뜨리고 몸을 덜덜 떨었다. 자비를 구하려는 조아림을 할 세도 없이 달려 온 두개의 쉬미르가 교차하여 남자의 머리를 댕강 잘라냈다. 잘린 머리는 흰 모래 사이를 굴러 언덕을 내려갔고 낙타 위의 몸뚱이는 밑으로 털썩 떨어져 피를 내뿜었다. 카이가 검에 묻은 붉은 액체를 허공에 내리쳐 닦아낼 때, 찬은 낙타에 매달린 짐짝을 뒤졌다. 카이는 뒤에 서 있는 낙타 혹 사이에 끼워지듯 걸쳐진 짐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품에 차고 있던 단도로 헝겊을 찢어내고 그토록 찾고 싶어하던 경수의 얼굴이 보인 것에 안심 했지만, 더불어 온몸이 땀에 쩔어 기절해 있는 걸 보는 순간 분노에 가득차서 찬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남자의 머리와 몸을 불태워라!"


왕자의 명령에 찬은 굴러갔던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들고와 몸 위에 놓고 부싯돌로 옷가지와 머리카락등에 불씨를 붙였다. 그 위에 술을 붓자 금새 훅 타올랐고 추위가 엄습해 온 주변에 열이 올랐다. 찬은 경수를 안고 있는 주인의 옆에서 별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경수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이제 날이 더 추워지면 체온이 바닥을 칠거다."


땀에 이리저리 늘어 붙은 머리카락 마저 소중하게 쓰다듬는 그의 목소리가 걱정에 가득했다. 가벼운 옷을 걸친 경수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검정 비쉬트(직사각형 장옷)를 담요처럼 둘러주었다. 찬이 건내 준 물통을 들이켜 입에 담고 그의 양쪽 볼을 가볍게 눌러 도톰한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그 안으로 몇번이고 물을 흘려 보냈다. 이 상태로 하루하고도 반을 넘게 궁정을 향해 달린다면 체력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될 수 있었다. 차라리,


"왕자님, 북쪽으로 달리시면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찬이 오아시스를 찾아냈다.






******





언젠가 초저녁, 눈을 지긋히 감고 대지를 느끼던 경수가 말 했었다.


'내가 사는 곳은 조금만 걸으면 한쪽이 막히고 좀 더 걸으면 사방이 막혀. 집도 거리도 공원도 벽이 가로막고 어느 한 곳 트여 있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아무도 그렇다는 걸 모르고 평생을 지내. 그런데 여기는.... 어디도 막혀 있지 않아. 넓고 광대해. 땅도 하늘도 끝이 없어. 저렇게 큰 해를 보고 있으면 달려가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 평생을 가도 잡지 못하겠지? 여기에서 사는 네가 부러워.'


그럼, 그렇게 부러우면 같이 살자 말했다. 처음에는 명령이 아닌 제안이였다. 알함브라왕국에서 제일로 손꼽히는 자연의 선물, 이글거리는 석양. 눈을 의심할 만한 마법으로 인간 세계만을 검게 바꿔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태양도 경수를 물들이지 못했다. 그는 칠흙 같은 밤의 그림자 위에 밝고 맑은 별로 떠올라 방향하던 카이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가질 수 있는 왕자의 자리에 관심없이 흑불사단의 기사로 위험천만한 장소만을 떠돌며 누군가에게 명령을 일삼는 카이가 듣도 보도 못한 외국인에게 같이 있어 달라고 했다. 생에 처음으로 권유를 하고 회유를 했다. 그러나 대답으로 이렇게 축늘어진 사지가 품 안에 돌아왔다.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머리를 마비시켰다. 배신감에 사로 잡히고 미웠다. 하지만 밉지 않았다. 화가 나지만 화가 나지 않았다. 상반된 감정이 휘몰아져 옴짝달싹 못하게 카이를 지배했다.


"살라트를 해야겠다."


비쉬트로 싸인 경수를 오아시스 옆, 풀숲에 놓고 카이가 일어났다. 때 맞추어 찬이 기도를 드릴 방향을 맞추어 융단을 깔았다. 카이는 얼굴과 손 발을 물로 씻고 융단 위에서 코란을 암송하며 알라에게 절을 거듭했다. 인명을 제천으로 여기지 않고 길에 핀 잡초 뽑듯하며 자신의 지위와 몸을 돌보지 않음에도 목숨부지하여 세타라(별)를 만나게 해주셨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하지만, 경수를 쉽게 거두어 가신다면 당신이 소중히 지켜 준 이 목숨을 걸어서라도 알라에게 대항하겠다는 기도를 드렸다. 일종의 신을 협박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왕자였으나, 그게 진심이였다. 미뤄왔던 기도가 다 끝날 때즈음 이였다.


"왕자님, 깨어나셨습니다."


초저음의 목소리에 카이가 번뜩 눈을 떴다. 돌아 본 풀숲에 뉘어진 경수의 눈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닫혔다. 이마에 손을 대어보니 다행이도 열이 심하지 않았다. 안심하며 상체를 들어 머리를 안았다.


"눈을 떠 보거라, 어서!"


"...ㅁ...ㅜ...무..."


얼른 물을 입에 담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려 넣었다. 얕게 몰아 쉬는 숨 속에서도 물을 넘기는 걸 보니 제대로 정신이 들긴 한 모양이였다. 얼마 가지 않아,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 안에 갇혀있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는 안도감에 온 몸의 힘이 풀릴 뻔 했다. 주름 하나 없는 예쁜 이마에 입을 맞추며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멜시맘눈,알라'(감사합니다,알라)를 세번 중얼였다. 그 사이 찬이 피워 놓은 모닥불은 거세게 불길을 내며 하늘로 솟구쳤다.








사방이 조용했다. 있는 거라고는 흰모래, 야자나무, 오아시스, 하늘, 별, 달 그게 전부였다. 그것들은 잘 조화를 이루어 알함브라왕국의 자랑거리인 사막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별은 쏟아부은 양 무수했고 달은 둥글게 동동 떠 있었다. 경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몇 발자국 떨어져 등을 돌리고 몸을 뉘인 찬은 미동이 없었고, 비쉬트 째로 자신을 끌어안고 누운 그는 말없이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곳이 상당히 춥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전혀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했다. 카이의 저주 받은 체온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가 경수의 손을 잡고 손가락 마디마다 입술을 맞췄다.


"어떻게 할렘에서 나왔는지 질책하지 않겠어. 네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해."


"...내가...어떻게 됐었던거야? 자루에 묶인 건 알고 있는데 그 뒤부터 기억이 없어..."


목구멍이 아팠다. 쉬어버린 소리를 낸 경수의 미간이 몇 곂으로 갈라졌다. 타오의 도움으로 안내자와 헬렘을 나오기는 했는데 시내를 빠져나가는 도중 뒤에서 누가 자루를 덮어 씌웠다. 발버둥쳤지만 짐짝처럼 들려져 가다가 자루 안이 너무 더워서 의식을 잃어버린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널 어디로 팔아 넘기려는 속셈이 였겠지. 뭐가 됐든 형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내가 부탁한거야!"


"팔아 달라고?"


"아니! 할렘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쫄아버린 스프처럼 줄어드는 음성에 카이가 코웃음을 쳤다.


"할렘에서 나오는 건 성공했지만 나에게서 도망치는 건 아직인 거 같아. 몇번이고 도망가봐. 알라는 내 편이고 너는 나에게서 떠날 수 없는 운명이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난 이곳 사람이 아니야. 여기에서 살 수는 없어."


"내가 얘기 했잖아. 아비틴(이란왕자)과 프라랑(신라공주)말이야. 들려오는 말로는 아비틴은 바실라(신라)에서 엄청난 대접 받으며 살고 있다고 했어. 아비틴이 바실라에서 사는 거 처럼 넌 여기 알함브라왕국에서 살면 돼."


아비틴과 프라랑 쯤이야 경수도 알고 있었다. 역사책에서 보고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천년 전에도 외국인과 결혼 했구나 하며 신기해 했을 뿐 이였는데, 자신이 알함브라 왕국에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왕국의 둘째왕자가 영어를 이렇게 잘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버지는 네가 남자인 걸 못마땅해 하는 모양이지만 요즘은 동성 애인이 있는 게 유행,"


카이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짜악! 하는 파열음과 함께 따귀를 맞아버렸다. 반동으로 돌아간 고개를 바로 잡고 화난 얼굴로 노렸다. 어느 누구도 왕자의 몸을 때리려 하지 않고 맞아 본 적도 없는데 충격적인 일이었다. 건너에 있던 찬이 놀라 칼을 빼들었지만 카이는 손을 들어 저지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야, 이 개자식아! 애인? 유행?! 미친 놈."


"왕자님, 저 놈의 새치 혀를 뽑아야 겠습니다! 도저히 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저 따위 비속어로 왕자님을 능멸 하는 것을 참고 들어 줄 수 없습니다!"


이 나라는 어찌된 게 개나 소나 다 영어를 하는지 찬마저 영어를 알아듣고 반응했다.


"닥쳐! 시끄러우니까."


사자가 으르렁거리듯 이를 갈며 내뱃은 말에 찬이 바로 고개를 숙이고 조용해졌다. 화를 못 이겨 씩씩거리는 눈은 매섭게 카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낮의 눈부신 햇살을 피하느라 눈 주위에 검게 염료가 발라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서워 보일 지언정 절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유행으로 애인을 삼겠다는 말에 경수의 인내가 옆에서 춤추는 불꽃과 다름없이 활활 타올랐다.








(이어서 쓸 기회를 였보며....)




카디페밀리 3. 4. 5.







제3화 - 엄마없는 시간은 지루해 2 (부제: 찬열삼촌의 비밀작전)






엄마. 엄마, 오늘따라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요.


"므어??? 사,사십오만워언???? 아빠 미쳤어?!?!"


학교 갔다왔더니 이게 무슨 날 벼락인가요? 마트에서 뭘사면 사십오만원 어치를 살수있죠?


"아니, 이것저것 사다보니까 그렇게 됬지...."


수호삼촌이 저번에 저한테 '너네 아빠 예전에 완전 짠돌이사기꾼이였어' 라고 했었는데 그게 거짓말이였던걸까요? 우리집이 못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열살인 제가 보기에는 사십오만원은 너무 많이 쓴 것 같아요. 아무리봐도 쓸데없는 거를 산거에요. 제가 따라갔어야 했던건데 망했어요. 차에서 내릴때 장보러 가자고 미리 말하지 못한 내잘못에요.


"이거랑, 이거도. 이거는 왜 샀어?"


"아니, 캔종류는 나중에도 먹을수 있잖아! 그거 반품하지마, 김이디! 나 삐진다!"


"엄마가 캔음식 몸에 안좋다고 먹지 말라고 맨날 말하잖아! 과자는 웰케 마니 샀어?!?! 으아!
열개나 샀어?!?!"


"과자는 이오가 좋아하고,"


"아빠가 더 좋아하자나."


"웅. 싫어하지는 않지. 내가 먹을거야! 그럼 된거자나!"


"열개는 필요없자나!"


"놔뒀다가 먹으면 되지!"


가끔 아빠는 이렇게 이상한 거에 억지를 부려요. 빠다코코넛 세개는 그거로 젠가라도 하게? 아빠?!(한심) 라고 묻고 싶지만 참을 거에요. 엄마가 이럴줄 알고 꼭 아빠한테 말해서 같이 가라고 했는데. 아빠는 제가 엄마가 부탁한 일들을 다 해내는 게 싫은 가봐요. 자꾸 방해만해요.


"암튼! 김이디, 너! 그거 반품하기만 해!"


아빠가 막 화내면서 이오한테 젤리를 까서줘요. 어? 그 젤리,


"아! 아빠! 그 젤리 주면 안돼! 애기들은 그거 먹다가 목이 막혀서 안된다고 그랬어!"


"뭐가 목이 막혀. 잘만 먹는데. 구지~~ 이오야~~"


"웅웅."


젤리를 씹으면서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흔드는 이오의 (엄마가)(말하는거)(듣고외운단어)주둥이를 때려주고 싶어요. 저게 아빠만 있으면 말도 안듣고 아빠한테 딱 붙어가지고! 아오! 소파에 앉아서 과자랑 젤리를 씹는 둘이 미워요. 다 먹은 과자봉지는 정리도 안하고! (....)그래요. 이제 저도 모르겠어요.


"아빠랑 이오, 너. 엄마오면 죽었다."


저도 삐졌어요. 엄마한테 전화해서 다 이를거에요. 바지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요. 칫. 한번 아빠를 째려보고 엄마번호를 꾸욱 눌렀어요.


#아들!#


일부러 스피커폰 켰어요. 아빠 들으라고. 폰에서 나오는 엄마 목소리에 아빠가 움찔했어요. 근데 안그런척 하면서 자기도 바지에서 폰 꺼내서 입삐쭉거리면서 막 만지고 있어요. 뭐라고 하는데 너무 작아서 안들려요.


"엄마! 뭐해? 이오가 엄마 보구싶,!"


"엄마! 엄마!"


이오가 내 폰을 뺐어들었어요.


#이오야~ 밥먹었어? 아빠랑 잘 놀구있어?#


"옴마 엉제와? 옴마보구시퍼, 옴마~"


내동생이지만 소파에서 드러누워서 (아빠처럼)(드럽게)발가락 만지면서 저렇게 애교부리면 (가끔은)귀엽긴 해요.


#우리 이오가 오늘밤에 한번만 더 코자면 갈거야. 그러니까 아빠랑 한번만 더 자~?! 응?!#


아. 어쩌지? 내일 엄마가 오는 거 아빠가 다들어버렸다. 어. 근데 아빠가 무표정이에요. (쫌생이처럼)정말로 많이 삐졌나봐요. 그때, 아빠 폰이 울렸어요.


"어! 찬열이형! 뭐?! 그래?!? 아 그럼 가야지!! 여자는 어때?! 진짜? 대에박! 어,어, 알았어!"


"아빠! 시끄러워! 귀떨어지겠어!"


이상해요. 아빠가 큰소리로 찬열이삼촌 전화를 받더니 웃어요. 왜그러는 걸까요? 이상해요.
아빠가 왜저러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오야, 이디야. 삼촌들 말 잘듣고 있어! 한밤만 코자~! 금방 갈게!#


엄마는 아빠목소리 들었을텐데 아무말도 안하고 아빠 잘 있냐고 안물어보고 끊었어요.
아직도 많이 삐졌나봐요. 아, 알았다! 아빠가,


"아! 아빠! 왜 여자얘기해! 엄마가 그거 듣고 더 화났자나!"


"잔말말고 김이디, 김이오! 이제부터 너희에게 특급작전명을 말하겠다! 이름하야! 아빠 절 버리실건가요? 작전이다!"


"뭐? 머야, 그거. 무서워."


"얼른 예쁘게 옷갈아입고 나가자~"


아무 설명도 없이 아빠는 이오를 안고 제 등을 밀면서 다같이 제 방으로 들어가요. 저는 평소에는 입지않는 이모들이 생일때 사준 나비넥타이하고 위아래 검정 양복을 입었구요. 이오는 아빠가 흰색컬러셔츠에 검정 스키니진을 입혔어요. 왁스로 우리 머리를 이리저리 정리하더니 시간이 없다며 빨리 나가자고 해요. 그리고 나가기전에 아빠는 우리에게 신길 신발을 고민했어요. 저는 저번에 엄마가 독일에서 사준 검정 하이탑워커를 신었구요. 이오는 빨간 조단나이키 운동화를 신기고 서둘러 현관문을 닫는 아빠. 도대체 무슨 꿍꿍이 일까요?


"왜그러는데? 아빠, 무슨일있어? 왜이러고 가?"


"가보면 안다! 안전벨트 맸어? 이오도 이디가 봐줘!"


"응. 맸어."


"그럼 가자! 고고씽!"


막 달리더니 엄청 큰 건물 앞에 차를 세운 아빠. 우리는 가족이 다 같이 밥먹으러 여기에 와본
적 있어요. 남산에 언덕 위에 있는 하야토호텔이에요. 꼭대기에 영어로 그랜드하야토호텔이라고 크게 써 있어요.  아빠한테 인사한 아저씨에게 차키를 드리고 우리는 아빠손을 잡고 호텔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빠말 잘들어. 이디야. 이오야. 저기 안으로 들어가면 찬열삼촌이 있어."


"찬열삼촌?"


"그래. 찬열삼촌. 이제 찬열삼촌이 이디랑 이오 아빠야."


"찬열삼촌이 아빠라고? 왜?"


"지금 삼촌이 여자랑 둘이서 밥을 먹고 있는데 엄청나게 위험해."


"왜?"


"어? 아무튼 위험해. 그러니까 삼촌을 구해야되니까 찬열삼촌한테 가서 아빠라고 하면 돼."


"나보고 거짓말 하라고?"


"거짓말이 아니라 삼촌을 돕는거지!"


"......"


"김이디. 할거지? 삼촌한테 되게 중요한 거야. 대답안해?"


저는 생각해봤어요. 그러니까 삼촌이 만난다는 아줌마한테 찬열삼촌이 우리아빠라고 거짓말을 해야되는 거잖아요. 나는 왜 거짓말을 해야되는지도 모르는데 해야되는거잖아요. 그런데 거짓말을 하면 찬열삼촌이 안 위험한거잖아요. 삼촌을 돕는거잖아요. 그럼,


"아빠. 잠깐만 기다려봐."


저의 폰에는 비상시를 대비해서 여덟명 삼촌의 전화번호가 다 있어요. 찬열삼촌 것도 있어요. 저는 삼촌에게 전화를 합니다. 아빠는 뭐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이오를 안고 날 내려보고있어요.


#이디야? 너 지금 어디야?#


"하야토호텔이요. 아빠랑 같이 왔는데요, 근데요, 삼촌."


#어. 왜.#


"아빠한테 다들었어요. 저랑 이오랑 해서 삼십만원만 주세요."


#뭐? 삼십?#


"이디야. 무슨소리야?"


아빠도 당황해합니다. 네. 이해해요. 그치만 찬열삼촌은 부자라구요. 수호삼촌이 그냥부자라고 다들 말하지만 내가 여덟살때 루한삼촌이~ 찬열삼촌이~ 그런 동네에 산거면 부자라고(말하는루한삼촌도)(외동아들에북경살고)(벤츠운전한)(귀한자식이면서)그랬어요. 저는 다 기억해요. 그리구 찬열삼촌, 지금 아빠보다 더 유명한 모델이란말이에요. 삼십만원은 아무것도 아닐거에요. 아빠가 오늘 마트에서 물같이 쓴게 사십오만원이니까 착한 거짓말하고 삼촌을 돕고 삼십만원을 받으면 엄마도 좋아할거에요.


#돈? 돈달라고?#


"네. 엄마가 모든 일에는 적당한....적당...한..."


#댓가?#


찬열삼촌이 웃었지만 전 꿋꿋하게 말합니다. 꼭 삼십만원을 받아낼거에요.


"네. 그거요. 댓가가 있어야 된다고 했어요. 아니면 안할거에요."


제 말이 끝나자마자, 아빠는 호텔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다 쳐다보게 막막 크게 웃었어요. 이오도 아빠가 웃으니까 따라웃어요. 우이씨! 사람들이 아빠 알아보고 폰카 찍자나!


"이오야. 웃기지. 그지?! 하하하핳!"


"웅웅. 크헿헿헤."


어차피 이오는 내가 뭐하는지도 모르는데 알아듣는 척 하기는. 칫.


#그래. 알았다. 김이디. 내가 줄게. 준다. 대신 너랑 이오랑 삼십만원처럼 연기해야돼!#


"네. 삼촌. 삼촌, 근데 선불이에요."


"하하하하하하! 김이디! 그말 어디서 배웠어?! 대에박!"


#알았다. 알았어. 무서워, 와, 도경수 무서워. 김이디 너도 무서워.#


아빠의 말은 이제 귀에 안들어와요. 찬열삼촌이 돈을 준다는 말만 들었어요.


#돈 보내면 톡할테니까 들어와, 김이디!#


"네."


앗싸~! 승리의 미소를 지어봤어요. 이게 다 돈을 막 쓴 아빠탓이지만 아빠를 혼내는 건 엄마만 하는 일이니까 나는 혼내지 않아요. 앗! 찬열삼촌한테서 톡이 왔어요!








제4화 - 엄마없는 시간은 지루해 3 (부제: 나는 배우 도경수의 아들이다.)






찬열삼촌은 되게 키가 커요. 엄청 잘생기고 멋있어요. 제가 봐도 되게 멋있어요. 근데요, 막 예전에 사진보면 여러 누나들한테 둘러싸여서 막막 쁘이하고 있고 다 여자들이랑 찍은 사진 밖에 없어요. 그러고 자뻑(아빠한테)(배운단어) 너무 심해요. 근데 또 그럴만해요. 그래서 찬열삼촌이 살기가 괴로운 거라고 엄마가 그랬어요. 저도 학교에서 그러니까 이해해요. 저도 괴로워요. 여자들이란 꽃을 가만히 보지 못한다니까요. 꼭 꺾을라고 그래요.(말하고)(무슨말인지)(모름)


이오랑 손을 잡고 카페테리아에 들어가자마자 웨이트리스 누나가 우릴 반겼어요.


"왕자님들 누구 찾아오셨어요?"


"저기. 금발 저기 저사람이 우리아빠에요."


"으..응? 저기 저분이 너희아빠?"


"네. 대려다 주실래요?"

"응, 응, 그래. 가자."


누나가 당황하는 얼굴이 였지만 난 당당해요. 왜냐면, 내가 누구냐 하면. 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청룡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으로 두번이나 받은 배우 도경수의 아들이에요. 엄마가 그랬어요. 연기에서 자신...가암? 이랑 또 머더라... 위...기? 대..처... 암튼 그게 있으면 다된거라고.


"삼ㅊ, 읍!"


이오의 입부터 막고 들어가요. 이오가 아빠를 닮아서 눈치가 없다니까요.


"아빠. 여기서 뭐해?"


저와 눈을 마주친 찬열삼촌이 어색하게 웃었어요. 아. 삼십만원처럼 하라고 남말할 처지가 아니네요. 삼촌은 평생 연기하면 안되겠어. 전 활짝 웃었습니다. 제가 웃으면 모두들 웃거든요. 엄마랑 똑닮은 하트입술에 다들 푹 빠져요.


"아, 아들! 태영아! 태....인이도 왔네! 어, 떻게 왔어?!"

"아,아...들?이요?!!"


아줌마가 기겁했습니다. 하지만 전 아줌마를 볼 여유가 없었어요. 찬열삼촌한테 해야할 중요한 말이 있었으니까요! 엄마가 말하던 속안의 감정을 끌어올리는거야!


"피아노 콩쿨 끝내고 아빠 보고싶다고 하니까 기사아저씨가 여기까지 태워주셨어."


"그래? 기...임..기사가 전화도 없이 이럴 사람이 아닌데 아...무슨 일 있었어?"


"나 콩쿨에서 2등했어. 근데 아빠도 안오고 엄마도 안오고 꽃다발도 없어. 아빠 나 버렸어?
엄마가 그러던데? 아빠가 태인이랑 나 버렸다고? 딴 아줌마한테 갈거라고!"


"무, 무슨소리야. 태영아. 음 여기서 이러지말고, 저기, 죄송하지만 오늘은 가봐야겠네요.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실제로 전 레이삼촌이 가르쳐줘서 피아노 콩쿨해서 2등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때 입었던 옷이 바로 이 옷에 나비넥타이였어요. 전 열살입니다. 아빠의 코치도 없었고 더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제서야 아줌마 얼굴을 자세히 봤는데요. 아.....음.......응......음......삼촌이 더 예뻐요.


"가자. 태영아. 태인아."


"삼ㅊ,읍!"


찬열삼촌의 큰 손에 입이 아니라 얼굴이 막힌 이오는 삼촌에게 가방들리는 것 처럼 들려가지고 우리는 다 같이 카페테리아를 나왔어요. 뭐야. 의외로 간단해요. 이렇게 하고 삼십만원이라니. 연기자들은 쉽게 돈버나봐요. 그죠? 아닌가? 엄마는 집에서 나랑 책같은 거 보면서 연습했는데 그런것도 아닌가? 모르겠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찬열삼촌 보고 실실웃는데 진짜 되게 즐거워했어요. 아빠 때문에 나도 웃겨서 큭큭거렸더니 이오도 웃고 크흐흐흑! 그래서 삼촌이 우리를 대리고 화장실로 끌고 들어갔어요.


"형, 우리 이디 연기 장난아니지않냐? 완전잘해! 경수형 닮아서 공부도 잘하고 연기도 잘해! 아놔 진짜 아역배우부터 시켜볼까?"


"아니. 됐어. 아빠. 난 공부 더 할거야. 연기는 나중에 해도 된다고 엄마가 그랬어."


"그런가? 그래. 공부 더하고 이디가 하고싶을때 하자. 이오야. 형 되게 멋있었다. 그지?"


찬열삼촌은 아빠와 내가 쿵짝이 잘맞는다고 하면서 고개를 저었어요. 근데 쿵짝이뭐에요?
뭔지는 모르지만 아빠가 웃었으니까 좋은 거겠죠?


"근데, 가만있어봐. 삼십만원은 어디로 간거야? 나 알림 못 받았는데?"


아빠가 외계어를 합니다. 아빠. 정신 좀 차리세요. 여기에서는 찬열삼촌도 나도 서로를 쳐다보며 혀를 찼어요. 아빠가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삼촌의 눈빛에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리고 아빠는 나를 너무 몰라요.(한심,again) 나 혹시 찬열삼촌 아들인가?


"나가자. 이제 갔겠지. 내가 저녁살게. 뭐먹고 싶어? 이디야? 이오야? 다른 삼촌도 부를까?"


"웅! 삼촌! 나 치킨피자! 여기 호텔피자집 맛있어!!"


"피자? 그래. 가자!!"


뭐든지 사준다고 할때는 싫다고 하는게 아니라고 이건 아빠가 말해줬어요. 이오를 안고 뒤따라 나오는 아빠를 슬쩍 보니까 굵은 엄지를 척! 올리고 찡긋 윙크도 해줬어요. 으헹~ 아빠 나 잘했지?!


우리가족은 이제 곧 한판에 팔만원짜리 피자를 먹는다는 생각에 삼촌과 눈누난나 화장실을 나왔죠.

그런데! 띠로리~~~~! 그 아줌마가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뚜둔! 눈에 불이 나오는 거 같았어요.

너무 무서운 얼굴로 아빠와 삼촌을 번갈아 보고 있었어요. 진짜 무서웠어요.


"아....아직 안가셨네요?"


"세...상에! 어머나! 기가 막혀! 당신 게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였어요? 어이없어! 진짜!"


"그게 아닙니다. 얘는 내,"


"엄마에요."


저의 입술이 말했어요. 제가 아니에요. 제 입술이 말했답니다. 아빠는 멍해서 피식 웃었고 삼촌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아줌마, 아빠, 저를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리고 바로! 짜악! 하는 소리가 나고 사,삼초온을 그 아줌마가 때렸어요!!!


"불결해! 진짜!! 미친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선 보신거에요?!? 어떻게 게이커플이 애도 있어요?"


전 아줌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알수가 없었어요. 아빠랑 엄마가 그랬어요. 외국에는 우리같이 사는 가족이 많다고. 그리고 저랑 같이 노는 외국친구들 식구들은 우리같단말이에요. 우리친구들이랑 아빠엄마들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었어요.


머리가.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 왜 뭐가 불결한거에요? 불결한게 뭐에요? 잘모르지만 아빠와 삼촌의 표정이 무서워졌어요. 전 아빠의 윗옷을 꽉 잡았어요. 무서워서요.


"애들도 있는데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찬열삼촌이 무섭게 아줌마한테 말했어요. 진짜 무서운 얼굴이 였어요. 아빠가 내 손을 잡았어요.


"저, 형. 우리 먼저 가볼게. 나중에 연락할게."


"어. 미안하다, 종인아."


"아니야. 삼촌한테 인사하자, 이디야. 이오도."


"삼촌, 안녕히계세요."


"빠이빠이! 산초온!"


뒤돌아서 아빠랑 걸어가는데 내방 벽에 붙은 세계지도를 보면서 엄마랑 했던 말이 생각났어요.


「 이디야. 세계가 저렇게 넓은데 아빠엄마나 삼촌들 같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잖아. 그지? 포도맛 사탕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딸기맛 초코만 먹는 사람도 있겠지? 그래도 같은 지구에 사는 거 잖아. 그러니까 나랑 다르다고 해서 절대 싫어하면 안돼. 」


「 나는 안그래. 우리선생님이 그랬어. 사람들은 모두 같은 의자에 앉아있는 거랑 똑같다고 했어. 그러니까 무시하면 안되고 욕하면 안된다고 했어. 그럼 자기한테 그러는 거랑 똑같다고 했어. 근데 엄마, 무시가 뭐야?」


「 왜, 이디가 아빠 불러도 아무말도 안하고 모르는 척 하는 거 있잖아. 그런거. 」


「 그런거야? 근데 아빠는 안그러자나. 」


「 예를들어서 말한 거야. 아빠는 이디를 사랑하니까 안그러지. 」


그러니까 엄마 말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건가? 저 아줌마처럼. 그래요. 그렇다고 싫어하년 안되는거죠. 그렇지만 저 아줌마는 나쁜 거 같아요.


"아빠.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저는 잡고있던 아빠 손을 풀고 다시 뒤돌아서 크리스삼촌이랑 아줌마한테 뛰어갔어요. 삼촌이 왜왔냐고 아빠랑 집에 가라고 했지만 저는 아줌마한테 꼭 해줄 말이 있었거든요. 저는 턱을 들고 똑바로 아줌마를 쳐다보면서 말해요.


"아줌마. 아줌마가 그런 말 해도 저는 아줌마 싫어하지 않아요. 그치만 만약에 다음에 또 아줌마가 우리한테 그렇게 말하면 나는 아줌마가 바보라고 생각할거에요. 내가 열살인데 나한테 바보라고 불러면 좋아요? 안녕히계세요. 못생긴 아줌마."


삼촌을 봤더니 미소지으면서 최고라고 해줬어요. 찬열삼촌처럼 멋진 사람한테 칭찬 받는 건 기분좋아요. 아빠한테 달려갔더니 아빠가 무슨 말 하고 왔냐고 궁금해했지만 나는 말해주지 않았어요.


"진짜 말 안해줄거야? 김이디?"


"응. 아빠."


아빠. 남자는 자랑같은 거 함부러 하는 거 아니야.(멋진)(표정을)(짓는다)









제5화 - 엄마가 오다






내 방에는 우리가족 사진이 있는데요, 저는 자기 전에 사진 안에 엄마를 매일 한번씩 봐요. 요즘 엄마가 너무 바빠서 얼굴보기가 하늘의 별따기 거든요. 전화하면 얼굴볼수있지만 일하는데 방해하면 안되자나요. 내일 엄마가 다시 오면 또 일하러 어디로 갈지 몰라요. 그럼 삼촌들이랑 아빠랑 있어야 하는데 삼촌들이 싫은게 아닌데 이오도 저도 엄마가 집에 오래오래 있었으면 좋겠어요. 몇 시지? 아홉시 반이다. 내일 학교가려면 자야되는데 잠이 안와요.


오늘 찬열삼촌이 호텔에서 뺨맞을 때 무서워서 떨었는데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요. 테레비 말고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거 첨봤어요. ....아빠랑 자야겠다. 누워있던 침대에서 일어나서 아빠엄마 방문을 열었는데 이오만 침대에서 자고있고 아빠가 없어요. 아빠 어디갔지?


"아빠! 아...."


일층으로 내려왔는데 거실소파에서 아빠가 테레비 봐요. 어? 엄마랑 아빠다! 옛날에 같이 일했었다고 했는데 그때 인거 같아요. 역시 아빠는 춤을 잘춰요. 어. 근데 아빠 술마신다. 아까 저녁먹을 때 먹다 남긴 엄마표 닭다리찜도 먹고 있어요. 아빠는 정말 진짜로 엄마가 만든 음식을 젤 좋아해요. 그래서 엄마는 어디가기 전에 많이 요리해서 냉장고에 얼려놔요. 저도 시켜먹는 거보다 엄마가 만들어준게 좋아요.
아. 엄마보고싶다.


"어? 이디야. 거기서 뭐해. 안자?"


"잠이 안와. 아빠랑 같이 자도 돼?"


"아빠 지금 술마시는데 엄마가 알면 혼날텐데? 그래도 괜찮아?"


아빠랑 엄마는 원래 저랑 이오 앞에서는 술 안마셔요. 특히 엄마가 삼촌들도 절대 못마시게 해요. 어른들이 술마시는 거는 우리는 보는게 아니라고 했어요.


"응. 아빠 옆에서 잘래."


"엄마한테 비밀로 할거면 이리와."


소파에 가서 아빠 무릎에 머리를 올리고 테레비를 봐요. 삼촌들 다 애기같아요. 백현삼촌이 너무 귀엽고 민석이삼촌도 너무너무 귀여워요. 삼촌들 놀러가서 종대삼촌이랑 엄마가 밖에서 고기굽는 거 보는데 잠이 올랑말랑해요. 눈이 무거워요.


"근데 아빠...아빠는~ 엄마가~ 무서워?"


"어. 너네 엄마 무서워. 처음 봤을 때도 무서웠어. 젓가락질 못한다고 뭐라그러고 청소도 잘 안한다고 뭐라그러고 말도 별로없잖아. 엄마가. 그랬는, 자냐? 김이디? 잘자라. 아무튼 그래서 그랬는데....형이    경수형이 웃는데 귀엽고 예쁜거야. 예의도 바르고 잘생겼고 노래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잘 챙겨주고 그래서 반했다."


응? 엄마한테 반했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가족이 된 거 잖아. 엄마바보 아빠.









저는 지금 되게 많이 진짜 많이 기분이 좋아요. 아빠가 차타고 학교에 저를 대리러 왔는데 내가 공부하는 동안 집에 엄마가 왔다고 그랬어요. 와!! 진짜! 진짜! 진짜! 기분이 좋아요!

"그렇게 좋냐?"


"응!! 나 엄마한테 하고싶은 말 많아! 나 학교에서 노래 잘 부른다고 음악선생님한테 칭찬 받은 거랑~ 이번에 영어듣기시험 본거 만점 받은거랑~ 또, 또, 머있더라~~"


"너 나한테는 그런말 안했잖아! 김이디! 너 차별한다! 왜 아빠한테는 말 안해줘?!"


"어? 엄빠같이 있을 때 말할라구 그랬지!"


"퍽이나 니가?"


내가 웃으니까 입술을 삐쭉거리던 아빠가 웃어요. 아빠도 엄마가 와서 기분이 좋아보여요.


"아빠. 우리는 엄마없으면 못살겠다. 그치?"


"그걸 말이라고 하냐? 김이디?! 엄마 없으면 이런말은 이제부터 절대 하면 안돼. 알았어?"


"아니~ 그러니까 없으면 안된다는거지~"


"그래도 안돼."


"알았어. 근데 그리구 나는 아빠도 없으면 안돼."


"너 그거 진짜야?"


"응!!! 진짜야!"


"이디 너, 아빠도 엄마만큼 사랑해줘야되는거야. 아빠 없었으면 너도 없고 이오도 없고 응?"


"또 그소리해~ 알아~ 안다고~"


아빠는 맨날 엄마랑 똑같이 사랑해야 된다고 그래요. 지겨워 죽겠어요.






차에서 내려서 엄마없으면 아빠가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가는데 오늘은 아빠가 벨 눌렀어요.
나랑 아빠랑 서로 눈보고 웃었어요. 하하핫! 우와! 엄마다! 엄마가 문열고 이오랑 안에서 나와요!


"이디야!!!"


"엄마!!"


"우리 이디 잘 있었어?! 보고싶었어! 이디야!"


나는 엄마를 힘껏 안았어요. 엄마냄새가 나요. 너무 좋아요. 근데....


"....이디야?"

"....흐...흐윽...으아아아아아앙!!!"


"이디야, 이디야. 왜 울어?! 무슨 일 있었어?!?"


"엄마 횽아 왜우러? 왜?으아앙아앙!!"


내가 우니까 이오도 울고 엄마는 날 안아들고 볼에 뽀뽀 해주는데 나는 눈물이 계속나서 엄마 어깨에 이마대고 울었어요. 아빠는 이오 안고 울지말라고 하는데 엄마는 나한테 아무말도 안하고 그냥 같이 집으로 들어갔어요. 엄마가 소파에 앉아도 나는 울었어요. 엄마 목을 꼭 안고 울었어요.


"이디야, 우리 노래부를까? 저번에 아빠랑 같이 부른노래 가르쳐줬잖아. 기억나?"


나는 고개만 끄덕끄덕 했어요. 그러니까 엄마가 먼저 불러줬어요.


"소리 내어 세 번 웃고 여섯 곡의 노랠 들어 다섯 시간 자고 나면 다 별거 아닌 게 될 거야~
난 너를 지키는 저 빛의 기사처럼~"


엄마노래는 좋아요. 저는 엄마노래가 좋아서 눈물이 뚝 그쳤어요.


"3!6!5! 너의 앞에서 오직 너를 이유로~ 검을 휘둘러~ 3!6!5! 마치 널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매일을 살게~ 이디야, 이제 안우네?! 잘했다. 우리 이디."


엄마가 또 뽀뽀해줬어요. 으헹~ 좋다. 엄마좋다.


"옴마, 옴마 나도! 나도!"


이오가 엄마한테 달려와서 뽀뽀했어요. 이오 미워요. 절로 가버렸으면 좋겠어요. 내가 엄마 가질거야! 나는 이오를 팔로 밀어냈어요. 엄마가 이오한테 잘해주는 거 싫어요.


"이오, 너 가~ 아빠한테 가."


"시러! 왜, 왜~ 으아아아아아앙아앙!!"


"이디야, 이오 울리면 안돼지~"


"엄마, 이오 저리 가라 그래~"


엄마를 두고 나랑 이오가 싸우는데 아빠는 가만히 보고있는 거에요. 아빠보고 이오 대려가라고 했는데 아빠는 웃기만 하고 엄마 옆에 앉아있기만 했어요. 아~! 아빠 미워! 밉다고~!!







밥도 맛있게 먹고 게임도 하고 뽀로로도 보고 그러다보니까 벌써 잘시간이 됐어요. 오늘은 엄마랑 잘건데 우리가 졸고있으면 아빠가 자꾸 나랑 이오랑 우리 방에 다가 대려다놓고 문 닫고 나가서 나랑 이오랑 아빠엄마방에 달려가서 이불 속에 쏙 들어갔더니,


"야, 김이디. 김이오. 너네 너무한거 아니냐? 잠은 너네 방에서 자야지. 여기서 자는 거 아니지!"


라고 말하는 거에요. 나는 화가 나서 아빠한테 고함을 빽 질렀어요.


"엄마는 내꺼야!!!"


"너 웃긴다?! 엄마가 왜 니꺼냐?! 내꺼지! 내가 먼저 찜했어! 내가 먼저 좋아했다고!"


"내가 엄마 더 좋아해! 사랑해!"


"아니거등! 내가 훨씬 더 많이 사랑하거든!! 너 이리 나와. 김이디! 김이오!"


"이오야! 도망쳐!"


"꺄아!! 헿ㅎ하하하히ㅏㅎ헤힣!!"


아빠한테 안잡히려고 이오가 엄마 베개를 들고 방을 막 뛰어다니고 나도 뛰어다니니까 아빠엄마방이 어질려졌어요. 으하하하! 재밌다!!


"엄마!!"


방으로 엄마가 들어왔어요. 엄마가 나랑 똑같이 웃어요.


"뭐해? 술래잡기해? 나도 이디랑 이오 잡아볼까?!"


"끄아앜! 꺄아아아!!!"


"으하하하핳하!!"


엄마가 집에 있어서 너무 좋아요.








에필로그 - 이디와 이오 엄마로 사는 법





안녕하세요. 저는 '우월했던'도경수 입니다. 영화 촬영 때문에 파리에 있다가 집에 왔는데 그 사이에 이디에게 큰일이 생겼더라구요. 종인이가 해주는 말을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런 말을 했어? 이디가?"


"어. 궁금해서 찬열이형한테 물어봤더니 그랬다는거야. 장난아니지. 이디 완전 잘키운거 같아.
어떻게 거기서 쫄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하냐!? 진짜."


"그래서 이디는 괜찮아?"


"응. 울지도 않고 씩씩해."


방금 에스프레소기계에서 직접 내린 라테를 종인이 앞에 놓고 다리에 매달려있던 이오를 안아들었어요. 그러고보니 우리 이디가 벌써 열살. 초등학교4학년입니다.
우리가족에게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가능하면 애들에게는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싶어서 행동반경을 크게 넓힌 적이 없었어요. 저희의 주변 사람들은 저희를 잘 이해해주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부터 조금씩 알게 해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이런 일이 터진겁니다. 그런데 의외로 우연히 맞닥뜨린 산을 잘 넘어가 주어서 이디에게 고마워요.


"배고프다, 도경수."


짠한 감상에 젖어있는데 종인이가 훅치고 들어옵니다.


"밥 안해줘?"


"장난해? 나 집에 온지 20분도 안됐어. 밥하라고?"


"도경수가 만들어주는 스파게티랑 비빔밥이랑 카레라면 먹고싶어. 어?"


"라면? 라면은 끓어줄게."


냄비에 물을 붓고 기다립니다. 이오랑 장난치다가 눈길이 간 쓰레기통에 소주병이 예쁘게 자리 잡아있습니다. 이마에 핏줄이 빠직 섰어요. 냄비의 물을 싱크에 다 부어버렸어요.


"김종인. 너 내가 집에서 술 마시지 말라고 했지."


"...어? 안마셨는데?"


"야. 저거 안보여? 너 나한테 거짓말 하지말라고 했지. 소주 모가지가 나와 있는데 무슨소리야."


종인이의 표정이 밝아집니다. 왜 밝아지지? 미친놈이에요.


"애들 보는데 술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나 나갈때마다 이러냐?"


"아니야. 안그래. 어제는 내가 이디 일때문에 생각이 많아서. 미안."


활짝웃는 종인이 때문에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아니, 말하는거랑 표정이 왜저러죠? 반성하는 기미가 없잖아요. 화가 납니다.


"말이 나온김에 왜 애한테 거짓말 하라고 시키냐? 좋은 것도 아니고 소개팅녀 차는데 왜 애를 대려다써? 찬열이도 그러는 거 아니야. 애가 뭘보고 배우겠어? 야, 너 듣고 있어?"


"어. 형."

"근데 아까부터 왜 웃어! 징그럽게, 임마."


"좋아서."


미친놈. 돌았나봐요. 짜증나서 종인이 손을 잡고 온힘을 다해 꽈악 눌렀더니, 방방 뛰면서 아프다고 놓으라고 하는데 얼굴이 찡그린건지 좋은 건지 알수가 없습니다. 능글능글해요. 아주.


"안할께, 도경수, 안한다고, 아프다고!"


"정신차려, 김종인."


"아, 알았어! 아퍼!"






진짜, fin



카디페밀리 1. 2.







제1화 - 저는 '김이디'입니다.





지글지글


안녕하세요. 저는 열살, 김이디 입니다.


보글보글



저 지금 엄마가 냉동실에 얼려둔 김치찌개 꺼내서 끓이고 있어요.


딱딱딱딱


계란도 까서 후라이팬에 계란 후라이 네개 하고 있어요.
내꺼 하나, 내동생 '이오'꺼 하나 그리구 아빠는 어른이니까 두개.


일주일 전에 엄마는 영화 촬영한다고 파리로 떠났어요. 엄마가 떠나기 전에 저한테 말해주셨던 꼬옥 해야할일 중에 하나가 있는데 아빠랑 이오는 맨날 아침에 늦게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아빠랑 이오 깨워서 아침먹고 학교가야 되요. 아, 저는 이런 거 맨날해요. 엄마는 내가 태어날때부터 바빠서 내가 엄마를 도와줘야 된다고 (아빠 지는 맨날 잠만자면서)아빠가 그랬거든요.


"야! 김이오!! 일어나라고!!! 아빠!!"


당연히 안일어나죠. 휴~~ 2층 아빠엄마방으로 직접 출동합니다.
문을 열자마자 이따만큼 큰 폭탄 맞은 침대가 있어요. 이불은 막 이케이케 구겨져서 카페트 바닥에 떨어져있구 베개도 네개 전부다 침대 밑에 다 떨어져 있어요. 그리구 아빠랑 다섯살 내동생 '이오' 만 침대 위에서 엎드려 자고있죠. 이제 아빠를 깨울거에요. 입술을 꾹 물고 회색티셔츠를 힘껏당깁니다! 야압!!


"아빠~!! 일어나라고! 밥먹어!"


아빠 몸을 마구마구 흔들어도 안일어나면! 이렇게! 등을! 꾹꾹 여러번 밟으면! 엣헹~ 아빠가 퉁퉁부은 눈을 가늘게 떠요. 그치만 영혼이 날아가서 다시 눈을 감아버린답니다. 에효~


"이오 깨워!! 아빠! 밥먹고 나 학교 가야돼, 깨워서 내려와! 내가 만든 계란후라이 다 식기전에 나 밥 먹을 거라고, 아빠!"


일단 아빠한테 겁을 줘요. 이래도 안일어나면 나도 몰라요. 저만 먹고 그냥 학교 갈거에요. 근데 다행이도 아빠가 이오랑 같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왜, 어른들이 그러자나요. 너 아빠랑 똑같다~! 이렇게. 내동생 이오는 진짜 아빠랑 똑같아요.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뻣쳐서 그 왜, 만화에 나오는 울트라 초인 같이 되가지고 눈은 퉁퉁 부어가지고 눈도 못뜨고 뭐라고 찡찡거리면서 내려와요.


"아들, 나 물 좀 줘...."


세상만사 다 귀찮다는 듯 식탁의자에 앉은 아빠는 맨날 아침에 물부터 찾는데 엄마는 컵에다가 생수 따라주거든요? 근데 난 그냥 생수병 줘요. 왜냐면 귀찮으니까요. 이오도 아빠 따라서 물 달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럼 컵 두개는 누가 씻나? 내가 씻지! 쯧. 귀찮아요.


"빨리 밥먹어. 아빠. 나 학교 대려다 줘야되자나."


"아...맞다. 오늘 목요일이냐?"


저는 고개만 끄덕하고 이오에게 숟가락을 쥐어줬어요. 매주 목요일은 아빠가 학교에 대려다주는 날이에요. 사실 그거도 요즘 아빠가 외국에 잘 안나가고 한국에 있어서 할수있는거에요. 평소같으면 삼촌들이 대려다 주거든요? 우리는 삼촌이 여덟명이나 있는데요, 그 삼, 아, 안되겠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빨리 밥먹고 학교 가야 된단말이에요. 삼촌들 얘기하면 할말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 할거에요. 지금은 이오 밥 먹이고,


"야! 어디가! 밥먹어야지~!"


하......(이마에)(손을)(얹는다) 밥 먹다가 이오가 거실로 뛰어나갔어요. 엄마 없다고 완전 지 맘대로 밥먹다가 소파에 앉아서 뽀로로 보고 춤추고 내가 끌고오면 한 숫가락 먹고 또 테레비보러 뛰어나가고 그래요. 아빠요? 아빠는,


"김이오. 이오야. 일로와. 밥먹어야지. 어디가."


라고 밥 이렇게 여기다 넣어가지고 우물우물 거리면서 손짓하다가 이오가 막 춤추면서 뽀로로 노래하면 그거 보면서 웃으면서 밥먹어요. 그러다가 아무말도 안해요. 엄마는 우리가 저러면 밥 다 먹으면 테레비 보라고 무섭게 야단치는데 아빠는 자꾸 이오가 저러는 거 가만히 놔둬요. 그래서 이오는 아빠를 좋아해요. 아, 몰라. 학교 늦기 전에 밥먹어야겠어요. 진짜 늦을지도 몰라.


"...아들, 엄마 언제온대?"


아빠가 내가 만든 계란후라이를 입에 넣으면서 물어봅니다. (브금: 뽀로로주제곡)


"엄마? 모르겠는데? 아빠, 엄마랑 전화 안했어?"


저는 열살이니까 십년 살았어요. 아빠랑 엄마랑. 나는 다 알아요. 아빠랑 엄마랑 싸웠나봐요. 왜 나한테 그런걸 묻냐구요. 전화도 안하는 거 보니까 엄마가 엄청 삐진 거 같아요.


"엄마가 너한테 전화 안했어?"


"했어."


"했어? 뭐라고 했어?"


"어? 나랑 이오 잘 있냐고 해서 잘 있다고 했더니~안 다치게 잘 보라고. 삼촌들한테 버릇없게 하지말고 예의바르게 하고 아침밥은 꼭 다 같이 먹으라고 했어."


"그리고? 아빠는 안물어봐?"


아빠가 엄마가 만들어놓고 간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었다가 놨다가(더럽게)자꾸 그래요. 짜증났지만 아무말도 안했어요. 아빠가 좀 기운이 없어 보여요.


"안물어봤어. 아빠, 엄마랑 전화 안돼?"


"너네 엄마가 전화 안 받아."


갑자기 입에 밥을 이만큼 넣고 씹는 아빠가 삐진 거 같아요. 그러게 뭔지는 몰라도 엄마말 잘 듣지. 아빠는 엄마없으면 맨날 엄마 찾아요. 엄마랑 싸워도 엄마찾거든요. 아빠는 엄마가 세상에서 젤 좋대요. 엄청 많이 바보같아요. 어제 엄마한테 전화 왔는데 원래는 어제왔어야 되는데 오늘지나고 내일 아침에온다고 그랬어요. 근데 엄마가 아빠한테 말하지말고 아빠가 물어보면 모른다고 하라고 그래서 그런....아앜! 나 학교!!


"아빠, 나 학교 늦을거 같아! 그거 아빠가 다 치워! 나 이오 세수시킬거야."


열심히 아빠랑 말해도 밥그릇에 있던 밥은 다 먹은 나! 헤헷! 어젯밤에 미리 챙겨놓은 가방을 매고 이오 세수시키러 가요. 이오는 세수하기 싫다고 또 찡찡거리지만 안들리는 척 비누칠해서 세수 빡빡시키고 양치도 치카치카 시켜요. 오늘은 이오가 유치원 안가는 날이에요. 개교기념일이거든요. 아빠도 오늘 쉬는 날이니까 아마 둘이서 놀러갈지도 몰라요(는 날 대려다주고 잘 가능성이 99%). 그래도 세수랑 양치질은 해야되요. 엄마가 꼭꼭 하라고 했으니까.


"형아, 형아 학교 안가묜 앙대? 나랑 아빠랑 노르자. 어? 어?"


"학교갔다와서 놀면 되자나."


어른스럽게 말합니다. 나도 아빠랑 이오랑 놀고 싶지만 학교에 가야하니까 어쩔수 없어요. 이오를 화장실에서 대리고 나와서 옷까지 입히고 나니까 아빠가(맨날쓰는)(사실은엄마)검정모자에 (마실나갈때)(입는)검정 트레이닝복을 입고 차키를 들고 현관에 서 있어요. 그나마 아빠가 빨리 다 해줘서 다행이에요. 나는 이오 손을 잡고 서둘러서 현관을 나가요.


저는 차 안에서 책을 읽어요. 매일 한권씩 읽으라고 엄마랑 아빠가 책을 아주 많이 사주셨거든요. 옆에 앉은 이오는 아이패드로 아빠가 춤추는 거 보고있어요. 우리아빠는 한국에서 춤 잘추기로 유명해요. 예전에는 엄마랑 같이 아이돌을 했었는데 진짜 인기많았대요. 지금은 아빠는 안..무가? 춤 가르쳐주는 선생님? 그런거도 하고 모델도 하고 엄마는 가수 겸 배우에요. 저는 아빠엄마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학예회 같은 거 하면 저희 반 친구들 아줌마들이 우리 아빠랑 엄마 잘생기고 멋있다고 칭찬해요.


학교에 다 왔어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아빠한테 3시까지 학교 정문으로 오라고 미리 얘기를 하고 이오의 뻣친 머리카락을 이쁘게 정리해줘요.


"이오야. 아빠 말 잘듣고 있어. 형 금방 올게."


이오에게 가방 앞주머니에 들어있던 초코렛을 꺼내줬어요. 좋아하면서 눈을 꾸욱 접어서 웃는 내동생은 웃을 때 진짜 정말 귀여워요.(울때는)(때려주고)(싶지만)


"아들. 오늘도 여자 조심해라."


"네. 아빠. 다녀오겠습니다."


보통 공부 열심히 해라 아닌가요?(....) 그치만 우리아빠는 매일 같은 말만 해요. 하긴 공부를 더 잘할수는 없어요. 저는 전교1등이거든요.(자랑아님) 아빠말대로 여자는 조심하고 있어요. 이제 차 밖으로 나가면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이디야!!!"


"이디왔다! 이디야!!"


"와! 김이디! 김이디! 어뜨케! 오늘도 잘 생겼어!"


"이디야! 같이가자!!"


"이디야! 같이가!"


한두명도 아니고 되게 귀찮습니다. 네. 네. 그치만 귀찮아하지 않아요. 여자한테는 매너있게 항상 친절해야 한다고 종대삼촌이 그랬어요. 그리고 전교1등이라고 학생회장 하지 말라고 찬열삼촌이 그랬어요. 그게 더 인기많게 하는 비결이래요.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하지 말라고 해서 안했어요. 그랬더니 진짜로 그 뒤부터 여자애들이 더 따라다니고 책상 서랍이랑 내신발장에 맨날맨날 편지랑 사탕이랑 우유같은 게 너무 많아서 꽉 차요. 귀찮지만 백현삼촌 말대로 거절하지 않고 다 챙겨서 집에 가져가요. 그래서 백현삼촌 한테 다 줘요.


이렇게 저의 학교생활이 시작될 때, 아빠와 이오는 뭘하고 있을까요?









제2화 - 엄마없는 시간은 지루해






김종인입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카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던 전직 아이돌이고 SMP엔터테인먼트의 전속 안무가이자, 모델이에요. 그리고 지금의 저에게는 말티즈 같은 마누라 도경수와 김이디, 김이오 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 둘이 있어요.


이디는 경수형을 닮았고 이오는 저를 닮았죠.(아들바보)(웃음작렬)
우리애들 이름이 특이하죠? 경수형도 같은 그룹출신의 현직 배우인데 전에 '디오'라는 예명을 썼어요. 저의 예명과 형의 예명을 한자씩 따서 지었습니다. 특이하고 재밋다고 다들 잘 기억해주시더라구요.


저는 일이 바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행복한 편입니다. 경수형과 싸웠을 때 빼고 말이에요. 일주일 전에 형이 파리로 로케가기 전에 가지말라고 했던 총각파티에 어쩔수없이 갔었거든요. 근데 이게 사실 꼭 가야만하는 신동선배님의 총각파티라서 안갈수가 없었단 말이죠. 내 마누라 왈,


「신동선배님 몰라서 그래? 가기만해봐! 너 춤 못추게 다리 분질러 버린다!」


일단 걸리면 삐질게 뻔하니까 쉬쉬해달라고 말하고 철저히 비밀로 하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그때 불러온 스트립퍼랑 부비부비한 동영상을 타오가 경수형한테 보내가지고 내가 지금! 어?!?
이디를 학교에 대려다주고 졸린 눈을 비비며 마트에 장을 보러왔지만,


"압빠! 아뽜! 뽀롤! 뽀로로!"


정말 오늘은 눈에 넣어도 안아픈 내새끼 이오가 안중에도 없어집니다.


"뽀로로!!!! 뽀로로!!! 사져사져!!"


"뭐? 뽀로로? 저거?"


뽀로로 DVD를 짧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이오는 제가 그걸 집어주자 신났어요. 아까 이디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정리해준 머리카락은 다시 산발이 되가지고 가운데 머리카락이 뿅하고 사과꼭지처럼 서 있어요. 으이그~ 귀여운 내새끼. 언제 형에게서 전화가 올까 손은 폰을 만지작 거리지만 입술은 이오의 뽈따구에 쪽!했습니다! 내새끼지만, 내새끼라 그런가, 날 닮아서 그런가 예쁩니다.(아들바보)(미소)


뽀로로에 정신 팔린 이오를 안아들어 카트 앞에 앉혀놓고 장을 보는 건지 폰을 보는 건지 모를 시간을 보냅니다. 경수형이 한번 삐지면 좀 오래가요. 정색하고 말도 한마디 안합니다. 그러면 이디가 그러죠. '다 아빠가 잘못한 거니까 빌어.' 라고. 하지만 이번 꺼는 내 잘못은 아니라구요. 아놔....


"압빠! 압빠! 쩌거! 쩌거! 나 쩌거!"


"또 뭐."


"까까!"


"그래. 까까살까?"


집에 가서 후배들 모니터 하려면 입도 심심한데 과자 좀 사고 간만에 애들이랑 쉬는 거니까 집에서 같이 고기구워먹게 삼겹살이랑 꽃등심도 사고, 상추도 사고 아이스크림도 사고,사고,사고,사고,


"45만2천원 나오셨습니다, 고객님."


간만에 쉬는 날인데 뭐 이정도야. 여러개의 봉지를 카트 안에 다시 담고 안에 있던 사과맛 젤리의 껍질을 까서 이오에게 내밉니다. 냠냠찹찹 잘도 먹는 이오는 가면 갈수록 나를 닮아가는 것 같아요. 지나가던 여대생들이 저랑 이오를 보고 똑같다며 귀엽다고 같이 사진을 찍어가는게 다반사죠. 이디는 이미 다니는 학교는 물론이고 근처에서 엘리트얼짱초딩으로 유명해요. 훗. 아빠엄마가 좀 잘 생겼나요? 저나 경수형이나 인물로는 어디가서 빠지지 않습니다.(으쓱)


계속하면 입 아플 우리가족 인물 자랑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돌아가보자면 경수형이 일주일째 전화를 받지 않고 있어요. 아들한테는 전화하고서 제 안부는 물어보지도 않고 애들만 달랑 챙기고! 니 서방은?!?! 니 서방이 너 온다는 날 맞춰서 쉴라고 이틀 밤을 세워서 일을 몰아서 하고 왔는데 오지도 않고 전화도 없고! 이게 말이나 됩니까?!


"압빠. 이거, 엄마! 엄마다! 그치?!?!"


물건을 실은후, 한숨을 쉬고 운전대를 잡는데 뒤에 안전의자에 앉은 이오가 저에게 뽀로로를 가리키며 엄마라고 합니다.


"그래. 엄마 닮았다."


"그지? 엄마다...긍데 압빠. 엄마 언제와?"


"엄마? 금방 오....겠지?"


"머야. 아빠도 몰라? 엄마 오디가써? 엄마?"


"엄마 일하러 다른나라로 갔어."


"그게 어딘데?"


"여기서 비행기타고 가는 데 엄마 금방 올거야."


"긍데 왜 엄마 안와? 엄마?!"


이오의 눈이 갑자기 그렁그렁 해졌어요. 아. (헬게)시작입니다. 목놓아 울 준비를 하는 이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갑자기 봇물터진듯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어요.


"으아아아아아앙~~~!!!! 엄마~~~!!!! 으허허어어어어엉!!! 으아아아아아아ㅏㅏ 어,어,어엄마~!!!"


아, 이건 운전을 하고 있어서 애를 달랠수도 없고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어요. 도경수!! 진짜!!


"아아아빠아아ㅏㅏㅏㅏ!! 흐어어어엉어엉~ 엄마대리거와!!! 대리거와!! 으아아아아아ㅏㅇ!!! 엄마!!! 엄마 보거시포!! 으아아아아앙아ㅏㅏㅏㅏ!!"


그렇게 좋아라하는 뽀로로 DVD도 손에서 놓고 폭포수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침도 떨어지는데 그걸 백미러로 안타깝게 보다가 차라리 나도 저렇게 울수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안되는게 성인이니까 그리고 아빠니까. 참는 거죠.


아이 울음소리를 이십분동안 HD돌비서라운드 음질로 차 안에서 들으면 거짓말 보태서 고막이 나갑니다. 아무리 내새끼라도 짜증나게 마련이에요. 그래도 오늘은 그치라고 말도 못합니다. 방법이요?

그냥 애 안아들고 온갖 감언이설로 달래는 거죠. 뭐 있나요.


"으아아아아아아앙!! 엄마!!엄마!! 엄마!!!!!! 엄!!!마!!!!"


"엄마 금방 온다니까, 이오야. 그만 울자, 어? 아빠가 오늘 뽀로로비디오게임하고 놀아줄, 아니, 아빠랑 춤추고 놀까? 응??"


뽀로로게임하다가 또 울까봐 좋아하는 춤추고 놀자고 하는데도 안먹힙니다. 평소에는 춤추는 거만 보면 따라추고 눈이 사팔이 되도록 보고 그러는데 이거도 안먹히면 정말 방법이 없는듯 해요. 이디가 수업중일테지만 전화를 해볼까 진지하게 (2초)고민하다가 데님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들었습니다.


#아빠? 왜?#


"너 수업중이야?"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옴마!!!!!"


#아니. 쉬는시간. 아, 이오 왜그래?!?! 왜 울어?!#


"엄마보고 싶다고 울잖아! 뭐하면 그치냐?"


#아! 시끄러워! 김이오! 너 그만 울어! 아빠말 안들리자나! 아, 이오 바꿔봐!#


"이오야, 이오야, 형. 이디형!"


급하게 이오의 귀에 폰을 대니까 처음엔 듣지도 않더니 신기하게도 점점 진정을 합니다.
오오오~~ 역시 김이디 밖에 없다. 내 똑똑한 아들.


"흑...웅...웅...흐윽...응...웅..아라써..웅..앙그롤꼬야...웅..아랏쪄..웅..압빠 바꾸래."


"어! 이디야."


#아빠. 내가 집에 가면 놀아준다고 했으니까 이오가 만약에 또 울면 냉장고 안에 빨간반찬통 안에 치킨너겟있거든? 그거 전자렌지에 대워주면 돼.#


"어. 그래. 알았어."


#그리구 우리 냉장고에 아무것두 없어서 장 봐야되니까 아빠 학교올때 가자.#


"아빠가 갔다왔는데? 방금?"


#뭐어??? (깊은)하.......알아써. 일단 나중에 봐. 종쳤어.#


"그래, 아들! 고마워! 있다가 봐!"


뚝! 띠,띠,띠,띠....


".....아,아들?"


아들이 먼저 끊었습니다. 아까의 한숨으로 봐서 또 제가 뭘 잘못한거 같네요.
제가 뭘 잘못 한걸까요?


"근데 이오야. 아까 형이 뭐라고 했어?"


"어? 혀,혀엉이~ 아빠가 뱅기 태워쭈꼬 말 태워쭈꼬 그런다고 그랬따! 구러면 옴마가 온대!"

아.... 요즘 이오가 신들린 포풍성장으로 엄청 무거워졌는데 뱅기? 말?


아들아.... 넌 니 아빠허리를 작살낼참인거냐?






이리가면







1.


오랜만의 보름장에 양반이건 평민이건 할것없이 웃음꽃이 가득했다. 특히 오늘은 마을에서 가장 장수하고 계신 김대감의 회갑연이 있는 날이라, 평민이나 거지나 그 댁 대문에만 가면 떡한조각 술한바가지 나눠주는 훈훈한 인정이 마을전체를 들뜨게 만들었다. 김대감네 외손자와 어릴적부터 친분이 두둑한 도씨네 둘째아들 경수도 점심이 되기 전부터 선물꾸러미를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저명한 고관대작들이 모일테니 행색에도 소홀할수없어 아껴두었던 은은한 연분홍도포를 두르고 김대감댁으로 걷는데, 지나가던 여인네들이 이리수근 저리수근 소근소근 힐끗힐끗. 왠만한 여인보다 출중한 이목구비에 단아하게 갓을 쓴, 목련 같은 도경수도령에게 눈이 쏠리는게 당연할터. 척 보아도 여염집규수인 어떤 여인은 머리끝까지 누르고 있던 장옷사이에서 자신의 면상이 다 드러나는 것도 모르고 멍하게 도경수도령을 쳐다보더랬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도령은 척척 걸음을 걸어 벌써 김대감댁 대문 앞에 섰다. 그런데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 경수의 안색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아우가 있을까. 없다면 얼마를 본가에 돌아오고 있지 않는거지. 대체 어디서 뭘하고 다니길래 어른들에게 심려나 끼치고 다니는겐지. 등등의 걱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도도련님! 어서오십시오~!"


화사한 홍색도포를 두른 경수를 단번에 발견한 수만이가 고개숙여 인사하고 그를 집안으로 들였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마당을 한번 훑고는 수만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아우는 들어왔는가."


"아니요. 아직입니다요. 그게 말입니다, 도도련님, 도련님께서 부,"


수만이 급하게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몇 발자국 안떨어진 곳에서 경수를 알아보고 아우의 어머님께서 바삐 걸어오셨다. 수만이 눈치를 채고 얼른 뒤로 빠졌다.


"이게누구신가. 도도령 아니신가."


"안녕하셨습니까."


"안녕하지 못하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게 어디를 돌아다니는 지도 모르니 내 속이 말이 아니야."


"걱정마세요. 몇일 연락이 뜸하다가 바람처럼 나타나지 않습니까. 오늘은 일가에게 중요한 기념일이고 하니 조만간 모습을 드러내겠지요."


"그럼 다행이네만, 내가 아들하나 있다고 너무 오냐오냐해서 잘못키운 탓인지 매사 자기멋대로에 어르신 말은 듣지도 않으니...."


"어머님. 이 좋은 날 눈물을 보이시면 어찌하십니까. 걱정마세요. 꼭 들어올겝니다."


"그래, 그래야지. 아, 그래. 어서 어르신들께 인사를 해야지, 도도령."


"예. 그래야지요."


그러나, 해가지고 어둠이 내려서까지 아우는 본가에 나타나지 않았다. 잔치는 성대하게 잘 치뤄졌으나 아우의 부모님들은 상심하셨다. 경수 저도 양반의 아들인 동시에 나라의 백성으로 아우의 심정을 모르지 않지만 그런다고 난국이 타계되는 것은 아니거늘 어찌 젊은 혈기만 믿고 자꾸 활개를 치는지 답답할 노릇이었다. 다음날, 무언가 그에 대한 정보가 있나 해서 책방가려고 저작거리를 걷고있던 경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게다가 너무 생각에 집중한 나머지 옆에 지나가던 노비들의 대화를 못들을 뻔했다.


"그거 들었어? 어제 유대감네가 도둑을 맞았다는 거 말이야."


"그래? 거참 잘됐군! 돈도 안주고 사람만 부려먹는 유대감이 털려야지, 암!"


"예끼! 그러다 누가들어!"


"들으라고 해! 있는 것도 없는데 뭐가 두려워?! 아, 그리고 말이야, 관아에 행동대장이 왔다고 뒷소문이 돌아. 이번엔 작정을 하고 '이리가면'을 잡을 결심을 했나봐!"


이리가면 이라는 말에 경수가 어깨를 흠칫했다.


"그 행동대장이 누군데 이리가면을 잡겠다는 거야?"


"소문으로는 변뭐시기라는 놈인데 날쌔기가 날다람쥐 같다고 하더라고."


경수는 걸어가던 발을 멈추고 섰다. 그들이 지나가고 나서도 움직일수가 없었다. 변뭐시기라면 아마도 변백현 행동대장인데 세상에. 이번에야말로 큰일이 터졌다. 경수는 벗겨지지 말라고 서둘러 갓을 손가락으로 잡았다. 엄하게 지키던 양반체면은 접어두고 권씨를 만나러 책방으로 내달린다.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간 책방 안에는 마침 수만이가 권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만이 반가워하며 경수가 미처 닫지못한 책방문을 닫아 자물쇠를 걸었다.


"도도련님. 큰일입니다. 이거보십시오."


권씨에게 인사를 할틈도 없이 수만이 종이를 내밀었다. 그 위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내가 오늘밤 정대감집으로 출두를 할 것이니 목을 씻고 기다리거라. -이리가면-]


이리가면은 도적질 전에 한번도 미리 공고를 한적이 없다. 이 내용은 도적질만 하는 이리가면에게 부합되지 않는다. 목을 씻고 기다리라니. 살해라도 하겠다는 뜻 아닌가. 이건 누군가의 계략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이건 그의 글씨체도 아니다. 어제 집에 돌아오기 전에 아우가 부상을 입었다고 수만이에게서 들었는데 이렇게 안정적이고 당찬 필체가 나올리 없는 것이다.


"이게 어디에 붙은 것이냐."


경수가 수만이에게 물었다.


"온 마을에 다~ 붙었습니다요."


뒤이어 이번엔 권씨가 말을 잇는다.


"소문들으셨습니까? 이건 분명히 여우같은 변백현 행동대장의 머리에서 나온게 분명합니다. 알게모르게 마을사람들이 이리가면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큽니까. 도련님은 분명히 이게 계략이라는 것을 아셔도 나오실게 뻔합니다."


"....아우가 어디있는지 아는가."


경수의 질문에 수만이도 권씨도 고개를 저었다. 아는 이에게 피해가 갈까봐 남의 도움 없이 활동하는 성격이라 일러두지 않았던 게 뻔했다. 아우의 강직한 성격이 어디를 갈꼬. 그러하니, 이 긴박한 상황에도 세사람은 마을의 영웅에게 해줄수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름에 있다."


대학의 첫장 첫문을 백번 읽었다. 한번 읽고, 달이 밝아서 아우가 앞은 잘보이겠네 생각하고 또 한번 읽고, 큰일은 없을지 심려하고. 일부러 밖이 잘보이는 사랑방에 앉아 지나가던 아우가 혹시라도 보일까 똥줄타는 마음에 창문을 조금 열어놓았다. 얼기설기 엮인 가지들 사이로 어여쁜 달을 보겠다고 창문을 열어놓은 게 아닌데.... 오늘밤에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 절교라도 할 결심으로 초롱불에 의지해 책을 읽는다. 마음으로 다잡고 백한번째로 읽어보려 입을 여는데 부엉이도 울지않는 조용한 한밤에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형님...거기있소?"


힘겹게 내뱃는 저음에 경수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리의 방향을 급히 찾는데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검은 옷가지가 보였다. 지체없이 활짝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가자,


쪽마루에 아우가 쓰러지듯 앉아있는게 아닌가.


"종인아!"


숨이 넘어갈듯 불안정하고 검은 옷의 옆구리가 축축했다. 경수의 손에 아우의 피가 묻었다. 이럴때가아니다 싶어 주위를 휘휘둘러보고 누가 볼세라 얼른 부축해서 방안으로 들여다 놓았다. 들어자마자 가면부터 벗겼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찰싹 붙어 정말로 아파보였다. 그런데도 경수 저를 힐끔보고 웃는 못난 놈.


이리가면이 괜히 이리가면이 아니다. 이리의 두상을 한 가면을 쓰고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부도덕하게 이익을 챙긴 대감들의 재물을 약탈해 거지와 평민들에게 나누어준다하여 이리가면이라 불린다. 말이 좋아 정의로운 약탈자지 이건 사람이 할 일이 못된다. 해를 입을까 가족들에게 얼굴 한번 비치지도 못하고 따뜻한 밥은 먹지 못한채 관인에게 들키지않으려 어딘가에서 숨어 지내야 하는 신세라니. 게다가 이렇게 다치기라도 하면 제대로 찾아갈 의원도 없다. 하여, 매번 다칠 때마다 찾아오는 덕에 의료에는 마음이 없던 경수가 이젠 꽤나 능숙하게 응급처지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까까지는 땀을 뻘뻘 흘리더니 치료를 받고 비단침상에 눕고나니 좀 편안해졌는지 숨이 고르게 돌아왔다. 그런 아우를 물끄러미 내려보다못해 초롱불로 고개를 돌렸다.


"형님, 잘 지냈소?"


갈라지는 목소리로 종인이 물었다.


"..잘 지냈다."


"근데 어째 얼굴이 그러오. 오랜만에 동생이 왔는데 반겨주지도 않으시고..얼굴도 안뵈주시네."


"너는! 너는 어머님께서 얼마나 네 걱정을 하시는지 아느냐? 어째서 연통 한번 넣지를 않고 보름이 넘게 잠적을 할수가 있는게야? 양반집 자제라면 넌 싫어도 선비다. 선비의 도가 무엇이냐. 부모에게 예를 다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날 뛰고 다니는게야!"


"....형님. 물한바가지 있소?"


혀로 입술을 축이는 아우를 본 경수는 몰아치던 화를 누르려 일단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보니 깊은 상처를 치료하고 너무 화가나서 물 한모금도 주지 못했다. 경수는 일어나 밖의 우물에서 박에 다가 직접 물 한바가지를 떠왔다. 상체를 안아 일으키는데 오만상을 찡그리길래 '꼬시다, 이놈아' 라고 면박을 줘도 종인은 피식 웃기만 했다.


"천천히 마셔라. 좀 차가울게야."


꿀떡꿀떡 박의 물을 깨끗히 들이킨 종인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자리에 다시 눕히고 옆에 앉아있는데 문 밖에서 도련님 하고 누가부른다. 문을 열어보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몸종이 문 밖에 눌은밥과 반찬 몇 개를 놓고 갔다.


"눈치도 빠르네, 배고팠는데. 배에 구멍 뚫렸어도 밥은 먹어야지."


남의 속도 모르고 농담조로 말하는 아우를 째렸다.


"형님. 그거 알아? 처음 형님을 봤을때 그런 눈을 해서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나는 제대로 본 것이였다. 네 간이 소갈딱지만해서 그런거지."


경수가 다시 종인을 부축해 일으켜 앉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자기 몸 부숴가며 이 고생을 사서 하는게야, 이 놈아 하고 역정을 내고 싶은데 아기새처럼 밥을 받아먹는 아우를 보고있으니 마음이 심란했다.


"아, 그 연분홍 도포 말이오. 정말 잘어울리더이다."


"연분홍? 너 혹시 네 본가로 가는 날 봤었던게냐?"


"형님 얼굴이 보고싶어서 숨어서 봤지."


"그럼 아는 척을 했어야지, 이 놈아."


구박에도 종인이 말없이 피식웃고 만다. 눌은밥을 한입 받아먹더니 그제서야 하는 말이,


"거 옆에 핀 진달래보다 형님이 더 곱더이다."


"......"


"아플때는 형님이 보고싶은 걸 어쩌오. 이렇게라도 와야지, 안그러오?"









2.


권씨의 책방에 장물애비 이씨가 방문했다. 그는 여러 장물애비 중에서도 그림과 책을 전문으로 매매하여 거래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데 화가 변상벽의 진품을 하나 장만했다고 자랑을 하러 일부러 걸음 했다. 직접 그림까지 들고 방문 할 정도여서 무슨 그림인가 궁금했지만 권씨 자신은 그림에 문외한이라 보여준 그림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알지 알지못했다. 책방주인이 그림보는 눈이 없다는 것 쯤은 이씨도 익히 알고 있었다. 본 목적은 도도령이였다. 권씨의 소개로 알게 된 도도령은 본인 스스로가 그림을 그릴 뿐만아니라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수준도 뛰어나 이씨를 놀라게 하기도 즐겁게 만들기도 했고 딱히 큰 범죄와 연유된 그림이 아니라면 구입도 하는, 이씨에게는 둘도 없는 손님이었다.


"자, 이거보십시오. 도나으리."


이씨가 펼친 그림은 장안에 정평이 자자한, 일명 변고양이라고 불리는 변상벽의 '모계영자도'였다. 비단에 수묵으로 그린 그림으로, 먹이를 문 어미닭과 모여든 병아리 그리고 그 위로 괴석과 찔레꽃이 있는 완벽한 구성의 명품을 실제로 보는 것만 해도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도도령의 눈이 섬세한 그림에 꽂혀 평화롭운 미소를 띄웠다.


"참으로 따뜻한 그림이외다."


"이 어미닭을 그린 붓놀림하며 이거보십시오. 병아리들의 세밀한 표현하며 기가막힙니다."


"맞소. 그렇소. 소박하고 장대하지 않아 여인네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이오."


"...어째 반응이 시원 찮습니다, 나으리."


"아. 그것이. 둘도 없는 작품이긴 하나, 나 같은 사람은 가질 그림이 아니오."


그게 그럴것이 '모계영자도'와 같은 그림은 친정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아들딸낳고 행복하게 살으라고 쥐어줄 만한 그림이니, 아무리 날고 뛰는 변상벽의 그림인들 구입할 의도가 생기지 않음이 뻔했다.  이씨의 심중을 단번에 파악한 도도령이 단칼에 구입의사가 없음을 밝히니 그는 이만 접어야 한다는 걸 알고 그림을 거두어 긴 화통에 집어넣었다.


"혹시나 해서 왔더니 헛걸음 했나봅니다, 그려."


조심스럽게 비단을 넣는 장물애비의 손을 무심결에 보던 도도령의 눈길이 화통 안의 작은 종이에 걸렸다.


"그건 무엇이오?"


"이거 말이 십니까? 이게 작긴 한데...."


그가 꺼내보인 손만한 크기의 종이를 도도령은 받아들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큰 눈의 흰자가 다 들어나 눈이 빠질 정도로 놀라 입이 다 벌어졌다.


"이 그림, 내가 사겠소."









술상은 단촐했다. 감자전 몇점과 포를 뜬 생선구이 정도에 막걸리를 술상에 놓고 변백현대장과 오세훈사또가 초저녁부터 마주 앉았다. 둘은 관직에 오르기 전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서로 다른 지역에 근무 하다보니 소원했었는데 변대장에 오사또 관할지역으로 단기부임을 하는 바람에 이렇게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좋은 술 많은데 하필 막걸리일게 뭐냐."


생선구이를 집어 먹으며 오사또가 투덜거렸다.


"좋은 일이 생겨야 좋은 술을 마시지, 이사람아. 다 잡은 호랑이를 놓쳤으니 이 정도의 술상도 나에게는 감지덕지야."


콸콸 쏟아넣은 막걸리를 시원하게 넘긴 변대장은 심기가 불편한 낮빛이 었다. 자신이 이 곳으로 부임을 한 목적인 이리가면을 눈 앞에서 놓쳤으니 술을 마시지 않고는 못배기겠는데 거하게 차려먹을 체면이 안서 어쩔수없이 조촐할수밖에 없었다. 얼른 잡아서 관아의 옥에 처넣어야 답답한 가슴이 시원하게 뚫릴 것 같았다.


"이리가면이 사람잡는구만."


태평하게 웃는 오사또를 보는 변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보시게. 지금 웃음이 나오나? 그 놈을 잡으려고 내가 뿌린 사람이 얼만데! 거처를 알아내려고 한달 전부터 거지들을 매수한 것도 모자라서 혹시나 도적질한 물건을 어디 내놓을까해서 장물애비들도 매수했네. 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어. 그 놈의 얼굴을 봤다는 이도 없어!! 보통 머리가 좋은 놈이 아니야. 대체 그 많은 재물을 다 어디로 빼돌린 건지, 원!"


"돈있는 대감집들만 털어대니 민심이 도울수밖에. 내 맘을 알아주는데 그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는게 사람 마음이지."


"오사또!"


변대장이 쾅!하고 술상을 내리쳤다. 오사또는 그런 벗에게 진정하라며 빈 술잔에 멀건 막걸리를 가득 부어주었다.


"이보게, 친구. 자네는 알지않는가. 왜 이 마을에 이리가면이 나타났는지 말일세. 정세가 급박하게 변하고 긴장하는 벼슬아치들 탓에 서민들이 바쳐야하는 조공이 배로 늘었네. 없는 살림이 더 없어지게 되어 도적들은 늘어가고 빈익빈부익부는 심화되어가고있어. 내 말은, 그를 잡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말일세. 나도 관직에 몸담는 사람이라 어쩔수없이 잡으려하는 거지, 내가 만약 길에서 동냥이나 하는 거지였다면 아마 그를 잡으려는 자네를 미워했을게야."


"그렇다고 도적질이 정당화 될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금상의 명을 받고 온 몸이네. 내 주인의 명은 바로 나의 의지야. 그를 반드시 포획할것이네. 그를 필두로 이 마을의 썪은 관리구조를 청명화 시키겠어!"


다시한번 술잔을 깨끗히 비운 변대장이 이를 꽉 깨물었다.









인쇄기술을 임금이 독점하고 도서편찬을 나라에서 관리하는 방침 덕에 책을 하나 사면서도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하는게 현실이었다. 심지어 이 땅의 남자라면 꼭 알아둬야 하는 대학과 중용과 같은 얇고 작은 책도 논 세마지기에서 네마마지기 정도의 높은 가격에 팔린다. 이러니 서민들은 살아생전 구경도 못한다. 책이란 건 하나의 권력이며 권위의 상징이다. 그러니 소위 양반이라는 권력계층들은 서민들이 글을 깨우치는 것에 민감할수 밖에 없다. 자꾸 숨기고 감싸도니 세상의 이치를 알지 못하는 평민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왜 사는지도 모른채 목숨이 붙어있으니 먹고 싼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뜻하는 바가 다를게 없다. 도도령도 그에 격하게 동의 하는 선비중 하나였다. 알기에 없는게 무엇인지 안다. 깨우쳐 아니까 집에서 한 발만 나가도 만나는 거지에게 동정하게 된다. 이런 도도령의 마음을 백분 이해하는 게 김종인 아우였다.
천성이 바르고 명명한 아우는 청렴결백한 나라에서 살고싶어한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모여 만든 나라라는 거대한 조직은 그렇지 못할때가 더 많다. 더러움을 보고 젊은 혈기에 미치지 못해 몸을 혹사하는 아우의 행동은 결국 도도령의 마음의 심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에 사는가. 이 나라 조선 아닌가. 관직의 나라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그 중심을 뚫고 앉아 주어진 벼슬을 이용해야 한다. 그래서 그토록 과거를 치르라고 귀에 딱지가 생기게 말을 해도 아우는 귀신 싸나락 까먹는 소리로만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린다.


다행이도 몇일 전 본가로 아우가 돌아왔다는 전갈을 수만이에게서 받았다. 대감과 어머님께 호되게 꾸짖음을 듣고 집안에서 자중하고 있다했다. 아마도 위험한 고비는 넘기고 본가에 잠깐 돌아간 것일게지 싶었다. 괴씸한 것 같으니라고. 그러면서 수만이에게 연통하나 보내지 않다니. 커다랗게 한숨을 쉬고 눈 앞의 손바닥만한 그림을 보던 경수가 흰종이와 붓을 꺼내들었다.


'아우 보거라.
네가 본가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다.
몸조리 잘하거라.'


짧게 편지를 쓰고 그림을 동봉하여 몸종에게 전해달라 부탁했다.









형님의 몸종이 연통을 보냈다며 수만이가 방으로 찾아왔다. 곱게 접혀진 연통을 손에 들고 방문을 닫았다. 벌써부터 종인의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오른다. 자리에 앉아 헛기침을 한번하고 펴보니 편지와 그림이 하나 들어있었다. 형님다운 짧은 내용을 읽고나서 이번엔 그림을 보았는데 그림도 그림이거니와 왼편에 쓰여진 내용에 종인은 호탕하게 웃었다. 게 두마리가 갈대꽃을 꼭 붙들고 있는 단원 김홍도의 해탐노화도. 갈대꽃(로)은 려(고기)와 발음이 같아 과거에 붙으면 임금이 주시는 상 인, 고기를 갈대꽃으로 표현하고, 게딱지를 한문으로 하면 '갑'이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중 갑은 첫번째에 위치하니, 형님이 하고싶은 말씀을 예측하건데, 과거를 봐서 소과(작은게)와 대과(큰게)에 모두 장원급제 하거라 이 말 아닌가.


시험을 치루는 사람도 아닌 종인 저에게 이 그림을 주는 이유는 딱 하나다.
귀에 물집이 생기도록 들은 그 말. 시험을 치루어라. 그 말을 또 해봐야 듣지 않을테고 자신도 입이 아프니 이젠 그림으로 회유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게 뭔가. 그림에 쓰여진 '해룡왕처야횡행'. '바다 속 용왕님 계신 곳에서도 나는 야 옆으로 걷는다.' 라니. 장원급제 해서 관직에 오르더라도 뜻을 버리지말고 소신있게 살으라는 말 아닌가. 어디서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구하셨는지 몰라도 참으로 멋진 그림으로 격조있게 설득하는 모양새에서 어찌나 형님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지, 종인은 기가차서 고개를 저었다.


"형님. 저는 형님 때문에 못살겠습니다."









평소 경수는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밤달이 밝다. 구름사이에서 보일랑 말랑 하는데도 훤하게 밝혀주니 잠이 올리가 없다. 간단한 술상을 앞에 두고 자작하는데 혼자서 하는 술이 맛이 좋을리가 있나. 한숨을 쉬고 한잔하고 나니 술맛이 다 떨어졌다.


"그렇게 한숨을 쉬니 술맛이 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어디서 온지도 모를 종인이 열어놓은 창문을 잡고 불쑥 방안으로 들어왔다. 깜짝놀란 경수가 얼어 가만히 있으니 앞에 털썩 앉은 종인이 경수의 손에서 잔을 거두어 술을 들이켰다.


"캬~! 좋다!"


"너 어디서 들어온게냐?"


"담넘어들어왔지."


"도포차림으로 담을 넘다니 제정신이냐?"


"뭐 어떻소. 아무도 안보는 밤인데."


젓가락을 집어 전을 입에 넣은 종인이 경수를 보고 웃었다.


"몸은 좀 괜찮은게냐?"


"많이 좋아졌지. 형님 덕에. 형님은 의원을 해야하지 싶소."


"농말거라. 다 너때문에 생긴 잔기술이야. 내 연통은 본게냐?"


"봤으니 왔잖소." 라며 쓰고 있던 갓을 바닥에 내려놓은 종인은 이제 버선도 벗어 발이 드러났다.


답답한 걸 싫어하는 아우는 편한 경수 저의 앞에서만 이런 꼴이 되곤했다.



"그래. 생각은 해보았느냐?"


"조건이 있소, 형님."


"뭔지 말해봐."


"형님도 과거를 보시오. 나는 형님이 동반 하는 과거시험장이 아니면 발도 딪지 않을 생각이오."


"....종인아."


"형님. 형님은 내가 얼마나 관료들을 경멸하는지 알지? 노론, 소론? 그런 똥돼지들 사이에서 살려면 꽃하나는 쥐어줘야하겠다 하는 마음은 안드오? 내가 만약에 장원급제 하면,"


"아니. 너 정도의 학식이면 반드시 소과 대과 모두 장원급제 할수있다."


"내말들으시오, 형님. 그러니까 내가 형님 말을 듣고 시험을 봐서 급제하면 더이상 가면은 쓰지 못할테니 그건 형님이 원하는 나 아니오. 하라는대로 시키는대로 다 할테니,"


종인은 말을 멈추고 연속해서 술 세잔을 더 들이킨후, 취기가 흥건한 입술을 연다.


"내 옆에 있으라 말하지 않소."


도가네 경수도령이 아직도 과거를 보지 않은 연유는 배움이 부족해서도 출세가 싫어서도 아니다. 과거를 보지 않으면 집안이 아무리 좋아도 경수와 혼인을 맺고 싶어하는 벼슬아치 집안이 없기 때문이다. 양반가 처자들이 경수 때문에 몸이 달아도 부모님이 거부하면 성사되기 힘든 일. 혼인이라는 건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니 가능한 도피다. 경수가 혼인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는 제 몸을 돌보지 않는 아우 때문이고, 아우는. 아우는....


"내 옆에 있기 싫으면 나도 어쩔수없고."


승부를 띄운 종인의 진지한 말투와 시선을 피하며 경수는 불안한 숨만 내쉬었다.


"......"


"그렇게 계속 아무말도 안할거요?"


"......"


"그래, 어디 닭이 울때까지 취해봅시다, 형님."






fin




무제 7.







요즘 차가웠던 밤바람사이에도 온기가 돌았다. 지옥 같던 가을 겨울이 가고 드디어 봄다운 봄을 맞이한 기분이 들었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서 살며 체감온도는 항상 영도. 아무리 강단 있고 체력 좋은 저 일지라도 가끔 햇볕이 그리워지고는 했다. 몸 안에 뿌리내려 일 년 내내 앙상한 가지를 흔들어 서늘한 바람을 내보내는 추위는 근본부터 해결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렇다고 네온사인과 어둠을 햇빛을 낮 삼아 사는데 한줄기 빛이 어디에 있을까 섣불리 판단한다면 큰 오산이다.


"SMP엔터 유 사장 연결 해봐."


가라앉은 목소리에 운전을 하던 백현이 기합이 들어 네하고는 귀에 꽂은 핸즈프리의 버튼을 눌렀다. 그와의 직통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인 종인의 전화는 날고 긴다는 유사장도 거부 할 수 없었나본지 통화 연결음 두 번 만에 본인이 받았다. 그의 목소리가 차 안의 스피커를 통해 흘렀다.


#네. 김이사님. 안녕하셨습니까.#


"준면형님 이번 년도 스케줄 부탁드립니다."


#아,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이 있어서 검토하고 직원 시켜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건 그럼 됐고. 찌라시 돌던데 미국 쪽에서 영화투자 건 있습니까."


#세개 정도 영화를 봐둔 게 있는데 세 개 다 영향력 있는 회사라서 경쟁이 치열합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저희 계열 영화사에 관심을 가져주시면 좀 더 안전한 투자를 약속 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합니다만...#


안전? 꼴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똥 싸고 뒤 닦을 정도로 돈이 남아돌아도 SMP엔터가 만드는 영화나 드라마에는 투자할 생각이 없었다. 가져오는 시나리오도 연기자도 뭐하나 눈에 들어오는 게 없다. 차라리 돈세탁을 해서 외국 영화사에 투자해 장기적으로 두 세배 돌려 받는 게 났다. 헐리우드 인디영화사에 돈을 쥐어줘도 SMP에 맞기는 거 보단 안심될 거다. 제대로나 만들고 돈 내라고 설득하라며 칼을 들이대고 싶었지만 눈을 한번 꾹 감고 화제를 돌린다.


"거기 투자할 기업 많지 않습니까. 우리 같이 더러운 돈 끌어 쓴다고 소문나면 유사장님만 힘들어지십니다. 준면형님이나 잘 부탁합니다."


#아, 네. 이사님. 그럼요. 제가 잘 관리 해드리겠습니다.#


"끊어."


백현이 다시 한 번 버튼을 누르자 차 안이 조용해졌다. 뭔지 모를 살벌함에 잔망이 발동했다.


"형님. 저기보세요. 준면형님 광고 새로 찍으셨나 봐요. 아이고~! 혼자서 개존잘이시네~! 진짜 잘 생겼다!"


신호등에 가로막혀 세운 차 안 운전자의 고개는 고층빌딩 위의 전광판을 가리키고 있었다. 화장품 광고모델로 발탁이 되었는지 환하게 웃는 커다란 얼굴이 약간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연예인 김준면에게 한눈에 꽂힌 친누나가 죽고 못 살 길래 뒤로 힘써서 결혼시켜줬더니 3년이 넘은 지금 이혼이내 뭐내 가쉽에서 말이 많았다. 뒤로야 어디 조직 손녀랑 결혼했다고 소문이 날대로 나서 파파라치들이 붙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이혼이 될 거 같으면 붙여주지도 않았다.


계속 연예인질 해서 살고 싶으면 친누나 꽉 붙잡으라고 했더니 사람 천성이 너무 발라서 그러겠다했다. 꽤나 부당한 선택임에도 망설임 없는 걸 보면 연기에 대한 열정이 나름 있는 것도 같고.


"백현아. 흥이 한테서 연락 없냐?"


"아직이요. 알아서 잘 하시나봐요."



한 달 전 전화에서 대만 신생조직이 엘리트들을 내세워 몇 번 찔러 온다고 예흥이 흘리듯 말했는데 말이 몇 번 찌른다고 하는 거지, 알고 보니 회사에서 수입하는 제품을 해적질로 빼돌리거나 커넥팅 된 중소기업을 매수하고 있었고 마카오에 있는 양귀비농장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했다. 손실 구모로 따지면 어림잡아 300억이 넘는데, 농장을 테러 당한 게 손실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다 형님 에게 손모가지 잘리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 형님. 김종대 선생님께서 전화하셨어요."


백현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백미러로 눈치를 보던 그는 수트자켓 안에서 담배케이스를 꺼내 한 개피를 물고 있는 형님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갯수로 오늘만 저게 벌써 두 갑째였다.


"왜."


담배연기를 뿜으며 종인이 물었다. 기세 좋게 쭈욱 뻣어 나간 연기가 끝에는 흩어졌다.


"제어가 힘드시다 고 한번 와달라고 하셨어요."


"....주말에 간다고 해."


"선생님께서 주말까지는 힘드실 거 같다고..자...해가 심하시다 고 하시더라구요."


"언제 시간 비지?"


"모레 점심쯤이나 되 야 될 거 같은데요."


"그래."





*****





오후12시에 일어나 1시에서 2시 정도에 아침을 먹는 이들이 말하는 점심은 초저녁 4시에서 6시 사이다. 원래 왠만 한 병원의 면회시간은 4시 이후로는 금지 되어있지만 경수가 입원 되어있는 곳은, 예를 들면 실버타운처럼 정신이상환자들의 모든 생활을 케어 하는 요양원이여서 아주 늦은 시간이 아니라면 개인면회가 가능했다.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고 입원시켰다. 요즘처럼 사고로 막대한 적자가 날 때는 주위가 흉흉해서 경수를 위해서라도 격리 시키는 게 났다.


종인이 경수를 처음 본 건 형님 아버님이 입원하셨던 캐나다의 병원의 정신병동에서였다. 부모가 일찍 죽고 본의 아니게 해외입양을 가게 된 곳에서 버림받았다는 말만 간호사에게 주워들었었다. 그러나 훔쳐 본 경수는 전혀 불우한 과거를 지닐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웃는 얼굴이 누구보다 예쁜 사람을 그 누가 싫어할까. 종인도 원했다. 어차피 소속이 없다면 내가 소유하겠다고 국적을 바꾸고 호적에 넣어 경수를 한국으로 대리고 왔다. 그 전에 담당의에게 충분한 경고는 들었다.


'지금까지의 치료경과를 말하자면, 도경수씨는 일찍부터 주변인들이 다수 죽는 상황으로 인해 불안정한 '인간상황'이 설계된 거죠. 부모님은 다섯 살 때 돌아가셨고 그를 봐주시던 한인수녀님도 암으로 돌아가시고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죽을 거라 했어요. 게다가 유아기 때 받아야 했던 애정을 타인에게서 느끼지 못하고 상당한 결핍이 보입니다. 그게 카섹시스장애로 나타나고 있어요. 쉽게 말하면 집착의 윗 단계라 할 수 있죠. 어떤 대상에 보기 힘들 정도로 파고드는 겁니다. 그동안 심리적 치료가 주를 이루었었는데 문제는 그 대상이 나타났을 경우입니다. 대상에게서 받는 감정전이가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면 자해도 감행할겁니다. 일단 이 정도가 그의 현재상태입니다. 그에 대한 모든 치료기록과 차트는 여기 있습니다.'


세 개의 누런 서류봉투가 쌓여 두꺼운 책 한권의 두께를 만들어 낸 종이더미를 들고 둘은 캐나다를 떴다. 그게 6개월 전. 전문의의 견해가 어떻든 그를 자신의 집에 두기로 결정했다. 호적까지 바꾸고 한국으로 대려 왔는데 병원에 계속 둘 생각이었다면 애초부터 마음을 접었겠지. 애관 견은 남에게 오래 맏기는 게 아니다. 그러다 주인을 못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낭패니까.


"그래서 격리시키신 겁니까?"


김종대전문의의 오피스에 들어가기 전 복도에서 마주친 둘은 경수의 이야기를 하며 격리병동으로 걸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경을 고쳐 썼다.


"들으셨겠지만 자해 행동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격리방문 앞에 멈춘 그는 뒤따라오던 남자간호사 둘에게 포박을 풀라 지시했다. 문의 작은 유리창으로 본 경수는 손과 발이 교차되어 강박 끈으로 묶여있고 재갈도 물려있었다. 눈이 뻘게져 남자간호사들이 포박을 풀려는 움직임에 크게 동요했다. 그러다 문 안으로 종인이 들어오는 걸 보고 표정이 싹 바뀐다. 입에 물린 재갈을 풀기 전에 손발이 먼저 풀리자마자 뛰어들었다. 물린 재갈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끅끅거리며 서럽게 울어댔다.


"잠시 대려가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게 빨리 안정되는 길입니다."


김종대전문의의 지시에 간호사들이 외출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방의 주인은 종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떨어질 줄 몰랐다. 자나 깨나 보고 싶어 하던 사람의 손에 깍지를 끼고 나온 경수는 병원 문 밖에 서 있는 백현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어지간히 맘에 들지 않는지 차 문을 열어주며 하는 인사를 받지 않고 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백현도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종인이 뒷좌석에 올라타자마자 차는 요양원을 빠져나왔다.


"종인아. 집에 가자."


큰 눈알이 빠질 것 같이 울고 남은 눈물을 수트에 비벼왔다. 이 경우 딱히 대답은 필요 없다. 뭐든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된다. 백현은 눈치껏 집 쪽으로 차를 돌렸다.







집 안에 들어서기 전부터 종인은 전화 삼매경이었다. 불을 켤 손이 없어 스위치를 올리지 못하고 소파에 털썩 앉는다. 원래가 저녁부터 시작되는 게 이 바닥 일인데 집으로 다시 돌아왔으니 전화로 모든 지시를 하느라, 좀처럼 손에서 폰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담배를 물고 심각하게 대화하고 있는데 경수가 옆에 와서는 수트자켓을 벗겨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카오 건을 교훈으로 삼아야죠.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네. 저도 대만으로 갈 예정입니다. 크리스형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상황보고는 다녀와서...하겠습니다."


귓바퀴를 자근자근 씹다가 귓볼을 쪽 빠는 혀가 움직이는 소리에 끙 하고 나오는 신음소리를 삼켰다. 앙증맞은 손으로 담배를 뺏어가더니 드레스셔츠 단추를 풀어내고 다른 손에 들려있던 폰도 뺐어간다. 끈적한 시선사이에도 미소가 해맑아 도저히 얼굴에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이 미소에 반했다. 병원 복을 입었어도 초췌 해보이지 않고 얼굴에서 빛이 났었다. 맞아, 처음에는 그랬다. 시선을 느끼고 쳐다보는 두 눈에 경계가 가득했다. 종인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볼 때만 잘 웃었더랬다. 그런데 한국으로 대려온 후, 어느 날 빤히 쳐다보더니 그 뒤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몸을 부딪혀오고 안아 달라하고 키스하고 얼굴만 마주치면 스킨쉽 해오며 웃었다. 전문의가 말하길, 보호자라 인식하고 애정을 확인하려는 행동이라 했다. 뭐든 좋았다. 도경수는 어느 누구도 아닌 김종인 만 보면 된다. 


"뽀뽀해줘. 바지도 벗겨줘, 빨리~"


분명 숙달된 애교가 아님이 분명한 콧소리인데도 귀엽다. 눈앞의 탱탱한 윗입술을 쪽 빨았다. 한번 그러고 나서 고개를 뒤로 빼려하자 목에 두 팔을 깊이 감고 몸을 붙여왔다. 경수의 입술이 벌어져 나온 분홍 혀가 담배향기 묻은 입술을 핥는다. 이 작은 몸짓은 사랑을 바라는 구걸이다.


"보고, 싶었어, 진짜."


키스 사이사이 잠깐 입술이 떨어질 때 경수가 속삭였다. 벗겨낸 바지를 거실바닥에 던진 종인은 타인의 살이 주는 부드러움에 이리저리 손가락을 놀린다.


"나, 이제 거기 들여보내지마, 응?"


양손으로 종인의 얼굴을 감싸고 애원하는 눈이 장화신은 고양이에 나온 그것이다. 더하면 더 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뭘 원하든 다 들어 줄 수 있어도 이것만큼은 안 된다. 직업이 직업이다. 내 편보다 원수가 더 많고 힘들 때 알아주는 사람 없으며 배신과 음모가 일상이다. 공갈 협박하려면 주변인을 잡아야 한다는 암묵적 룰이 있는 조직사회에 몸담은 저로써는 도저히 긍정적인 대답이 힘들다. 혹시라도 있을 유괴나 살인을 당하기 전에 숨겨두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한시가 멀다하고 급변하는 직업을 가진 남자의 최선이다. 종인은 대답하지 않고 경수의 긴팔셔츠를 벗겨냈다. 그때, 테이블에 올려 둔 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려 손을 가져가는데 그걸 잡아 자기 허리에 둘러 감아버린다. 맨살을 만져달라는 애원을 물리 칠 수 없어 허리와 엉덩이를 지분가리는 사이, 부르르 떨어 소리 내어 울던 폰은 멋대로 꺼졌다. 어두운 거실 안 유리벽 밖 야경에서 스며든 불빛이 어른거리고 달아오른 숨과 작은 신음소리가 교차되어 정적을 가른다. 아까부터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입술은 마찰로 부풀어 올라 보이지 않아도 딸기와 같은 색이 입혀졌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온 몸에 새겨둔 빨간 키스마크가 다 없어 졌을 거 같았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이니까. 종인은 쇄골과 목 그리고, 가슴 곳곳에 이를 세웠다.


침대가자. 경수가 말했다. 그 말에 솔깃해 그대로 허리를 감싸 안고 안아 올리자 만족한 듯 웃는다. 솟아오른 광대를 쪽 빨아주었다. 침대에 올라 앞섶이 벌어져있던 드레스셔츠를 벗어던질 때, 바지의 버튼은 경수의 손가락이 풀어냈다. 열린 지퍼 사이로 아직 덜 익은 페니스를 속옷 안에서 꺼내 키스한다. 평소 같으면 느긋하게 지분거릴 일인데 몸이 달았나본지 벌써 물어버렸다. 입 안에 담고 혀를 놀려 자극을 준다. 그렇다고 절대 능숙한 펠라가 아니다. 무릎을 꿇고 자신의 중심을 열심히 애무하는 남자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고 눈을 감았다. 다행이도 좀 전의 심각했던 전화내용이 하나둘씩 머릿속에서 지워져 나간다.


"..종인아, 내꺼도 만져줘.."


연두색복서브리프 안으로 손을 잡아 가져대는 행동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왜  웃냐고 웃지 말라고 진지하게 말하고 토라진 눈 때문에 다시 입가에 웃음이 걸리는 걸 종인도 어쩔 수 없었다. 만져달라고. 빨리. 수줍게 말하고 고개를 숙인 모습에 또 한 번 끙 하고 신음을 삼킨다.


"아...아, 흐..응.."


노래 부르는 목소리가 좋으면 신음소리도 듣기 좋다는 걸 경수를 통해 알았다. 노래선율처럼 흐르는 게 딱 배하나 띄워놓고 그 위에서 술 마시며 듣는 노래 가락 같았다. 소리에 취해 주는 자극을 받았더니 종인도 점점 달아오른다. 경수가 본격적으로 빨아대기 전에 몸을 뒤로 물렸다.  속옷부터 벗겨내고 뒤를 보게 한 다음 쪼그려 눕혔다. 적나라하게 보인 구멍 위에 손가락을 대고 문지르니까 꽉 조여 있던 괄약근이 점차 풀어지기 시작했다. 오일을 묻힌 손가락 여러 개를 쑤셔 넣고, 넣었다 뺐다 반복하니 작은 등 너머 침대시트에 막혀있던 입에서 달달한 신음이 흘렀다.
그게 새소리 같아서 만족할 만큼 듣다가 빳빳이 선 페니스를 찔러 넣는다.


"아앗! 아!"


연결된 채로 느리게 앞으로 몸을 숙여 작은 등을 감싸 안았다. 페니스 뿌리 끝까지 모두 들어가고 나니 소년 같은 몸을 덜덜 떤다. 힘 빼고 숨 쉬어야지. 귀에 대고 말해주자 꼬물거리던 손가락이 길 다란 손가락을 잡아왔다. 허리를 움직였다. 그랬더니 힘을 꽉 준다. 안되겠다 싶어 귀와 목, 뒷덜미의 산란한 점 위로 혀끝을 가져대고서 그대로 등줄기를 날름 거렸다. 그제 서야 길게 숨을 빼온다. 덕분에 박고 나서 미동도 못했던 그곳을 조금씩 움직였다. 아픔에 몸이 굳기 전에 내벽의 성감대를 찾아내야 해서 종인은 바쁘게 허리를 놀렸다. 체위 자체가 찾아내기 쉬울 자세였을 뿐만 아니라 종인의 손가락이 구멍과 음낭 사이를 마사지 하듯 눌러주니 경수의 페니스가 벌떡이면서 야한 신음과 함께 말간 액을 찔끔찔끔 내민다. 고양이처럼 그릉 하고 목을 울리는 게 정말 펫 같았다.


동작이 빠르다고 다 기분 좋은 건 아니다. 느리기 때문에 오는 은근하고 깊은 쾌감. 뱃속을 간지럽히고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결코 여유롭지 않아도 애 닳는 움직임. 이것들이 한꺼번에 닥쳐오는 기분은 아는 사람은 안다. 더 달라고 끙끙 이며 혀와 입술로 쥐고 있는 손가락을 빠는 경수가 귀여우면서도 야해보였다. 솟아오르는 정복욕에 안에 담겨있는 종인의 것이 커질 대로 커졌다.


"사,랑해, 종,인아...“


누가 저에게 사랑을 말한 적이 있던가. 부모에게서 내처지고 길을 떠돌아 엉망진창이 됐을 때 받아준 형님도 아낀다했지 사랑을 말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다. 립스틱을 바른 빨간 입술이 사랑을 말하는 게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인스턴트적인 아름다움이 뭐라고 떠들어봐야 돈 위에 올려 진 장미일 뿐. 매혹과 유혹은 질릴 만큼 받았다. 종인이 필요한 건 절대적 사랑이다.


대체 둘 중 누가 정신장애란 말인가. 한 명은 지극히 감추고 평범한 사람으로 무장하고 살고 남은 한명은 정신병이라 명명 받으며 온몸으로 표현하고 산다. 감추면 정상이고 발현하면 비정상이다. 누군지 모를 사람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신물이 난다.


"사랑,해... 흐앗!"


그래. 더 말해, 더. 나 밖에 없다고 온몸으로 울라는 말이다. 종인이 허리를 쭈욱 뺐다가 단번에 쳐들어갔다. 격렬해진 움직임에 경수의 숨이 빨라졌다. 그리고 곧 사정했다.








눈을 떠보니 새벽4시. 몸에 엉킨 하얀 팔과 다리에 묶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짧게 피식 웃고는 침대 옆에 뒀던 담배 곽을 쥐었다. 속을 보니 한 개피 밖에 남지 않았다. 어제 채워져 있던 반갑은 섹스하면서 다 피워버렸다. 남은 담배를 입술사이에 끼우고 불을 붙였다. 한숨 쉬듯 길게 내뿜고 멍한 눈으로 방안을 둘러본다. 새벽이지만 요양원으로 전화를 해야 했다. 경수를 다시 입원시켜야 하니까. 종인 저는 내일 대만 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쌕쌕 잘 자는 경수를 슬쩍 내려 보았다. 많이 피곤했었는지 통통한 입술이 벌어져있다. 그러고 보니 끝없이 매달려 다섯 번은 했었다. 그 와중에 몇 번을 쌌더라.... 양도 많았던 걸 보니 그동안 딸도 안쳤던 모양이었다.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났다. 담배를 쥔 손가락을 입 안에 슬쩍 넣었다. 어제 저의 페니스를 소중하게 빨던 혀와 가지런한 이가 작고 예뻤다.
어찌어찌 경수를 때어놓고 침대에서 나와 거실에 있던 폰을 들었다. 네. 형님. 하고 전화를 받은 백현의 뒤에서 퍽퍽 하는 타격 음이 들렸다.


"무슨 일이야."

#아, 안 그래도 전화 드리려고 했습니다. 형님. 세훈이가 플라맹고에서 일하는 여자애들 몇 명 빼돌려서 손 보고 있어요. 손등에 빵꾸 몇 개 내도 이 새끼가 자꾸 형님이랑 얘기하겠다고만 하고 입을 안 열어요.#


"지금 간다. 말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만들어놔."


#네. 형님.#


전화를 끊고 샤워를 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만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에서 트러블이 나면 확실히 신경 쓰인다. 그게 세훈이라 더 그랬다. 드레스 룸에서 수트를 입고 시계를 차는데 뒤에서 경수가 허리를 안아왔다.


"어디가."


"일하러.“


"가지마."


"잠깐 갔다 올 거야."


"거짓말. 나 또 병원 보낼 거면서. 봤잖아. 나 묶이기 싫어. 가기 싫어."


"착하게 있으면 아무도 어떻게 안 해."


"....착하게 있으면 언제 올지 모르잖아. 저번에도 금방 온다고 하고서는 한 달이나 안 오고."


입술에 피가 나도록 이로 물고 울음을 참는 경수의 말이 눈물과 섞였다. 그래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종인은 두 손으로 눈물만 닦아준다.


"금방 갈 거야."


가타부타 서론이 없어 더 믿지 못하겠는데, 그런데 사랑스러운 말. 금방 갈게. 금방 갈 거야. 백번은 넘게 속아본다.


"...진짜지."


"그래."


종인이 알몸의 경수에게 클로젯에 걸려있던 수트자켓을 꺼내 걸쳐주었다. 손을 잡고 드레스 룸에서 나와 침실로 대리고간다. 물 컵을 챙겨들고 침대 옆 작은 약통에서 알약 두 알을 꺼내들었다. 먹이기 전에  진하게 키스먼저 했다. 수트깃을 잡고 열정적으로 받아오는 입술을 억지로 때어내고 벌어진 입 안에 약을 넣었다.



"몇 일 있다 대리러 갈게."



짖은 두 눈을 주시하며 물 컵의 물과 약을 꿀떡 삼킨 경수가 종인의 목을 안아왔다.



"이번엔 약속 지켜."


"그래. 그럴게."


몇 십 분을 그렇게 있다, 사랑해. 귀에 속삭인 말을 끝으로 침대로 풀썩 쓰러졌다.


"좋은 꿈 꿔."


경수는 종인의 미소를 보지 못하고 쏟아지는 졸음에 눈을 감아버렸다.






fin



무제 4.







"도경수씨가 패쇠공포증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12일에 사내에서 도경수씨를 보셨나요?"


"외근 때문에 방을 나오다가 멀리에서 다른 사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봤습니다."


"그때 도경수씨에게서 다른 점은 못 느끼셨나요?"


"전 도경수 사원과는 평소에 접촉이 없는 편이여서 크게 달라졌다던가 하는 건 느낀 적이 없습니다. 저희 사원들과 말씀을 나눠보셨다고 하셨는데 그럼 아셨겠지만 도사원은 존재감이 없는 편이였죠. 딱히 일에서 성과를 나타내는 쪽도 아니라서 저도 그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네. 잘 알았습니다. 12일 밤은 어디에 계셨죠?"


"퇴사 후에 집에 있었습니다. 몇 일전부터 야근이 이어졌기 때문에 굉장히 피곤했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확인이 필요하다면 협력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네 그럼요. 협력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바쁘신데 실례 많았습니다. 김사장님."


소파에서 일어난 형사는 김종인 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급히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몇몇 사원의 이야기를 더 듣고 혹시라도 있을 단서를 잡기 위해서.


1월 12일. 도경수사원이 그의 생일 날 밤 사라졌다. 일주일 뒤, 도경수사원의 부모가 실종신고를 했고 신고가 접수 되고나서 몇 일만에 담당형사가 도사원이 일했던 회사로 방문 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도경수는 김종인 사장의 말대로 조용하고 일적인 면에서도 눈에 잘 띄지 않아, 회사이지메의 희생자가 아닐까 추측도 있었지만 자살한 흔적도 찾기 어려워 이렇다하게 수사에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도경수는 정말 바람처럼 사라졌다.





******





종인은 형사가 방에서 나가고 몇 시간동안 업무에 시달렸다. 더불어 낮에 형사가 와서 질문을 퍼붓는다고 뺏은 시간까지 더 일해야 했다. 그래서 다른 날보다 한 시간은 더 퇴근이 늦었다. 심지어 전날부터 철야근무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정도의 잔업이 싫은 건 아니었다. 더 애절하게 자신을 기다릴 강아지를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가 입가에 붙는 것이다.


자동차소리나 기타, 소음을 싫어하는 종인이 새로 건축한 2층짜리 건물. 현관의 비번을 누르고 집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답답하게 매어져있던 넥타이부터 풀었다. 그리고 드레스셔츠 단추도 몇 개 풀고 양말도 벗고. 여기에 차가운 맥주가 있으면 금상첨화겠지. 종인은 슈트자켓도 벗어 던지고 냉장고 안에서 맥주 캔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쾅! 쾅! 쾅!


쾅! 쾅! 쾅!


등 뒤에서 연속적으로 구타소리가 들린다. 길었던 하루, 한숨 좀 돌리려는데 그 몇 분을 못 참아하는 강아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쾅! 쾅! 쾅!


하루반나절을 굶겼는데 문짝을 때릴 힘은 어떻게 어디서 나오는지 지치지 않고 소음을 만들어낸다. 작게 한숨을 쉰 종인은 맥주 캔을 쥔 채, 일층 안 쪽의 방을 향해 걸었다. 걸음소리가 들리는지 문 두드리는 강도가 심해진다. 망설임 없이 벌컥 방문을 열어 재끼자, 재갈을 물고 각각의 양손이 천에 싸여 포박 되어있는 남자가 종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몸을 오들오들 떨며 숨이 불규칙한 걸 보니 정신적 압박이 심한 듯 했다. 패쇠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면이 막힌 방 안에 매일 매시간을 있기 힘들만도 하겠지, 감흥 없게 추측할 뿐이다. 그렇다고 쓸데없는 동정으로 방에서 내 보낼 생각은 전혀 없다. 화장실이나 냉장고가 아닌 걸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굿 이브닝, 도경수."


식은땀에 젖어있는 경수와는 비교도 못할 만큼 종인의 인사는 여유가 넘쳤다. 경수는 종인이 방을 나간 뒤로부터 아까까지 엄청난 공포와 싸우고 있던 몸이었다. 벽 네 면이 점점 좁아져서 날 덮치는 건 아닐까, 공기청정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방 안의 산소 율이 저조해서 숨 막혀 죽는 거 아닐까라는 극단적 상상에 30시간 넘게 시달렸다는 말이다. 타인의 심장소리를 귀로 직접 듣고 나니 이제서 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힘들었지? 이제 괜찮아."


입을 구속하고 있던 재갈을 종인이 풀어주었다. 경수의 턱이 덜덜 떨었다.


"ㅁ..무..울...모..목말ㄹ..요."


부정확한 발음으로 간신히 목소리를 낸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은 종인은 손에 감싸있던 천도 풀어주고 타이트하게 포박했던 팔목의 끈도 풀어주었다. 뼈가 드러나는 가느다란 팔목에 타투처럼 생긴 빨간 줄이 맘에 든다.


"내꺼 먼저 먹자."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TV에 눈길을 주고 소파에 편히 앉아있는 종인의 발 밑, 다리사이에 경수가 있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눈앞의 페니스를 손과 입으로 정성스럽게 핥고 주무르는 경수의 목표는 하나. 종인의 사정 액을 받아  먹는 것. 타들어가는 목마름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감금하는 동안 하루 종일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하다가 종인이 오면 물도 음식도 준다. 그 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걸로 목 좀 축이고 밥 먹자.' 그러기를 수십일. 이제는 당연시 되어버린 펠라. 파블로스의 개가 따로 없다. '아무것도 안하고 받아먹는 건 뻔뻔하잖아.' 감금된 첫날 첫 펠라에서 종인이 한 말이었다.


"아, 하...아..."


음낭을 입안에 담아 혀로 핥으며 빨아대니 종인의 입술사이에서 들뜬 한숨이 작게 흘렀다. TV로 가 있던 시선이 조금 풀려 다리사이로 내려온다. 자신의 것을 열심히 빨고 있는 경수의 모습은 언제 봐도 자극적이었다. 핑크색 혀가 날름거리며 기둥 대를 지그재그로 올라오는 걸 본 눈이 찌그러졌다. 동시에 페니스는 더 커지고 단단해졌다. 경수의 침이 흥건해, 전등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꼿꼿하게 서서 사정이 임박함을 알렸다. 그걸 알았는지 입 안에 한껏 담아 빠르게 위아래로 흡입하듯 빨아대자, 전신에 있던 흥분이 그곳으로 몰린다.


"하아!“


경수는 밖으로 뿜어 나오는 멀건 한 사정 액을 모두 먹겠다는 것처럼 페니스를 쪽쪽 빨아 당겼다. 칭찬할만한 구강흡입력으로 정액을 받아 꿀꺽 넘긴 투툼한 입술이 빨갛게 반짝인다. 숨을 돌리며 종인이 다시 미소 지었다.


"맛있어?"

"..네."


'아니요' 했다가 이틀 동안 전신포박 당 해 욕조에 누워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아니요는 금기다.


"또 줄까? 목마르다며."


"......"


말없는 경수의 눈이 빨갛게 충혈 되어 울 것만 같은 조짐을 보였다. 사실 종인은 왜 경수가 우는 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치욕? 종인은 지금 경수가 하고 있는 행위를 해본 적은 물론, 당해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하는 건 네 몫이고 지배자는 희열을 느낄 뿐. 매일 경수를 가지고 노는 게 즐겁다. 종인은 씨익 웃으며 경수의 옷을 거칠게 벗겨냈다.


"냄새 난다. 목욕하자."








거품 푼 욕조에 들어가기 전 목마르다던 경수의 입술에 레드와인이 담긴 잔을 대주자, 꿀꺽꿀꺽 잘도 받아먹었다. 더 달라는 말에 빈속에 술 마시면 속 버린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종인은 따뜻한 물속에서 경수를 품에 안고 작은 몸을 저의 몸인 양 서슴없이 이리저리 만지며 혼자 와인을 들이켰다. 적당한 두께로 슬라이스한 멜론과 얇은 이탈리언 스모크 햄이 놓인 카나페를 안주삼아 벌써 반병은 마셔버렸다. 안주를 보는 경수의 눈에서 침이 뚝뚝 떨어질 기세였다. 종인이 접시에서 카나페 한 개를 들었다.


"예쁘게 키스해봐."


작은 머릿속의 이성과 본능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커다란 눈. 그걸 보는 종인이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본인은 모를 거다. 이 눈을 혼자 보겠다고 납치했는데 그만큼의 보상은 받는 거 같아 매일이 재미있다. 경수를 통해 알게 된,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흥미와 재미. 직접 면접을 보고 얼굴이 마음에 들어 경수를 합격시켰다.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누구도 모르게 주시하다 철저한 계획에 의한 납치를 감행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경수가 종인의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남겼다. 씨익 웃은 까나페의 주인은 그것을 자기 입으로 쏙 넣어버렸다. 작은 울대가 올라갔다 내려가며 표정이 굳었다. 말없이 가만히 오물거리고 있자, 작정을 하고 입술을 부딪쳐온다. 이번엔 조금 깊다. 두 장의 입술을 가르고 혀를 종인의 이 사이로 들이민다. 나름의 대담함에 들어온 혀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막혔다. 적진에 들어왔는데 손에서 칼을 놓아버리다니. 답답하다.


"으,웁!"


종인이 경수의 뒷덜미를 움켜쥐어 확 끌어당겼다. 먹고 있던 카나페를 경수의 입 안으로 넘기고 이제모양 좋은 꽃 같은 입술을 탐한다. 오동통하고 탄력 있는 입술은 두께도 폭도 물고 빨기에 적당하다. 입 안에 음식을 물고도 씹어 넘기지 못하는 경수는 거칠게 흡입하는 숨결과 함께 다가오는 손길에 계속 몸을 흠칫 떨었다. 그의 손이 경수의 맨살 엉덩이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아 자꾸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두 쪽의 엉덩이 사이에 단단해진 그의 것이 닿아있어, 자꾸 허리를 빼도 다시 그 자리에 또 종인의 페니스가 끼워져 있다. 굴욕적이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인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사람의 인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납치. 감금. 능욕. 굴욕. 치욕. 요 몇 주간 당할 건 다 당했다. 경수 저가 마음에 들어서 직접 합격시켰다는 상사의 말은 사실이자, 왜곡이었다.


"한번만 더 빼라. 그냥 박아버린다."


서늘한 얼굴로 말하는 종인은 경수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게 얼마나 아픈지 몇 번을 당해도 이력이 나지 않았다. 겁에 질려 몸을 굳히고 있는데 종인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착하네. 착한 어린이한테는 선물을 줘야지...그게 어디 있더라..."


무언가를 찾으러 누드의 그가 욕조를 나갔다. 욕실의 벽에 울려 찰랑이는 물소리가 귀를 찔러왔다.


달칵!


욕실 문이 닫혔다. 아. 안 돼.

또 다시 사면이 패쇠 되어버렸다. 이번엔 저가 만들어낸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린다.


"아..아...사, 사....장..니,님..."


이런 곳에서 혼자는 싫다. 어릴 적 살고 있던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사고로 급정거해서 비상버튼을 눌렀는데 전등이 꺼지며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밑으로 내려갔었다. 가속이 붙은 엘리베이터가 멈추지 않아서 이러다 죽겠구나했는데 또 급정거한 앨리베이터는 움직일 줄 몰랐다. 거의 반나절을 혼자 검은 사각박스 안에 있으면서 생긴 공포는 어린 경수에게 말로 표현 할 수 있는 감정상태가 아니었다.


"사,사,사,사, 사장님!!!"


경수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손에 원하는 물건을 쥐고 들어오며 본 욕실 안의 강아지는 척 보기에도 심하게 덜덜 떨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고함을 꽥 지르는데 종인도 깜짝 놀랐다. 욕조 안으로 들어가자 불안한 숨소리를 달고 그의 목을 두 팔로 안아왔다.


"하아, 하아, 저 혼자두지마세요..."


꽈악 안아오는 손길에 종인은 자신이 무심코 욕실 문을 닫고 나간 걸 깨달았다. 아. 그랬구나. 단순히  자주 써먹어야겠다 싶다. 이렇게 저를 필사적으로 원하는 도경수라니. 빨리 괴롭히고 싶다.


"아, 해."


경수를 품에서 좀 때어내고 카나페부터 하나 먹였다. 앞으로 체력 소모가 심할 테니 기력 잃지 말라는 의미에서 대가없이 하나 정도는 줄 수 있었다.


"맛있어?"


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꺼 보다 맛있냐?"


순간 굳어버린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감정 없어 보이는 눈을 보던 긴장된 시선이 큰 손에 들려있던 자위기구로 향했다. 아. 강아지, 이거 때문에 겁먹은 눈이 된 거구나?


"며칠 쉬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별로 위로 같지 않은 위로로 불쌍한 강아지를 더 겁먹게 만든 장본인은 휘파람을 불고 싶을 지경이었다. 단단한 팔뚝이 경수를 욕조에서 끌어냈다. 알몸을 대리석 바닥에 눕히고 일단 손가락에 콘돔부터 끼워 넣는다. 위치는 대충 아는데 기구가 작아서 위치파악을 한 번 더 해야겠다 싶었다. 윤활유를 듬뿍 바른 가운데 손가락을 괄약근 안으로 쑤욱 넣었다. 일할 때만큼이나 집중해서 찾아낸 곳은 전립선. 손가락 끝으로 그곳을 살살 문지르자, 크게 움찔했다.


"하, 하지마세요, ..앗!"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 이상한 기분 밖에 들지 않는 경수의 괴로운 표정을 보면서 종인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손가락을 빼냈다. 그런데 사실 이 다음이 더 문제다. 종인이 들고 있는 저 자위기구. 머리 쪽이 손가락 마디 크기의 럭비공의 모양을 하고 있고, 줄이 연결되어 끝에는 리모트 컨트롤이 달려있다. 몸 안에 또 저게 쑤셔 넣어질 생각을 하니 도망가고 싶어 세워진 다리를 자꾸 오므리게 된다.


"다리 안 벌리면 묶는다."


저음의 엄한 한마디에 어쩔 수 없이 가는 두 다리가 벌어졌다. 역시나 예고도 없이 도구와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 문지르던 그곳에 기구 머리 쪽을 대어놓고 쑥 빠졌다.


"오늘은 성공해보자, 도경수, 응?"


종인이 입을 맞추며 리모트 컨트롤을 켰다.


"으..으.아...하..."


떨리는 목소리가 생생하다. 전립선을 강타하는 진동으로 경수는 정말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빼, 빼주세...하.으..."


"그 정도로 부탁해서 되겠어?"


"사...장..으...하아..님..제발..."


애원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좀 더 선물을 주기로 했다. 종인의 혀가 눈앞의 작은 젖꼭지를 물었다. 부드럽게 핥다가 거세게 빨자 단단하게 서서 벌겋게 변한다. 복부가 무언가로 걸리적거려 밑으로 시선을 내려 보니 저 혼자 벌떡거리는 페니스에서 쿠퍼 액이 찔끔찔끔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안되겠다. 더 늦기 전에 욕실 찬장에서 본디지 테이프를 찾아냈다. 혹시나 하고 갔다 놨는데 좋은 선택이었다. 색깔도 레드다. 흥분되게.
적당량을 잘라 핑크색 페니스에 압력을 줄 정도로 둘둘 감았다. 더 이상 커지는 건 안 된다. 그러다 사정하면 안 되니까. 경수에게서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


원하는 건 사정을 하지 않는 절정. 몸 안의 전립선을 자극해서 전립선 액만이 분출되는 드라이 오르가즘.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게 목표가 아니다. 보고 싶은 건 드라이 오르가즘을 느낄 때의 경수의 표정, 몸짓 그리고 저를 보는 눈빛. 일반적 섹스로 보지 못하는, 누구도 보지 못한 도경수를 보고 싶었다.
찰나의 짧은 순간을 위해 집요하게 정성을 들여 공략한다.


"사,사장니....아..아,아,"


몇 주 간의 연습에 효과가 있었는지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빨라진 호흡이 거칠어지며 미세하게 찡그린 눈썹과 벌어진 입술이 몽롱한 표정을 만들어낸다. 가면 갈수록 점점 초점이 사라지려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오른 손으로 몇 번 보드라운 뺨을 쳤다. 짝짝하고 공기를 가르는 타격 음이 찢어진다.


"도경수, 어디 봐, 나 봐. 나보라고!"


"하아, 하아, 하아..."


가쁘게 내쉬는 숨이 버거워 보였지만 자비 없이 리모트 컨트롤의 바이브를 강으로 올렸다. 이내 헐떡이는 경수는 용서해 달라며 방언이 터졌다. 뭐를 용서하면 되는지 몰라서 종인은 아무것도 어떻게 하지 않았다. 경수의 표정. 절정으로 가는 눈, 코, 입의 떨림이 주는 광경에 온전히 몰입되어 있었다. 쉬지 않고 뺨을 흐르는 눈물줄기하며 반짝거리지만 쾌락으로 흐릿한 동공이 피하지 않고 보고 있다. 혼란스런 얼굴과 덜덜 떨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몸의 사지. 종인의 숨이 가빠졌다.


"아,하아,아,아,아악!...하아, 하아, 사, 사,사....아아!! 이,이사,상해요,하아,하학,"


큰 신음을 내며 경수가 절정을 느꼈다. 아니, 느끼고 있었다. 계속 되는 절정에 안 그래도 큰 경수의 눈이 확장되며 끝도 없는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모,몸이, 하앗!! 이,이사! 아!! 사자,장니...하악!!"


작은 양손이 종인을 향해 뻗어온다. 그 모습이 엄청나게 쏠리게 만들었다. 바로 들어가고 싶어서 왼손에 쥐고 있던 리모트컨트롤을 쑤욱 잡아당겨 괄약근 안에서 빠르게 빼냈다.


"히익!"


이상한 소리를 낸 경수는 침을 여러 번 삼키며 힘들게 호흡한다. 그렇다고 봐줄 종인이 아니다. 꼿꼿한 페니스에 윤활제를 잔뜩 바르고 구멍을 늘리지도 않은 채로 바로 쑤시고 들어갔다. "흐윽!!" 하는 숨 삼키는 소리 뒤의 말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 입술이 먹었다.  버둥거리는 사지가 잠잠해져온 건 종인의 허리가 몇 번 앞뒤로 움직이고 나서였다. 적당한 깊이와 속도를 내다가 빠르고 깊게 쳐들어갈 때, 동여맨 페니스가 움찔하며 울음을 낸다. 언제고 금욕적일 것만 같던 경수를 이다지도 음란하게 만든 성취감이 하늘을 찌른다.


3천명의 식구를 거느린 회사의 사장인 김종인이 마음대로 부릴 사람은 많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부탁이니까 하룻밤 상대로 써 달라 애원한다. 하지만 그 따위 털끝조차 우아하지 않은 유혹은 필요 없다. 따라서 일말의 흥분도 없다. 온전히 종인 저의 손으로 만들어낸 도경수의 오르가즘. 그것이 경험하게 해주는 환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도경수를 가지고 놀고 싶다. 종인의 욕망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가는 허리에 팔을 넣고 위로 들어, 그와 이어진 채로 저의 허리 위에 앉혔다. 중력은 무심하게 경수를 달달한 사지로 내몰았다.


"아흑! 흐읏!"


종인이 허리를 한번 흔들자, 힘이 풀린 경수가 중심을 못 잡고 저의 쪽으로 상체를 무너뜨렸다. 어깨로 떨어진 땀이 등 뒤로 흘러 허리로 내려가는 느낌을 피부로 느꼈다.


"하....."


땀이 뭐라고 흥분 됐다.


"움직여. 허리."


찰싹 소리 나게 맞은 엉덩이가 빨갛게 손자국을 남기고서야 경수가 없는 힘을 짜내 아주 조금 하체를 들었다. 그렇지만 얼마 안가 백기를 든다.


"모, 못하..게..하악..푸,풀러...주세요,네에...?"


"뭘?"


"테,테에..하..아...이프으.."


"아, 그래. 테이프. 잊고 있었네."



가는 허리를 안고 있던 젖은 손이 떨어져 나갔다. 서로의 몸을 떨어뜨리려 맞닿아있던 허리를 조금 뺐다. 안에서 약간 빠지며 벌떡이는 것 때문에 성감대가 쓸려 말끝을 묘하게 올린 경수의 애원이 마음에 들었다. 종인은 거의 대부분 젖어버려 이마에 달라붙어있던 검정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려주었다.



"사,사,자니이...임.."



눈물이 흥건한 맑은 눈. 너에게 밖에 없는. 거짓 없고 화려함 없는 그저 너의 눈. 저 예쁜 눈알이 빠지게 울리고 싶다. 참을 수 없어 이미 벌겋게 부어오른 입술을 다시 찾아 물었다. 휘감기는 혀는 나선형을 그리며 돌다가 감질나게 입술 끝에만 머물기도 했다. 움직임 없이 이어진 채 두 입술이 서로를 할짝 인지 얼마나 흘렀나 알 수 없었다. 그만큼 하얀 살에 키스마크의 숫자가 늘어갔다. 어디든 이어질 수 만 있다면, 그래서 도경수가 한발자국이라도 더 자신의 것 일수 있다면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종인은 원래대로 경수를 욕실바닥에 눕혔다. 기나긴 섹스에 엑스터시는 겨우 한번. 두 시간 가까이 아슬아슬한 전희만 몰아쳐 전신에 힘이 다 빠진 경수는 먹은 것도 경미해서 탈진에 이르렀다. 숨 쉬고 있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렇지만 종인이 알리가 없었다. 그저 쾌락에 취해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최대한 몸을 붙이고 낮게 그리고 깊게. 경수의 입술사이에서 음란한 신음이 흘렀을 때, 그제서 야 손가락으로 작을 수밖에 없었던 페니스에 감은 테이프를 풀어냈다.


"으아아아!!"


딱 세 번의 허리 짓에 경수는 많은 양의 사정 액을 분사하며 두 번째 절정을 맞았다. 종인 또한 경수 안에서 사정했다. 곧이어, 방 안에 둘의 숨소리가 엉긴다. 무심코 위로 무너진 몸에 떨리는 손을 가져댔다. 곳곳에 적당히 근육이 붙어, 만지면 튕겨 오르는 늘씬한 몸 선을 따라올라 젖은 머리카락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뜨겁다. 의미가 무언지 알 수 없는 저를 향한 구부러진 열정이 오늘따라 가슴을 죄어왔다. 이해 할 수 없고 다른 이름이 집착이라도 수년간 학교와 사회에서 겉돌아 주위를 감싸고 있던 냉기보다는 훨씬 났다.

그래.... 여기가 났다.




fin




청게 1. 2.








1.


갈라진 엉덩이턱을 교과서에 대고 눈을 감은 짝궁의 감긴 속눈썹이 봄바람 결에 흔들린다. 덩달아 윤기나는 검정머리카락도 살랑였다. 열린 창문 옆자리에 앉은 키가 큰 짝의 눈꺼풀은 4교시가 거의 끝나갈 시간에도 사뿐히 닫혀있다. 귀가 따가운 수업 종료 울림소리가 들려야 종이짝 두께만한 실눈을 뜨고 잠에 취한 한숨을 흘리며 일어난다.


"잘잤어?"


내 짝궁은 내 동생. 새로운 어머니가 대려오신 한살차이의 남동생이다. 아버지는 내가 한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이 걱정된다며 날 같은 학년으로 초등학교에 재입학 시켜버렸다. 그 덕에 초등학교를 7년이나 다녀야 했지만 싫지않았다. 그토록 바라던 귀여운 동생이 생겼으니까.


"어..."


자고 일어난 저음으로 나른하게 대답한 종인이는 부은 눈으로 교과서를 가방에 쑤셔넣었다. 자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오늘이 토요일인 건 알고있었던 모양이 었다. 찌푸린 얼굴로 집에 갈 채비를 하는 걸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도 가방을 챙겨 담임선생님이 종례를 해주기만 기다린다.


사방을 튀며 치이익 하는 시원한 사이다캔 따는 소리가 지나가는 자동차소리에 섞였다. 캔을 내미는 종인이의 손에 사이다 방울이 맺혔다. 손가락을 쪽 빨고는 다시 내민다. 나는 사이다를 받아들고 한모금 넘겼다. 차가운 탄산이 입 안에서 펑펑터진다. 뭔가 덥다. 여름이 시작되려하나보다. 오른쪽 볼이 따가워 무심코 옆을 올려보았다. 내가 입술에 캔구멍을 끼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보던 종인이가 자기 사이다를 들이켰다.







별말없이 둘이서 걸어가는 하교길. 담장에 핀 개나리와 벚꽃이 이러저리 흔들리는게 예뻐 고개를 들고  쳐다보는데 콧구멍에 손가락이 쑥 꽂힌다. 이런식으로 장난치는 게 한두번도 아니고 눈알만 굴려서 옆을 보니까 종인이가 씨익웃는다.


"드러워, 임마."


햇빛에 그을린 손을 툭쳐서 내치고 복수심에 종인이의 복근을 꼬집꼬집 했다. 두 발을 통통튀며 찡그리고 웃는건지 아픈건지 모를 표정을 하며 온몸을 비틀어보였다. 위아래로 팔딱이는 종인이의 머리카락이 애 같아보인다. 웃음이 절로난다.


"형. 일로와."


갑자기 종인이가 내 팔을 잡고 담장 쪽으로 끌었다. 지나가던 오토바이가 너무 근접해 있어서 그랬던 거 같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이렇게 컸지. 넓어진 어깨를 슬쩍올려보는데 기분상 나보다 십몇센치는 더 커보인다. 내가 어릴때부터 작긴 했지만 종인이는 비정상적으로 빨리 성숙했다. 골격도 다부지고 다리도 길고. 아. 뭔가 형인데 형같지 않은 이 기분은 뭐지. 들고있던 캔을 비워내며 근본부터 해결할수없는 허탈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일있어?"


탐색하듯 관찰하는 종인이의 두 눈. 말없이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 눈이 익숙해질만도 한데 너무 오랜시간 응시하면 진짜 내 몸에 구멍이 뚫릴 것 같다.


"아니."


동생인데 가끔 형 같은 거 반칙이다, 김종인.




fin




2.


코를 찌르는 땀냄새, 일년은 족히 빨지 않은 듯 때가 꼬질꼬질한 실내화, 꾸깃한 교복자켓을 입고 있어도 그 애는 하나도 더러워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모든게 열정으로 뭉퉁그려졌다. 채워지지 않은 셔츠의 단추사이로 한여름이 묻은 땀이 흘러 수돗가의 차가운 물로 내려보낼때나, 머리에도 흠뻑 적셔 거칠게 흔들어 털어낼때는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때로 친구들과 수도를 막아 서로를 물에 젖은 생쥐꼴로 만들어 웃었다. 그 애의 선풍기바람 만큼이나 시원한 웃음은 경수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2학년 1반 14번 김종인. 3학년 1반 12번 도경수. 그래도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보였다.


"저기요, 이거."


목소리와 손이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큰 눈이 번쩍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고3은 바쁘다. 꼭 몸이 바빠 시간이 없는 것 보단 심적으로 여유가 없다. 그러나 경수는 그와중에도 고고하게 독서를 즐겼다. 평소 도서관에 오는 습관이 들어버린 저 자신에게 이토록 감사할수 없었다.


"이거 그 쪽 꺼 맞아요?"


그 쪽. 경수는 이름을 알아도 그 애는 모른다. 책장 사이에서 쪼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똑바로 섰다키차이가 날 줄 알았지만 두뼘은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들고있던 책을 꼬옥 쥐고 그 애가 내민 펜을 건내받았다. 펜이 손으로 굴러오다 닿은 그 애의 손 끝은 뜨거웠다.


"네. 맞아요. 고맙습니다."


긴장하지 않고 웃으려 노력했는데 결실이 있었는지 알수없었다. 이제까지 경수가 훔쳐보던 굵은 쌍꺼풀이 지척에서 깜박이는 건 무언가 황홀한 광경이였다. 도서관 창문 틈으로 들어온 미풍이 그 애의 속눈썹을 떨리듯 날려냈다. 할수만 있다면 만져보고 싶기까지 했다.


펜만 건내주고 지나쳐 간 뒷모습에 경수의 시선이 밀착했다. 눈알이 굴러 친구들 사이에서 노닥거리는 입술에 안착했다. 경수는 책사이의 눈길에 손가락을 싣어보냈다. 다행이도 도서관 안의 바람이 도와주었다. 볼록한 이마, 두꺼운 코, 도톰한 입술, 갈라진 턱을 쓸고 목선도 만져보았다. 가슴이 조용히 두근거렸다. 깜박이는 큰 눈과 박동을 같이 하는 심장이 갈수록 빠르게 뛰었다. 경수는 휙 등을 돌렸다.


"후....."


절대 한숨이 아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부터 들이쉬어 길게 뱃어내는 이것은 긴장의 연장선이었다. 안정적으로 나오지 못하는 들숨날숨을 고르려 무단히도 애를 썼다.


"저기요."


어? 재빠르게 휙 둘러보아도 경수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뒤돌아봐요."


갈곳을 잃은 동공이 흔들렸다. 경수는 바다처럼 넓고 깊은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있었다.  머뭇거리며 몸을 돌렸다. 책장의 책들 뒤로 김종인 이라는 명찰이 눈에 띄었다. 멋대로 풀어진 셔츠와 굵은 목선을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침을 삼키는지 목울대가 울라갔다 내려가며 어깨를 쭉 편다.


"3학년이죠? 이름 뭐에요?"


"..도..경수..요."


"도경수선배구나. 폰 줘봐요."


"네? 포온이요? 왜...아, 어떻게..."


"여기로요."


꽃혀진 책들 위에서 굵고 긴 손마디가 나왔다. 경수는 교복자켓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손가락에 끼웠다. 폰은 책장 넘어로 사라졌다. 얼마간의 기다림이 지나고 폰이 불쑥 등장했다. 손을 뻣어 폰을 잡는데 그 애의 손가락이 엉켰다. 염치도 없는지 마디사이에 엮었다 풀었다 끝으로 잡았다 장난한다. 톡톡치기도 하고 손톱으로 긁기도 한다. 그저 손가락인데 동작 하나하나에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간다. 저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반대편으로 손이 끌려갔다 풀려났다.
책이 가려져 얼굴을 보지 못하는게 다행이었다. 경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전화하면 받아요."


"네에..."


저장된 전번의 이름, '선배눈에닳아없어질후배'


"으아아아아아아!"


경수가 비명을 질렀다.





fin




저 불러주세요







'내가 셀레브리티 정기구독 신청 하루때 응모해 본 건데 뽑힐 줄 몰랐어. 내가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못 갈거 같으니까 종인이 너가 대신 가라. 아깝잖아.'


손에 든 초청카드는 아기자기한 핑크색 바탕에 레이스무의로 펀치된 종이가 깔려 있고 그 위에 금색으로 '됴쌤의 쿠킹클래스에 당첨 되신 것을 축하 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됴쌤이라면 종인도 아는 유명한 쉐프였다. 일주일에 두번씩 아침방송에 나와서 10분 만에 만드는 아침식사 코너를 진행하는데 동시간대 아침 정보 프로 중에서도 발군의 시청률이 나온다고 인터넷 기사에 떠들썩했다. 발행 하는 요리책은 전부 베스트셀러에 올리기도 하고 가끔 식신원정이 어쩌고 하는 프로에도 나오는 대세 쉐프였다. 요즘 스타 쉐프는 실력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 외모도 그만큼 수준을 윗돌아야 되는데 비주얼은 물론이요 인성까지 바르니 싫어 하는 사람이 없어 '요리사계의 유재석'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딱히 요리에 관심은 없었는데 어느날 누나가 보는 요리프로를 보다가 됴쌤이 괜찮다는 선입견을 가졌다. 대화해 본 적 없고 그 사람을 잘 모르니 선입견이라 해도 맞겠지 싶었다. 누나가 카드를 내민 순간,자신이 멋대로 만든 강아지 같은, 콕집어 말하면 말티즈 같은 이미지가 맞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받아들었다. 처음은 이렇게 심플했다.


디오 쿠킹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많은 여성 응모자들이 형형색색의 에이프런을 두르고 자기들끼리 폰카를 찍으며 속닥이고 있었다. 남자는 한명도 없는 이런 상황이 상당히 불편하고 쑥쓰러웠던 종인이 쭈뻣거리며 문간에 서 있는데 노란 꽃무늬 에이프런을 맨 됴쌤이 생글거리며 걸어왔다. 그 덕에 여자 수강생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당연한 듯 얼굴이 더 빨게졌다.


"안녕하세요. 혹시 김혜인님이세요?"


"제 누나가 김혜인이고 저는 김종인인데요, 누나가 못 온다고 저보고 대신 가라고 해서 왔는데.."


"아~ 그러시구나. 들어오세요. 카드는 저 주시면 되요."


"아, 네. 여기."


"에이프런 가지고 오셨어요? 없으시면 제꺼 빌려드릴까요?"


"준비물이 있는지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일단 손 먼저 씼으시고 이거 두르세요. 오늘 혼자 청일점이시니까 오늘 하루 제 보조해보실래요?"


"네? 그...래야되나요?"


"아니, 싫으시면 괜찮아요. 근데 저기 여자들 뿐인데 괜찮으시겠어요?"


흰자위 가득한 눈알이 옆으로 돌아갔다. 여자만 스무명 넘게 들어찬 공간에 서 있는게 확실히 부담스럽긴 했다. 종인의 고개가 수줍게 끄덕여졌다.







쿠킹 클래스는 순조로웠다. 오늘의 주제인 크림 김치 스파게티를 만드는 수강생들은 평소 좋아하던 됴쌤과의 쿠킹을 즐거워 했고 동시에 새로온 김종인 보조도 좋아했다. 그들 중에는 됴쌤과 보조에게,


"두 분 커플 같아요! 잘어울려요!"라든가, "그거 사랑과 영혼에 나오는 장면 해줘요!" 라며 어디로 보나 덕스러운 말을 스스럼없이 던졌다. 그럴때마다 됴쌤은 눈을 흘기며 웃고 말았는데, 종인은 그런 도쌤의 표정에서 잠시 눈을 못 때다가 조리에 집중해야 했다. 스파게티를 삶는 동안 어떤 수강생이 갑자기 노래를 불러 달라고 외쳤다.


"됴쌤! 노래 듣고 싶어요! 노래 해 주세요!"


됴쌤은 몸집은 작아도 아주 울림이 좋은 목소리를 하고 있어서 마이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수업내용이 교실 전체에 잘 들렸다. 분명 노래를 부르면 멋드러질 거라 종인도 생각하던 참이였다.


"노래 잘 못하는데...진짜 불러요?"


"네!! 불러주세요!!"


"그럼, 나윤권의 기대 쪼금만 부를게요. 흠! 겁이나~ 강하지 못한 나~ 너 없인 무엇도 아닌 나~ 이 맘 속에 너 하나만 안고 알고 살아 온 날~ 자! 여러분! 스파게티 면 건지세요!!"


감질나게 치고 빠지는 식으로 두소절만 빼꼼히 보여준 됴쌤은 뭔가 부끄러운지 면을 건져서 올리브오일을 뿌리라고 지시했다. 폐에서 나오는 헛바람으로 쿡쿡 웃은 종인도 끝이 포크처럼 생긴 국자를 집어 들었다.


작은 후라이팬에 씻은 김치를 허브와 볶고 프레쉬크림을 섞은 소스를 스파게티 면 위에 조심스럽게 부었다. 그러고 나니 왠지 작품을 만든 거 같은 기분에 종인의 입술이 찢어졌다. 그치만 처음 해 본 요리가 나름 만족스럽게 나왔는데 칭찬 해주는 사람이 없다. 꽃무늬 에이프런을 입은 됴쌤이 이리저리 다니며 수강생들에게 조언하고 돕는 모습을 따라 붙는 시선이 바삐 움직였다. 좁게 쳐진 어깨와 한품에 들어올 허리를 가진 됴쌤은 몇 살일까 그게 젤 궁금해졌다.
수업이 끝나서도 수강생들은 쿠킹 스튜디오를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됴쌤의 요리책에 싸인을 받고 사진까지 박고도 누구도 그의 옆을 뜨지 않고 재잘거렸다. 짜증나는 건, 자신은 홀로 남자라서 저 음기 가득한 여자사람 뭉텅이를 치고 들어 갈 수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이였다.


"여러분! 오늘 강좌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생기면 꼭 다시 들어주세요!"


종인이 출구를 열려고 손을 가져 대는데 됴쌤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교실을 울렸다. 정갈한 말투와 차분한 목소리가 귀에 쏙 들어와 발이 철커덕 멈췄다. 그제서야 수강생들이 하나둘씩 아쉬운 걸음을 했다. 여자 셋만 모이면 접시 깨진다는 말도 있던데 스무명이 모였으니 더없이 시끌벅적 했던 곳이 문 닫은 식당처럼 조용해졌다. 창문 밖은 어둑어둑 해지고 오렌지색 석양빛이 드물게 남아있었다.


"안...가세요?"


아까보다 수백배는 더 벽면을 울리며 됴쌤의 소리가 감겼다. 종인은 한박자 쉬고 "아,가야죠."라고 읍조렸다. 누가봐도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의 반어법이였다. 몸의 어느 한구석도 움직이지 않고 문에 기대어 서서 애꿎은 시멘트 바닥만 운동화로 치덕였다.


"저기...됴쌤 몇 살이에요?"


"네? 아, 저 23살이에요."


"23살이구나...저기, 그러니까, 그...정리 도와드릴까요?"


"거의 다들 하고 가셔서 괜찮은데...그...래주실래요?"


됴쌤의 눈이 휘어졌다. 둘은 식기구와 주방기구의 위치를 정리하고 바닥을 쓸었다. 종인이 대걸레를 들고와서 쓱쓱 밀었다. 됴쌤은 허리를 숙이고 열심히 닦고있는 남자의 넓다란 등을 보며 의자에 앉아있었다.


"근데 이런 잡일도 본인이 다 하시나봐요."


꿈틀거리는 그의 등이 말했다.


"네. 오늘 사실 보조가 오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못 왔어요. 이 뒤에 스케줄이 없어서 오늘은 제가 하는 거에요."


"스케줄 없으면 뭐하세요?"


"레시피 계발하고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친구도 만나고 똑같아요."


종인이 허리를 펴 뒤를 돌았다. 몸짓은 결연한데 오갈데없는 동공이 흔들리며 떨어졌다. 떨렸다.


"저..되게..잘 먹는데...."


"네?"


"레시피 계발 하실 때 저 부르시면 잘 먹을 수 있어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물음표를 단 얼굴은 점점 멍하게 변했다. 잡고 있던 대걸레를 끌고 됴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은 종인이 고개를 들었다.


"저 불러주세요."





fin



도대리







"신입사원 환영회식에 도대리가 빠지면 쓰나! 노래하면 도대리지! 도대리!!"


경수를 애타게 찾는 부장님의 술취한 손짓은 한두번이 아니였다. 회식만 하면 도대리의 노래를 듣겠다며 적당히 빠져줘야할 미덕도 잊는다. 옆에서 따라주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경수의 노랫소리에 빠져드는 회식자리 풍경은 흔했다. 그 덕에 회식만 한다고 하면 오늘 할머님 회갑잔치네, 아이가 아프네, 누나가 출산을 했네 등등의 그럴싸한 이유를 찾아내는 직원이 한둘이 아니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오늘은 무조건 전원참석이라는 불호령이 떨어젔다. 말단부터 시작해서 20명의 남녀직원이 고깃집부터 시작해서 카라오케까지 서울밤의 네온사이로 우르르 몰려다닐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달큰하게 취한 부장님 앞에서 약 한시간 동안 트로트메들리를 시전하고 있는 경수의 표정은 무언가,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는 자의 포기가 보였다. 그렇지만 이제 슬슬 목도 아프고 집에 가고 싶다. 부장님 옆에 앉은 여자직원에게 흰자를 부라리며 술 더 먹이라는 그들만의 암호를 보냈다.


"부장님~! 또 뭐 불러드릴까요? 찔레꽃? 마포종점? 땡벌?"


마이크에 대고 원하는 곡을 선택하라고 다그치는데 타이밍 좋게 부장님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도대리와 주위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집에 가는구나.


"도대리야~!! 뇌~가 너 지~~인짜 젛아하는 거 아르지?!"


"네. 부장님. 알죠. 머리 조심하세요."


부장님의 벗겨진 머리를 택시 안으로 사정없이 구겨넣은 후, 기사님께 잘부탁한다며 제발 좀 빨리꺼져 달라는 의미로 6만원을 꺼내 택시기사님께 드렸다. 떠나는 택시 뒤꽁무니를 보지도 않고 뒤돌아 길게 한숨을 한번 더 내뺐다. 다른 직원들은 이미 집으로 귀가한 상태. 목도 칼칼하고 피곤하고. 젠장. 부장님 때문에 밥도 술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회식이 즐거울리 없다.
포장마차가서 혼자 달려야지.


"도대리님. 어디가세요?"


귀가 한 줄 알았던 김종인 말단직원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옆에 서 있었다. 경수가 깜짝놀라서 흠칫했다. 뭐야. 이새끼. 무섭게. 어디서 잠복했다가 나타난거야?


"집에 안갔어? 김사원? 어디있다가 나타난거야, 깜짝 놀랐잖아."


"술깨려고 아까부터 저기 벤치에 앉아있었어요. 이제 집에 가시는 거에요?"


"아, 피곤해서 집 앞에서 혼자 한잔하려고."


"저도 가도 돼요?"








때로 혼자 마시는 술은 혼자 먹는 밥보다 더 외롭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니였다. 혼자 마시고 싶었다고. 그런데 이 다리길고 덩치만 산만한 말단직원님께서 왜 이렇게 들러 붙는지, 그런 주제에 말이 많지않아서 요상하게 귀찮지 않고 편했다. 암튼 이상한 놈.


김종인이 첫출근 했던 날, 옥상에서 쪽담배를 태우는 경수 옆에 쓰윽와서는 라이트 있냐고 물었던게 기억났다. 그대로 별말없이 옆에서 담배를 피더니 인사를 하고 먼저 옥상을 내려가는게 아닌가.


출구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헛웃음이 나서 피식 웃었더랬다. 뭐, 세상엔 여러사람이 있으니까 이런 놈도 있겠지. 계란말이와 돼지수육을 앞에 두고 소주를 털어넣는 종인을 물끄러미보며 경수가 웃었다.


"왜 웃어요?"


"어? 아니야."


손에 쥔 소주잔에 종인이 자작하게 술을 채워준다. 그런 경수의 소주잔은 금새 바닥나고 또 채워주고. 암튼, 이상한 놈. 경수의 시선이 종인을 천천히 훑었다. 목에 걸린 아이디 카드가 말해주듯 말단직원인데 복도에 지나가면 젊은 부사장과 다른게 없는 포스를 내고, 여자직원들에게 엄청 매너있어서 인기가 날로 하늘로 치솟는다. 사실은 회장님 손자인데 사회경험 하려고 말단직원부터 들어온 거라는 소문이 도는데 그게 맞는지 아닌건지 알길은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김종인으로 채워지고 있을때, 종인이 경수의 손에 숟가락을 끼워주고 밥그릇을 앞에 놓아주었다. 언제 시킨건지 포장마차이모의 된장찌개도 놓여있었다.


"아까 밥도 제대로 못먹었죠? 드세요."


"어,어."


"먹으면서 들어요."


"어?"


밥을 입에 가득넣고 찌개를 뜨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내가 원래는 부장부터 시작할수 있었거든요. 할아버지도 그런 줄 알고 계셨다구요. 근데 내가 첫눈에 반한 사람이 대리라는 거에요. 가까이 있으려면 차라리 말단부터 하는게 낫겠다 싶더라구요."


"...부장이 뭐? 너가 좋아하는 사람이 대리라고?"


"네. 대리. 도대리."


"......응, 도대리~.....도대리??"


회사에서 도가 붙는 대리는 도대리. 도경수대리 밖에 없다. 경수의 두 눈이 커져서 종인을 쳐다본다. 입에 물고 있던 밥알이 다 보이도록 벌어진 입에 미간을 찡그린 종인이 손을 뻣어 턱을 올려주었다.


"스무번 씹어요. 꼭꼭."


무의식 중에 고개를 끄덕인 경수가 밥알을 씹는데 머리가 텅비어버린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종인의 말대로 스무번 꼭꼭 씹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종인이 씨익 웃었다.


"이거 그린라이트 같은데...맞죠."


"어? 뭐가. 뭐가 그린라이튼데."


"모르면 말고. 말 안해줄거에요. 이거도 먹어요."


"어? 어."


김나는 밥위에 종인이 얹어준 계란말이 한 점이 먹음직스런 노란색으로 빛났다.
그래. 계란말이 맛있지. 먹어야지.


"잘 먹네."


소주를 자작해서 원샷한 종인이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뭔지 알수없어도 휘말려드는 기분이 든 경수는 계속해서 저를 훑는 시선이 점점 부담스러워진다. 사람이 밥먹는 거 첨보나, 왜 저렇게 뚫어지게 보나 싶은데 딴데보라고 하면 경수 본인이 더 민망해질것 같아 아무말도 못했다.







딱 기분좋을 만큼 취했고 배도 부르다. 아까까지만 해도 스트레스에 머리가 쪼개지는 줄 알았는데 이젠 사는게 이런거지 뭐 싶다. 뭐 특별한 거 하려고 일하는 거 아니고 일터에서 오는 작은 보람이나, 또 이렇게 퇴근후에 술도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이게 하루하루 사는 거지 싶다.


인생하면 담배지. 게포장마차에거 나오자마자 자켓에서 담배갑을 찾아 하나 물었는데 그게 쏘옥 빠져 입술에서 멀어졌다. 경수의 인생의 낙을 가져가는 범인은 김종인말단직원님. 고개를 흔들더니 자기 입술에 끼웠다.


"도대리님, 담배피우지마요. 안어울려."


종인의 입술사이에서 삐져나온 담배연기가 밤공기로 흩어졌다. 연기 때문에 찡그린 종인의 얼굴표정이 멋있고 자시고를 떠나 이새끼가 어디서 대리님의 담배를!


"줘. 안내놔?"


"아, 진짜."


경수가 까치발을 들고 담배를 뺏으려 하는게 종인은 귀여워 미치겠는거다.
고개를 저으면서 담배를 입은 긴팔을 쭈욱 뻣어 하늘로 올린다.
토끼처럼 뛰어보라고.




fin



줄게 이것밖에 없다.
카디야 데뷔2주년 축하한다.
2YEARSWITHEXO



366







서울에 산다는 건 편리하다. 많은 것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게 해준다. 어제까지 열려있던 닭갈비식당이 오늘은 문을 닫고 카페가 들어선다 적혀있다. 얼마 전까지 걸어다녔던 길에는 도시미화의 일환으로 일주일도 안되 예쁜 꽃들이 심어져있다. 그 전에는 어떤 잡초가 피어있었는지 기억 나지 않는다.


좋아하던 사람을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이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뜨면 싸늘함에 몸서리치던 날들이 조금씩 잊혀지고 그 자리를 다른 무언가가 차지한다. 댄스스쿨에서 애들을 가르치고 집에와서 영상자료들을 정리하고나면 눈이 감긴다. 그런 식이다. 이러다 김종인, 내이름 석자도 잊어버리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도경수와 헤어진지 366일. 백현이형 에게서 밤늦게 전화가 걸려왔다. 근처의 닭집에서 한잔 하자는 연락이 었다. 뒷날 간만에 쉬는 날이라 가볍게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백현형 이 팔을 번쩍들고 손을 휘휘젓는다. 테이블 위에 슬쩍 눈길을 주니 닭의 잔해와 맥주 몇 병이 있었다. 저녁을 먹지 못했던 나는자리에 앉자마자 프라이드와 양념반을 시키고 자켓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빈잔에 맥주를 따라주는 백현형의 눈이 나 오늘 무슨 일이 있었소. 라고 뻔히 말하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살피듯 관찰하며 담배를 피우는데 시킨 닭이 빨리도 나왔다. 태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세워놓고 닭부터 입 안으로 넣었다.


"찬열이가 헤어지재."


아까는 아무일 없다더니 나불나불 변백현이 어디갈리 없지.


"그래서 헤어졌어?"


"아니. 안된다고 했지."


"그럼 됐네. 왜 그래."


"나만 안된다고 한거지.... 찬열이는 헤어졌대."


평소의 형은 발랄하면서도 쿨한 면이 강하다. 대신 술만 들어가면 한없이 작아진다. 소심하던 사람이 술마시고 대담한 짓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면 술을 마셔도 아무런 미동이 없는 나 같은 성격을 지루하다고 표현한 사람도 있었다.


"형 능글맞잖아. 그냥 들러붙어."


"김종인, 너, 도경수랑 연락하냐?"


뜬금없이 나온 이름에 무표정으로 평소를 가장해 '아니'라고 말했다. 말하고서 내가 차갑게 대꾸했다는 걸 깨닳았다.


"나도 그렇게 되면 어떻하지? 찬열이가 나한테 연락도 안하고 살게 되면?"


"그럴일없어. 찬열이형은 그럴사람 아니야. 전화하면 받아줄껄?"


그럼 도경수는 뭐였단 말인가. 형은 찬열이형보다 더 다정한 사람이 었다. 아프다 하면 몇시가 되었든 집으로와서 병간호를 해주고 배고프다하면 어김없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었다. 전화하면 받아줘야 할 사람은 경수형이었다.


"아~~씨~~야, 맥주 좀 더 시켜."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뒤틀리는지 형이 두 손으로 거칠게 얼굴과 머리카락을 쓸어댔다. 바쁜 형을 대신해 내가 맥주를 몇 병을 더 시키고 재만 길어진 아까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와 맥주 그리고 닭을 번갈아 먹고 마시는 게 반복되어 본연의 맛들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에 익숙한 나에게 이건 일도 아니었다.


"아, 맞다. 나 도경수 봤어. 녹음실에서. 조만간 데뷔한다더라."


"그래?"


"그 새끼 남친 생겼어. 어디 기획사 엔지니어 라던데....."


그런 얘기들으려고 닭에서 담배 맛나고 맥주에서 닭맛나는 걸 참은 건 아닌데 싶었다. 헤어진 사람의 멀쩡한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망가진 이야기도 싫지만 말이다. 그냥 살아줬으면 좋겠다. 나보다 조금 더 힘들게.


"야, 너도 누구 좀 만나고 그래라, 임마."


"일 때문에 바빠서 잘 시간도 없어. 좀 여유 생기면."


형이 이렇게 빨리 누군가와 사귈줄은 몰랐다. 나 좋다고 밤낮으로 들이대고, 헤어질 때도 아무도 안사귀고 기다리겠다 했었다. 그게 다 거짓이었다. 아니, 이게 현실인가. 백현이형을 괜히 만났나 싶어졌다.


할말이 끝난건지 나와의 술자리가 지겨운건지 얼큰하게 취한 백현형은 알아서 잘 가겠다고 혼자 포마차 사이를 휘청거리며 걸어나갔다. 쌀쌀해진 날씨가 내 다리를 집 쪽으로 서둘러 움직이게 만들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담배가 고파졌다. 한개피 물고 검은 공기 속에 흰연기가 피어올랐다 내 뒤로 사라지는 걸 몇 번이고 반복한 후에야 집 근처에 도착 할수있었다. 언덕 위의 전봇대가 시선에 들어왔다. 눈 앞을 가리는 담배연기에 찡그리며 쳐다보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저 전봇대는 경수형의 기다림과 망설임이 가득한 장소다. 보슬비가 오던 날과 함박눈이 오던 날은 저 밑에 서있던 도경수가 유난히도 예뻐보였다. 검은 실루엣이 있는 걸 보니 오늘밤은 다른 누군가가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 었다. 아무래도 백현형을 괜히 만났나 싶었다. 분명 낮설어야 할 그것이 빌어먹게도 익숙해 보인다.


"종인아."


귀와 눈을 의심했다. 물고 있던 담배를 무의식 중에 손가락 사이로 옮기며 주의깊게 응시한 뒤, 경수형임을 알았다. 숨이 탁 막히더니 다음엔 확 놓였다. 그리고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약간 손가락을 떨고있는 걸 들켰는지 모르지만 침착하려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수천번은 지나치던 전봇대 쪽으로 걸어가는 찰나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걸음을 멈추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본 형은 약간 살이 빠졌지만 맑은 눈은 여전했다. 잘세워진 코도, 웃으면 예쁘게 벌어지는 입술도, 마지막 만났을 때 와 같았다. 형이 후디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왠지 망설였다.


"잘 지냈어?"


"응."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피우던 담배는 떨어뜨려 비벼껐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이거 주려고 왔어."


주머니에서 꺼낸 형의 손에 흰색USB가 들려있었다.


"나 데뷔해. 니가 먼저 들어줬으면 해서."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경수형은 노래를 정말 잘부른다. 언젠가 데뷔를 하게 되면 꼭 먼저 들려달라고 했던 내 말을 잊지않았다는 사실에 고마웠다. 그 반면에 이제와 서 무슨 소용인지 차갑게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거절 할수없다. 아직은 달콤한 호의를 피할만큼의 정리는 되지 않은 상태다. 고맙다하고 USB를 손에 들었다.

"데뷔하는 거 백현이형한테 들었어. 축하해."


"그래? 그랬구나, 고마워."


"....많이 기다렸어? 전화하지 그랬어."


"아...매니저가 폰을 못가지고 다니게 해서 어쩔수 없었어."


초가을이라고 해도 밤은 꽤나 쌀쌀한데 그 가운데 기다렸다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들어가서 차한잔하고 가라고 하기엔 너무 속보이는 짓 같아 망설이는데 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가볼게."


"어? 아...응."


"몸 조심하고 잘 지내."


이제와서 형에게 고마웠어라고 말해도 될까 순간 고민했다. 진짜 마지막이구나 싶으니 고마웠다는 말이 떠올랐다. 왜 진작 그 말을 못했을까 후회가 됐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뒤돌아 뛰어가던 형의뒷모습에서 난 왜 짜증만 났을까. 이렇게 속이 탈 줄 알았다면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할 걸 그랬다.


"응. 형도."


"간다."


"형."


언덕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는 형을 말로 붙잡아 세웠다. 추워보이는 형이 싫어서 후드라도 씌워주고 싶었다. 후드를 씌워주는대로 가만히 서 있는 얼굴을 내려보는데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내려깔린 속눈썹이 자꾸 헛된 기대를 가지게 한다.


내가 많이 힘들게 했지? 미안해. 진짜 고마웠어. 근데....한번만 돌아와주면 안될까? 형이 없으니까 죽을 거 같아. 아침마다 미치겠어. 그냥 미칠 것 같아.


사라졌던 아픔들이 불쑥 고개를 들고 내 머리를 휘져어놓았다. 그런데 소리내서 말하지 못하는 건 몇 번을 반복해 온 이별이라는 것에 나름의 방식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무의식 중에 행하는 그것은 내 연애를 방해만 해왔다. 자존심이 다치는 게 싫고 매달리는게 모양 빠지고 미련없이 구는게 남자라 허세부리는 연애만 해온 나에게 경수형의 깨끗한 진심은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가지지 못하는 빛나는 보석이다.


"고마워, 형."


나를 쳐다보는 형의 눈이 흔들렸다. 내 말의 의미가 다 전해진 반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봐."


어색하게 떨어지는 내 손가락에 묻어나는 망설임은 이제 그만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경수형이 돌아서 가기를 기다렸다. 마지막인데 뒷모습은 꼭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발이 박힌 것 처럼 고개를 푹숙인 형이 떠나지를 않는다. 우리 둘 다 말이 없어졌다.


나는 초조해 죽을 거 같았다. 숨조차 떨리는 듯 끊어져 밖으로 나왔다. 담배생각 이 간절해서 자켓주머니를 뒤적이니 그때서야 형의 입술이 열린다.


"담배 좀 나중에 펴봐."


형의 말대로 정지화면을 건 것처럼 멈췄다. 갈곳없는 손은 블랙데님바지주머니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눈치만 보다 입술이 타들어가서 아랫입술을 물었다.


"....누구....생겼어?"


그 물음에 아니라고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시 침묵이다. 미칠 것 같았다. 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리가 하얗게 멍해진 기분이 었다. 그래도 뭐라 말하려 입을 때려는데 형의 한쪽 손이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나와 내 자켓 깃을 쥔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 형이 날 아직 못잊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온 몸을 휘감아 내 가슴에 불을 지폈다. 이 순간만큼은 백현이형으로 빙의해서 말빨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뭔가 경수형이 나에게로 마음을 돌릴 한마디가 절실하다.


"잠깐... 들어갔다 갈래?"


그러니까 이런 말 말고. 나는 자신의 비루한 임기응변에질려버렸다. 다시는 이런 말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응."


내 자켓을 쥐고있던 경수형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일년하고 하루 전의 따뜻함이 작은 손에서 나의 온 몸으로 퍼졌다. 작은 불씨가 살아나는 기분에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다. 갑자기 몸이 뜨거워졌다.


도어락의 비번을 누르고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고 문이 닫히고 신발도 벗지 않은 나는 경수형을 돌아보았다. 날 올려보는 경수형이 시선을 피하며 쉴세없이 눈을 깜박였다. 당황하고 쑥쓰럽고 민망하고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라있었다.




366



fin




명월기







#예조 : 예의, 교육, 외교, 과거 등에 대한 사항을 담당하던 기관
#병조 : 군사, 국방을 담당하던 기관
#형조 : 법률, 형벌의 상심 결정 등을 담당하던 기관
#참의는 정3품의 당상관의 품계라서 경수가 종인 이를 부를 때 '영감'이라는 호칭을 쓰게 되었습니다.







 화에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경수의 앞에 작은 서책 하나가 놓여있었다. 아침에 제 발로 책방에 가서 구매한 물건이다. 제목은 '명월기'. 명월기는 요새 여인들 사이에서 나날이 인기가 치솟는 연애소설인데 중간중간 춘화가 끼어있어 보통 소설책보다 값이 비싼 편이었다. 관심 없는 연애소설을 손에 넣어야 했던 연유는 물론 있었다.


명월기의 주인공은 명월이라는 기생이다.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명월은 장안에서 손꼽히는 일패기생으로 공연을 위해 그녀를 부르려면 엄청난 시간의 전표를 끊어야 가능했다. 어느 날 밤 선비가 자신의 술잔치에 명월을 초대하고 싶다고 예약을 하러 왔는데 그는 고위관직을 지내는 아버지를 둔 양반집 자제였다. 기방의 행주가 몸종을 시키면 될 것을 어째서 본인이 걸음을 하였느냐고 연유를 물었더니, 명월의 면상을 자세히 보고 싶어 친히 걸음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명월은 이미 예약이 가득 차 있었고 선비는 안하무인으로 요정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며 큰소리를 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명월은 자신의 공연이 끝나고 연회의 술상에 있던 삼계탕 안의 계륵을 글귀를 적은 비단에 싸서 접시에 담아 보냈다. 선비는 명월이 보낸 계륵과 글귀를 보고 화통하게 웃으며 요정을 떠났다. 명월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선비는 그 뒤 여러 번 방문하여 일편단심의 정성을 보여주어 그녀를 첩으로 맞이한다는 내용이었다. 약간은 두서없고 허무맹랑한 이 소설은 선비가 명월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야한 장면이 꽤 있어 여인들이 숨어서 읽는 성인연애소설이었다.


자, 여기에서 왜 경수가 이 소설을 두 눈으로 보고 싶어 했느냐 하면 주위의 기생들이 소곤거리기를, 명월기라는 소설이 아무리 봐도 경수와 김종인 참의 같다 하는 것 아닌가. 그 얘기를 요정 주인에게 듣고는 기분이 좋지 않으면서도 호기심이 났다. 그리하여 오늘 낮에 책을 사들여 읽어보았더니, 아무리 봐도 소설 안에서 계륵을 건넨 기생은 경수 자신이며 고위관직에 몸담은 아버지를 둔 선비는 김종인 참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 보 양보해서 그들의 만남은 누가 보고 쓸 수 있다고 하나, 문제는 성행위 내용에 있었다. 자신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묘사에 책을 읽는 시종일관 온몸이 새빨개지고 화를 못 이겨 책상을 내리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김참의, 본인이 쓴 책이 아니고서야 이런 세세한 장면묘사가 나올 수 없다. 그런데 책의 글씨가 악필인 걸 보니 절대 그의 필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지은 책이냐 말인가.


오늘은 기생으로서의 일을 쉬는 날이니, 화병에 쓰러지기 전에 어떻게 해서라든 그를 만나 이 일을 확인하고 넘어가야 했다. 경수는 얼른 경대를 꺼내어 흐트러진 곳을 정리 하고 직접 너울(전모에 천을 씌운 모자)을 쓰고는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마침 간식을 챙겨오던 몸종, 여실이가 놀라며 어디에 외출하시느냐고 물어왔다.


 "김참의를 당장에 만나야겠으니 예조판서댁에 가서 언질을 하여라. 지금부터 오시(오후 11시~1시)가 끝나기 전에 사거리의 주막에서 기다릴 것이니 지체 말고 오시라고 전하거라."

 "하지만 김종인 참의께서는 지금 궁에서 일을 보고 계실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덧붙여 전하거라! 당장에 면상을 보이시지 않으면 다시는 손끝도 구경 할 수 없다고 말이야!"


경수는 화가 나서 거친 콧바람을 내며 여실이에게 다그쳤다.


 "그럼, 저 대신 주막에 동행할 다른 몸종을 보내겠습니다."

 "필요 없다."

 "네?! 단신으로 외출을 하시다니요! 행수 어르신께서 아시면 경을 치십니다!"

 "걱정 말거라. 금방 돌아올 거야. 어차피 오래 있지 못할 것이야."


예조판서(정2품, 장관)의 아들로 병조참의(정3품, 국방차관보)를 지내는 김종인 참의가 아무리 일류이기는 하나 대낮부터 기생과 함께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날에는 대단한 집안 망신이니 어차피 늦게 돌아오려야 돌아올 수가 없다. 게다가 색이 화려한 기생 옷과 너울까지 썼는데 행적이 감춰질 리가 만무했다. 그것을 알고도 경수는 길을 서둘렀다.






사내들의 시선을 알고도 모른 체하며 주막으로 들어섰다. 마당에서 삼삼오오 술과 국밥을 먹고 마시는 남자들이 속닥거리며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경수가 일류기생인지 알고 있는지라 섣불리 말을 걸지는 못했다. 그를 알아본 주인이 부엌에서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아니, 도기녀께서 웬일인가! 어서 안으로 들게."


주막 주인은 연유를 묻지 않고 일단 방에 먼저 들였다.


 "어르신. 오시가 끝나기 전에 저를 찾는 손님이 있거든 방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알았네. 간단하게 뭐라도 뜨시겠소?"

 "아닙니다. 오늘은 잠시 머무를 생각이니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보세요."

 "그래. 그럼, 편하게 계시게."

 "감사합니다. 어르신."


작은 방에 홀로 남겨진 경수는 너울부터 벗어 옆에 놔둔 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며 마음을 추스르려 애썼다. 밖은 장정들이 밥 먹는 잡소리와 이야기 소리에 시끄러웠지만, 창호지 한 장을 사이에 두더라도 방안은 조용했다. 어제 연회에서 동이 터올 때까지 양반들의 술상에 동참했는데 그 여파가 컸던 모양인지 시간이 갈수록 눈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장에 머리를 기대고 선잠이 들어버렸다.







따뜻한 온기와 뺨을 지분거리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아직 잠에 취한 눈을 바로 뜨니 김종인참의의 품 안에 있는 게 아닌가. 지그시 내려 보는 다정한 눈매와 자신의 몸을 얼싸안고 있는 팔은 임의 것인데 오늘따라 꼴 보기가 싫었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모양이로구나."


그가 뭐라고 하든 말든 건장한 어깨에 올려두고 있던 머리를 황급히 들어 올리며 군청색 도포를 가차 없이 밀어냈다. 그리고는 멀리 떨어져 앉아, 방 안의 잘생긴 청년을 노려보았다.


 "왜 이러는 게야. 아까까지는 파고들어 세 살 아이처럼 잘만 자더니."

 "지금 몇 시경 입니까?"

 "글쎄, 오시는 넘었겠지. 치켜뜬 눈을 보아하니 화가 난 모양이로구나. 그래, 날 부른 연유를 말해 보아라."


김참의의 언성은 온화했다. 반면 경수는 명월기 생각을 하자 다시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명월기를 아십니까?"

 "....알지."


그의 얼굴이 곤란한 낯빛을 띄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그게 말이야...."

 "어서 대답하시어요!"

 "내가 석 달 전에 호형호제하는 형님들의 연회에 갔는데 꽤 술에 취했었지. 형님들이 기녀이야기를 하다가 나에게 묻길래 조금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게 책이 되어 나와 버렸다." 

 "조금이라니요. 그렇게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조금이라니요! 영감! 제정신이 십니까?"


흥분하여 경수의 목소리가 격양되자, 김참의는 헛기침을 한 번하고 미소 지었다.


 "경수야, 목소리 낮추거라. 이래 봬도 내가 관직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신 분이 어찌 그리 경솔하세요. 서책의 내용 때문에 주위의 계집들이 수군거리고 있단
말입니다!"

 "너도 남자니 알잖아. 장부들은 원래가 그런 음란한 이야기꽃을 피우기 좋아하는 것을 말이야."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제가 남자인 걸 알고 있는 사람은 행수어른과 영감뿐이십니다. 그렇다면 저에 대한 이야기는 자제해 주셔야죠."

 "내 그 점은 미안하게 되었다. 경수야. 내 면을 봐서라도 이상의 대화는 밤에 하자꾸나. 요정으로 찾아 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오늘 저는 휴일을 받았습니다. 영감을 뵙고 싶지 않아요."

 "그게 무슨 막말이야. 나는 너를 보려고 궁에서 서둘러 나왔다. 미시(오후 1시~3시)가 지나기 전에 들어가 봐야 하니 같이 점심을 뜨자."

 "싫습니다."


경수는 너울을 쓰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손을 부여잡았다.


 "경수야. 너 정말 왜 이러느냐!"

 "잘 들으세요. 다시는 기방에 얼씬도 하지 마세요. 코빼기라도 보이는 날에는 관기가 될 테니
그렇게 알아 두세요."
  

관기는 궁중에 속한 기녀라서 일반인들과 어울릴 수 없고 오로지 왕의 밑에서 일해야 했다. 안 그래도 경수의 명성이 자자하여 궁중연회에 불려가는 일이 많으니 그로서는 오금이 저린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경수는 김종인참의의 굳은 얼굴을 내려 보고는 가차 없이 뿌리치고 밖으로 나와 기방으로 가는 길을 다시 걸었다.


남자로 기생이 되는 일은 수월치 않았다. 그러나 몰락한 양반집 둘째 아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대필이나 기방 허드렛일 정도였다. 어린 나이에, 심지어 양반신분이었던 도령이 기방에 들어가 일하기란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나 부모님과 형이 다 참수형을 당하시고 혈혈단신으로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으니, 꼭 살아남으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지 못해 들어갔다. 그곳에서 행수의 눈에 띄어 남자임에도 숨기고 기생이 되었는데 미모가 뛰어나고 가무가 출중하여 순식간에 일패기생으로 등극, 남자와 몸을 섞지 않아도 기생노릇이 가능해졌다. 모든 공연은 잠자리를 가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성사되며 그럼에도 달려드는 장정은 행수어르신이 알아서 내쳐주셨다.


기생이 되고 싶어서 된 건 아니었다. 그저 노래 부르는 게 좋았다. 예쁜 치마를 두르고 춤을 추는 게 한동안 속상했지만, 자신의 신분을 숨길 수 있어 이제는 편했다. 익숙해지기도 해서 화장 않은 얼굴은 다른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경수가 자신의 두 얼굴이 어색해지고 자괴감에 힘들어 할 때 불현듯 김종인참의가 요정에 나타났다. 자신의 연회에 공연해달라며 찾아와서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 했다. 자신도 한때 양반이었으니 얼빠진 도령들의 상대법을 알고 있었다. 모름지기 선비란 명예를 중히 여기니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약효가 좋다. 경수는 입고 있던 황색 치마를 찢어 글귀를 썼다.
      

 '술상의 계륵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데 어째 선비의 몸으로 헛짓만 골라 하십니까.‘


라고 쓰고 거기에 삼계탕안의 갈비부분을 툭툭 털어 넣어 보냈다. 그러고 나니 다음날부터 매일 밤 김종인참의가 기방을 찾아왔다. 올 때마다 비단이며 귀금을 들고 와서 행주와 다른 기녀들에게 나누어주고 경수에게도 선물했다. 하지만 김참의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답답해진 경수가 찾아가 관직에 있는 몸으로 어찌 명예를 중히 여기지 않고 매일 밤 기방에 들락거리느냐고 화를 내었더니, 그는 '너는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재물을 방탕하게 쓰는 것보다 나의 명예를 걱정하는구나.' 라고 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김참의는 외모가 굵직하게 빼어나고 무술에 능하며 학식도 있었다. 더불어 연회에서는 춤도 꽤 추었으니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의 매력이 이 정도까지라면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진짜 매력은 성격이었다. 사람의 본질을 이해하고 대쪽 같으며 의리와 순정이 있었다. 경수는 그런 성격을 좋아했다. 경수가 남자인 사실을 알고도 변하지 않았고,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훨씬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진정으로 애정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그렇듯 단점은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다 보니 그들 앞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다 해버렸다. 그 예로 명월기가 출판되지 않았는가. 술방에서 기방으로 돌아와 경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소설 속의 명월은 여자 이기는 하나,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저 같았다. 낮이 뜨거워 도저히 더는 볼 수 없어 서책을 장 안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




            
 "아니, 내가 얼굴 딱~ 한 번만 보면 돌아간다고 하지 않느냐!"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나으리. 오늘은 도기녀의 휴일입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느냐?! 나는 형조판서의 둘째 아들 오세훈이야!"

 "알고 있습니다. 나으리. 하지만 지금은 주무시고 계세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었는데 방문 앞이 난리가 났다. 몸종 여실이 막무가내로 안으로 들어오려고 난리인 형조판서의 아들을 막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흰 속곳만 입고 이불 속에 있던 경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얼굴을 비치면 해결될 소동이기에 어둠 속에서 겉옷을 입으려 손을 뻣는데 갑자기 큰 대장부가 손을 잡아왔다.


 "누, 누구시오?"


크게 놀라서 말까지 더듬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익숙했다.


 "나다. 경수야."
                 
방의 창문이 바람에 흔들려 삐거덕거렸다. 그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어 갓 뒤에 숨어있던 김종인 참의의 눈을 빛냈다.  


아침 일찍부터 궁으로 출근한 종인은 직속 무관들과 오시의 중반을 넘길 때까지 훈련하고 기마격구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공을 장시(채)로 퍼 올려 상대 진영으로 말을 달리려 하는데 상대편 무관이 전언을 듣고 달려오더니 지금 당장 궁을 나가보셔야 할 것 같다며 실실 웃질 않는가. 전언이란 걸 들어보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입단속을 시키고 옷만 갈아입은 후, 그 길로 궁에서 나왔다. 평생 잡고 싶은 손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내용으로 봐서는 어지간히 마음이 상한듯한데, 무엇 때문인지 확인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싶었다. 참의의 체면보다 경수가 화가 났다는 게 더 컸다. 안 그래도 지방감사를 나가기 전에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하기에 며칠 낯짝을 못 비추니 얼굴이나 볼까 했는데 겸사겸사 잘 됐지 싶었다.

사거리 주막에 도착해 방안에서 선잠을 자는 고운 얼굴을 마주했다. 안쓰러워서 살짝 팔을 잡아당겼더니 잠결에 온기를 찾아들어 파고들었다. 눈을 감고 있을 때는 그렇게 어여쁘더니 정신을 차리니 여우 눈이 되어서는 명월기를 아느냐고 물어왔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어떻게든 잘 무마해서 넘기고 싶었는데 경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버렸다. 그러고 궁으로 돌아왔으니 국사가 머리에 들어올 리가 있나. 어찌어찌 처리하고 퇴근하는데 친우인 오세훈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발견하자마자 속닥였다. 


 "이보게, 내 긴히 줄 것이 있어 기다렸네. 요 앞 다과 방에서 이야기 좀 하세."

 "오늘은 바쁘니 나중을 봄세."

 "이 사람아, 이런 기회는 또 없네. 오늘 봇짐장수가 집에 왔는데 내가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도대체 뭘 봤기에 이러는가? 나는 자네 때문에 경수와 크게 다투었어! 자네를 보면 화가 난다, 이 말이네."

 "경수? 아! 명월기를 본 게로군?! 아하하하하하! 어떻다고 하든가?!"


명월기는 술자리에 함께 있었던 오세훈이 종인의 이야기를 주워듣고 왼손으로 날려 쓴 책이었다. 그러니 필체가 산만한 게 당연했다.


 "말도 꺼내지 말게나."


크게 웃은 오세훈은 소매 안에서 어디를 봐도 평범한 연꽃무늬 향낭을 꺼내주었다.


 "이게 도움이 될 걸세. 선물로 주게. 나에게 고마워하게 될게야. 경수에게는 명월기에 대한 자조지종을 잘 말해두겠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히죽 웃고 뒤돌아 걸어가는 친우에게서 받은 향낭을 소매 안에 넣고 종인은 본가로 향했다. 마음이야 벌써 기방 담을 넘어 경수의 방에 들어앉아 있었지만 해가 지지 않았는데 요정 출입이라며 못마땅해할 부모님을 생각해 참고 참았다. 드디어 해가 지고 말을 달려 도착한 기방에 웬걸, 벌써 다른 곳에서 한상하고 왔는지 얼큰하게 취한 오세훈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친우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고심하다 결국 기방의 담을 넘어버렸다. 다행히도 방의 창문이 잠겨있지 않아 조심히 열고 들어가니 크게 놀라했다. 문밖에서는 오세훈이 주정을 피우고 있어 얼른 데리고 기방을 나가야지 싶었다.


 "누, 누구시오?"

 "나다. 경수야."

 "김참의? 여긴 어떻게... 혹시 담을 넘으셨습니까?"

 "그래.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그전에 어서 나가자."


종인은 장옷을 집어 둘러주고 손을 잡았다. 조용히 창문을 나와 들어왔던 것처럼 담을 넘어 말에 먼저 안착해 경수를 안아 앞에 앉히고 으슥한 길로 달렸다. 주위의 불빛이 하나둘씩 사라졌고 고삐의 움직임에 따라 말은 천천히 걸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경수가 불안해하며 물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더냐?"

 "김참의와 가고 싶은 곳은 없습니다. 어서 말을 돌려주시어요."

 "이렇게 날이 좋은데 진심이더냐?"

 "진심입니다. 김참의."

 "지방감사를 나가기 전에 훈련에 많아 며칠 아주 분주할 예정인데, 그래도 내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말할 수 있느냐."

 "예? 지방감사라니요."

 "요즘 들어 경기지역 포도대장에 대한 상서가 빈번히 올라와서 비밀리에 순회를 할 예정이다. 그리고 말이다, 너는 그 김참의라든가 영감 같은 정 없는 호칭 좀 그만 부르거라. 도련님이라 부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너까지 나를 대할 때 감투를 씌워 보는 거라면 나는 적잖이 실망할 게야.“

"그럴 리 있겠습니까. 잘 알았습니다. 도련님."


작게 한숨을 쉰 경수는 가만히 말 위에 앉아있었다. 기방으로 돌아가겠다고 매섭게 대답하던 기세는 꺾인 모양이었다. 뒤에서 작은 등을 보던 종인이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도포 소자락 안에서 낮에 친우에게 받은 향낭을 꺼내 하얀 손에 쥐여주었다.


 "받거라. 향이 없어질 때 즈음 돌아올 테니 잘 간직하고 있어라."


두 손으로 향낭을 받아든 경수가 다시 한숨을 흘렸다.


 "어찌 자꾸 한숨을 내쉬는 게냐."

 "저번 지방감사 때는 한 달이 되기 전에 돌아오신다고 하고서는 석 달이나 걸리시지 않았사옵니까...."

 "그러게 첩으로 들어오면 얼마나 좋아. 장기출타 시에는 같이 나갈 수 있고, 알아보는 사람도 없으니 계집 복장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 계속 고집 피우다가 돈으로 팔려가기라도 하면 내 속이 까맣게 탈 것이야."


맞는 말이었다. 학식 있고 격조 높으면 뭐하리. 어차피 기생인 것을. 돈이 될 때는 미루고 미루다 나이가 들어 값어치가 떨어지기 직전에 색을 밝히는 대감댁에 대부분 기생이 팔려간다.


 "나는 이제 스물이고 노총각이니 나에게 시집오겠다 벼르는 여인도 없을게야. 그러니 첩의 신분이라고 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경수는 그의 말에 부정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기생들이 도련님 연회에 불려가려고 얼마나 눈에 불을 켜는지 아십니까? 도련님을 연모해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하는 계집이 장안에 깔렸어요. 일주일 전에 박 대감의 여식이 도련님의 본가에 가락지를 떨어뜨리고 갔다는 소문도 들었단 말이에요."

 "하여간 여인들이란. 그게 벌써 소문이 퍼졌구나. 가락지는 돌려주었다."

 "도련님이요?"

 "나였다면 경수 네가 일주일 전부터 뿔을 냈겠지."


헛웃음을 지은 종인은 말을 나무 풀숲으로 몰고 들어갔다. 밤은 깊었고 주위에는 부엉이와 뻐꾸기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데 자꾸 인적이 드문 장소로 들어가는지라 경수는 불안했다. 그런데 검은 풀 사이로 들어가니 순식간에 시야가 확 트였다. 바람에 진달래 꽃잎이 떨어진 냇물 주위를 넓적한 바위와 우거진 나무들이 감싸 완벽한 별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종인은 먼저 말에서 내려 경수에게 두 팔을 뻗었다. 기방에서 급히 나오느라 버선을 신지 못했으니 고운 발로 거친 흙 위를 딛게 할 수 없었다. 가볍게 안아 들었지만, 춤 연습을 게을리하여 살이 찐 게 아니냐며 농을 건네자 두르고 있던 팔로 목을 조여왔다. 무거운 것 하나 들어 본 적 없었지만 그래도 사내의 팔이었다.


 "경수야! 그만 하거라! 하하하, 내 농이 심했다!"

 "저는 절대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일패기녀 자리를 유지하기가 쉬운 줄 아십니까?"

 "그래, 그렇겠지. 네가 그럴 리가 없지."

 "그나저나 이런 곳은 어찌 아십니까?"

 "이 나라의 산천을 모르면 내가 병조에 몸담은 사람이겠느냐 자신하고 싶지만 실은 친우가 귀띔 해주었다."


그는 바위 위에 경수를 내려놓고 하얀 발이 차가워질까 속곳 치마 속으로 잘 넣어주었다.


 "혹시 오대감 댁 둘째 아들을 말씀하시는 겝니까?"

 "맞다. 명월기를 쓴 놈이기도 하지."

 "참말이십니까? 오세훈 나리께 서요?! 그럼 그 분이 모든 걸 다 아신다는 말이 신가요? 설마
제가 남자라는 사실도 말씀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네가 남자라는 사실은 발설하지 않겠다고 서약했으니 알 리가 없지."

 "서약이라니요? 대체 언제 그런 걸 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너와 밤을 보냈으니 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으냐. 달과 새도 우리를 봤으니 증인도 있겠다, 나는 빼도 박도 못한 서약을 한 게지."


기방도 아닌 밖에서 첫날을 치른 밤이 떠오른 경수는 뺨이 불타올랐다. 그의 끈질긴 조공으로 연회에 불려가 공연을 하고 형조 참판 옆에서 술을 입에 대는데 자꾸 거슬리는 시선 때문에 자리가 불편했다. 아닌 척했지만, 여리 한 선비들 사이에 앉아있는 병조참의 김종인 영감은 한눈에 들어오는 대장부였다. 고된 군사훈련과 실전으로 검게 그을린 살빛 하며 건장한 체구와 잘생긴 얼굴에 연회장의 모든 기생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정작 태양처럼 불타오르는 사내는 어여쁜 일패 기생에게 두 눈을 빼앗겨 술상의 어느 여자에게도 틈을 주지 않았다. 긴장되던 시간이 흐르고 경수가 부담스러워 잠시 바람을 쐬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실이 엮인 것처럼 김참의도 일어나 연회장 뒤편의 정원으로 나갔다.


 '아름다운 연꽃이 저리 지천이거늘 자네의 쓸쓸한 눈은 잡초뿐이네, 그려.‘


달밤과 어울리는 차분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김참의가 뒤따라 붙어있었다. 피하려 나왔는데 더 부추긴 꼴이 되어버렸다. 경수는 무표정을 가장하며 화답하지 않았다.


 '이곳은 이름난 연꽃정원이네. 자네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서 연회를 열었는데 연꽃은 보지 않고 발 앞의 잡초만 보는 게 처량한 것이 어찌 죽사발 한 입도 못한 사람 표정인 겐가.‘

'인생 대부분은 힘들 거나 어두운 시간이 주를 이루게 마련이지요. 그러다 드물게 즐거워지면 그게 행복 아니겠습니까. 여느 때와 같으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영감.‘

'자네의 눈은 여타 계집들과는 달라 그 속이 보이지 않기에 마음이 쓰이는 게 당연지사이지 않겠는가.‘

'영감은 앞이 창창한 분이시니 쓸데없는 것을 아는 일은 거사를 어지럽힐 뿐입니다.‘

'이리 철벽을 치니 내가 더는 할 말이 없네.‘

'귀한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연회가 한창이니 어서 돌아가시어 회포를 푸세요.‘

'어찌 이리 매정할꼬. 내가 자네에게 들인 시간과 공을 생각해서 기녀와 손님으로라도 잘 지내보자 하면 이것도 내칠 것이오?‘

'저는 저기 저 연꽃보다 생기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허울 좋은 껍데기라도 좋으시면 마다하지 않겠습니다만, 기대하지는 마시어요.‘

'이 사람 참...‘


김참의는 그대로 연회장으로 돌아갔고 둘 사이에는 더는 이야기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연회가 파하고 기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 일은 벌어졌다. 아무리 공을 들여 봐야 넘어오지 않겠다 싶어 매우 급한 심정에 그가 일패 기생의 하룻밤 보쌈을 감행했다. 정복욕과 성욕이 올라 너무 급한 나머지 아무도 없는 산 중턱 들판에 무릎으로 찍어 눕히고 옷고름을 풀려 무력 싸움을 하다 기어코 남자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잖이 충격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한번 가버린 정이 되돌아올 리가 있나. 그러하니 방도가 없어 반항하는 기녀를 사내인 줄 알면서 덮쳤다. 남자들끼리는 이렇게 하는 거라 가르쳐주지 않아도 욕구는 자연스레 길을 안내했다. 그때 생각만 하면 경수는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때는 정말 너무 하셨습니다."


고개를 숙인 경수가 작게 투정부리고 달뜬 숨을 내 쉬었다. 그 날의 일을 생각해서 그런가 몸에 열이 오르는데 이상한 것은 아까 말을 타고 올 때부터 갈수록 가슴이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점차 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속곳 바지 안의 물건이 벌떡이는 게 기분이 야릇했다. 하지만 부끄러워서 말도 못하고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네가 날 봐주지 않으니 방도가 없지 않냐. 연거푸어 술을 입에 대어도 취하지는 않으니 화가 나서 배길 수가 있었어야지. 다 네 탓이다. 이렇게 둘이 있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니 내가 매일 널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않느냐."


종인은 속곳 치마를 잡아 냇물 쪽으로 돌아있던 경수의 몸을 저의 방향으로 돌렸다. 그러자 경수가 흠칫하며 몸을 덜덜 떨어왔다.


 "경수야, 왜 그러느냐. 어디 아픈 게야?"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몸에서 열이 나서..."

 "열? 고뿔이라도 걸린 게냐? 어디 보,"


동그란 이마에 두툼한 손이 닿자 어깨를 부르르 떠는 맑은 눈이 눈물에 그렁그렁했다. 놀란 그가 정말 몸이 좋지 않은지 의심할 때 경수가 몸의 무게를 실어 두 팔로 덥 안아오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애처롭게 속삭이는 말이,


 "예뻐해 주시어요. 도련님."


기녀가 흔히 쓰는 애교도 가지지 못한 경수가 이러한 말을 하며 은근히 하체를 아랫배에 비벼왔다. 물건이 작아도 존재를 드러내었으니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등을 안았더니 속곳 위를 스치는 손길에도 반응하여 숨을 가빠했다. 평소 같지 않게 적극적인 자세에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구나 생각하는데 코끝에 친우가 준 향낭의 향이 코를 찔렀다. 이거구나 싶어 속곳 고름을 황급히 풀러 속치마를 치워내고 경수가 애지중지 숨겨놓은 연꽃무늬의 향낭을 찾았다. 손에 잡히자마자 냇물에 집어던지려는데 단정한 손에 손목이 잡혔다.


 "왜 던지시려는 겝니까?"

 "필 시 이것 때문에 네가 제정신이 아닌 게다."
 "네? 향낭이요? 그렇다고 선물을 던지시면 저는 도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어떻게 기다립니까."

 "보아하니 이 향낭은 음란한 마음을 부추기는 향이 들어있는 듯한데, 이것을 가지고 있다가 내가 없을 시에 성욕이 오르면 누가 해결해주겠느냐! 혹시라도 나와의 신의를 저버리고 부정을 저지르는 날에는 내가 직접 네 목을 칠 것이야!"


종인이 상상하기도 싫은 일에 엄한 말투로 경고하자, 경수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좋아했다.


 "그렇다면 저는 향낭을 가지고 있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걱정된 도련님이 한시바삐 달려오실 테니까요. 선물도 받고 임도 놓치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지요."

 "내 말이 농이 아닌 걸 알고도 이러느냐?"

 "예. 제가 자신을 잘 조절 할 터이니, 향낭은 저에게 주시고 오늘 밤은 부디 도련님이 저를 얼마나 애정 하는지 보여주세요."


약간 못 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그였으나, 침을 적신 도톰한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혀의 움직임에 정신이 홀딱 빠졌다. 귀신에 홀린 듯 그의 손이 경수의 속곳 바지 안으로 파고들어 부풀어 오른 고추와 탱탱해진 음낭을 넓은 손바닥으로 그러쥐었다. 그러자, 하아~ 하고 달뜬 신음이 흘렸다. 구름 위를 걷는 소리에 그의 물건도 부피를 달리했다. 경수의 두 손이 그의 나머지 손을 잡고 빨간 얼굴은 도포 깃 안에 묻었다. 만져주는 대로 발끝까지 뻣뻣하게 긴장했다가 괴롭지 않은데 괴로워했다. 그는 품에 안긴 사내의 애끓음에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고운 손을 자연스레 물리고 축축하게 젖어 벌어진 입속에 손가락을 넣었다.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부드러운 혀와 푹신한 두 입술을 마찰시켜 빠는 모습은 볼거리였다. 끈적하게 감겨 마디를 오가는 감촉에 하나로 모자라 또 하나의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그러자 그것 또한 거부하지 않고 받아먹었다. 손안에서 찔끔찔끔 말간 액을 흘리던 물건 끝을 원형으로 둥글게 문질러 주자 경수의 혀가 그 행동을 따라 했다. 뒤에서부터 앞으로 쭉 당겨
내며 훑자, 그것 또한 두 쪽의 입술로 따라 해냈다.


 "도련님...하아..앗, 괴롭습니다...흐읏! 이제 그만, 흐응,"


안 그래도 정성을 들여 손가락을 빼는 모양새가 귀여워서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오늘은 향의 기운도 있고 하니 꼭 뒤를 파고들지 않아도 사정을 할 수 있겠지 싶어 손의 움직임을 빨리했다. 그랬더니 금세 절정에 올라 손바닥 안을 더럽혔다. 그는 풀을 쑤어놓은 색의 띄는 비린 사정액을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핥았다. 경수가 자신에게만 보이는 버릴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연인이 얼굴을 달구고 다음을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며 도포를 잡아왔다. 그러나 김참의는 빙그레 웃고는 품에서 멀리하고는 속옷치마를 입혀주는 게 아닌가. 도련님이 왜 이러시나 정황을 몰라 이도 저도 못하는 사이 그가 먼저 일어나 말에게 걸어갔다.                                   


 "경수야, 잘 듣거라. 향낭으로 네가 나를 시험한다면 사내대장부로서 질수 없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멈추고 다음을 기약하자. 네가 향낭을 가지고 있어도 의를 깊이 새기고 자신을 제대로 추스른다면 나도 그에 보답하겠다."

 "시험이라니요!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다만,"

 "국사에 몰두해야 하는 시점에 나를 교란시켜 혼을 쏙 빼놓으려고 작정을 했는데 그게 시험이 아니고 무엇이냐."

 "도련님!"


종인은 뒤돌아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는 자신의 순정으로 여우 짓을 하려는 경수에게 맞불작전으로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으나 아무리 연인 사이의 재미라도 저만 당할 수는 없는 터. 그러니 사내 대 사내로 누가 더 오래 참나 따위의 쓸데없는 줄다리기 씨름의 줄을 잡았다. 경수는 당황스러워 흰자위를 한껏 드러내며 입을 쩌억 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디 해보려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바위 위에서 일어났다. 김참의가 사내대장부 도경수의 승부욕에 불을 댕겼다.


 "좋습니다. 도련님. 대신 국사를 보시다가 뛰쳐나오셔서 야밤에 저를 보쌈 하는 일은 반칙입니다."


장옷을 두른 경수가 말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게다. 걱정 말거라."


병조참의 김종인과 일패 기생 도경수의 기 싸움이 시작되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