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5월 30, 2015

author's note 5







개인이 진행하는 비싼 데이캠프, 섬머캠프가 있는 가하면 공립 도서관이나 아카데미에서 시행하는 무료 겨울나기 프로그램도 있는데 그와 내가 들어가야 할 곳이 바로 그런 행사를 비롯한 여러 키즈관련 이벤트를 진행하고 알리는 커뮤니티였다. -말은 유창하지만 한국 부모들이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과 크게 차이는 없다. 단지 한국에 비해 여가활동에 더 치중되어 있는 편이다.- 공립기관에서 시행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절대 퀼리티가 떨어지는 게 아니며 무시로 미국 어느 지역보다 뉴욕의 교육제도는 수준이 높은 편이다. 특히 저소득층 흑인들이 밀집해 거주하는 할렘은 그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125가 역에 내려 역 계단을 오르는데 그의 얼굴이 몰라보게 굳었다. 깨닫고 돌아본 주위의 풍경에 나 또한 멈칫했다. 넓은 대로. 많은 사람. 정확히는 봇물같이 쏟아져 넘실거리는 흑인들. 낡아 보이는 가게가 즐비한 가운데 서 있는 고층빌딩 몇 개.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지 싶을 정도로 낯설고 날이 선 풍경이다. 나치군인 옆에 서 있는 유태인보다 확연히 차이 나는 생김새의 다름은 잘못한 게 없어도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외투 주머니에 넣고 있던 그의 양손과 온몸이 경직된 게 한눈에 보였다. 관찰하는 나의 시선이 따가운지 모르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발로 걸어 도착한 곳은 마틴 루터킹 아카데미 & 아트 뮤지엄이었다. 그는 들어가길 망설여 했다.


 "안 들어가?"
 "......"


입술은 쭈뻣이고 운동화 끝으로 죄 없는 시멘트 바닥을 찬다. 들어가기 싫다고 외치는 회색빛 아우라가 무섭게 꾸물거리며 목덜미를 스쳤다. 그래도 안 들어 갈 수 없는 거니까 그의 등을 떠밀어 마지 못해 반투명 유리문을 어깨로 밀었다. 타닥탁 운동화 끄는 소리를 달고 들어 간 건물 안 1층은 갤러리였다. 유명 흑인 아티스트가 그린 그림이라고 보이는 몇 점이 보기 좋게 걸려 있었다. 안내 데스크에 서 있던 풍채 좋은 흑인 아주머니가 어떻게 오셨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아, 저기, 윌링턴에서 봉사활동 때문에 왔어요. 여기."


내가 그녀에게 추천 서류를 내밀었다.


 "아, 연락받았어요. 당신들이군요! 이 서류는 본인이 직접 지금 안내해 드릴 곳에서 만나보실 담당자에게 드리면 돼요. 저는 티나 할로우입니다. 티나 라고 불러 주세요."
 "네. 미세스, 티나. 저는 경수고 얜 죠 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죠? 글쎄, 죠 라는 이름을 가질 분위기가 아닌데요? 난 '카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예전에 내가 알던 할아버지의 이름이 '카이'였는데 그와 굉장히 비슷한 카리스마를 가졌어요. 당신이 마음에 드네요."


심한 곱슬머리를 가진 티나 는 나이가 들고 뚱뚱한 아주머니 축에 속하는 외모였지만 푸근하면서도 매혹적인 미소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앞으로의 그의 인생에 획을 그을 '카이'라는 이름을 그에게 던지고 그녀는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생전 처음 얼굴을 대하는 사람이 준 이름에 전혀 거부감이 없는 듯 했다. 그의 어깨와 다리가 보기 좋을 정도로 풀렸다는 사실을 본인은 모르는 듯했으나 나는 그 순간을 생생하게 느끼고 아직껏 기억하고 있다. 익숙함이 뭐더라. 자연스러움이 뭐더라. 이것이 꼭 많이 부대껴보고 교환하고 나눠서 토해 내는 산물이었던가. 시간에 비례하는 익숙함과 자연스러움도 있겠으나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평소대로였다면 너무나 긴장했어야 할 그 같지 않게 티나를 받아들이는 걸 보는 나는 만족했다. 그녀는 가장 낮선 곳에서 팽팽하던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우리의 조력자임이 틀림없었다.


티나는 우리와 함께 담당자의 사무실로 같이 걸었다. 도중에 기초지식 파일을 읽어 왔냐고 물었다. 이틀 전, 우리가 만날 아이에 관한 주요사항을 적은 몇 장의 안내서를 로빈 교수님에게서 받았다. 물론 숙지했고 적힌 내용이 사실일까 많이 궁금했다. 그는 종이를 받아들고 읽으며 온갖 인상을 지어 보였다. 복잡 미묘한 표정을 다 읽을 수는 없었어도 동감은 할 수 있었다. 책방에 가면 이런 게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원작자의 상상에 의해 창작 된 소설. 나는 내가 읽은 아이의 프로필이 허구소설 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고 싶었다. 담당자는 흑인남자였고, 한마디로 말하면 냉소적이었다. 그는 간단히 주의사항만 말하고 바로 티나 에게 우리를 맡기다시피 했다.


 "요즘 인사 관련 문제 때문에 담당자의 신경이 날카로워서 그러니까 이해해줘요. 아, 저기 벽에 붙어서 앉아 있는 게 '백현'이에요. 작아도 눈에 잘 띄죠?"


그녀가 커다란 창문 안의 남자 아이를 가리켰다. 서류에서 5살이라고 봤던 아이는 확실히 작았다. 성별에 상관없는 긴 팔 티셔츠에 바지와 더불어 얼굴이 갸름하고 선이 가는 몸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 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끝이 쳐진 눈꼬리의, 무릎은 모아 안은 백현이가 확연히 구분 되는 건 같은 클래스의 20명 남짓한 모두가 검은색 살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지만, 이전에 그와 억지로 쇼핑을 나갔을 때 사 먹었던 흰 마쉬멜로와 진갈색 초콜릿이 마블 된 아이스크림 같았다. 웃으라고 이렇게 말한 게 아니라 표현력의 문제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아무튼, 곧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의 눈코입의 생김새가 제각기 다를지언정 보여 주는 감정은 같았다. 무기력, 그 자체였다.


 "주의서에 있던 백현이의 프로필을 읽어봐서 알겠지만, 시설을 옮기려고 해봤는데 본인이 싫어해서 여기 두고 있죠."
 "왜 싫어하는 거죠?"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내가 물었다.


 "엄마가 이 근처에 살거든요. 떨어지기 싫겠죠."


아이의 엄마라 함은, 서른일곱의 한국 여성이고 흑인 남자와 재혼을 해서 살고 있었다. 프로필 상으로 주소는 할렘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위험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위험지역에 산다는 건 수입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말이며 그에 따른 아이의 신변이 불안정하다는 뜻이다. 이쯤에서 보기 힘들었던 게 부모의 구타 경력이었다. 숫자로 명시된 횟수만이 아닐 거라는 추측에 백현이를 보는 나는 기분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가능하면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공립 유치원에 갔다가 다른 아이를 때리는 사고를 내고 여기 들어 왔는데 이번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요. 아동 전문 상담사에게 보이기도 했는데 그들에게도 별 반응이 없어서 경수와 카이에게 맡겨보려고 해요."


아무렇지 않게 그를 카이 라고 부르며 우리를 향해 웃는 티나의 눈빛은 신뢰와 기대에 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런 마음을 우리가 채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불안했다. 아무리 곁다리로 끼어든 거라지만, 특수아동을 피부로 접해 본 적 없는 나로는 나름 중책이라 여길만한 봉사활동이었기 때문이다. 부담감이 컸다. 유리창 안을 바라보던 내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양쪽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조용히 아이를 보고 있었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관찰에 가깝게 하나하나 뜯어보던 그의 한쪽 손이 유리창을 짚었다.


나는 눈먼 소녀를 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생일선물로 사주신 365장의 세계적인 명화의 사진이 인쇄 되어 있는 달력에서 화사한 색감과 함께 튀어 나 온 여린 소녀는 들판의 어디쯤에 동생과 앉아 눈을 감고 비가 지나간 뒤의 특유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공기만 들이켜는 게 아니다. 앉아 있는 곳이 어디인지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향으로 만져 확인하는 언니의 옆에 앉은 동생은 손을 잡고 뒤편, 무지개를 보고 있다. 그 자세가 무지개가 어떠한지 설명 해 주는 듯 했다. 나는 이 상황에 존 에버릿 밀레이의 '눈먼 소녀'가 머릿속에 그려진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세상을 눈으로 보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다. 그래서일까 외형으로 많은 판단을 내린다. 밑도 끝도 없는 끌림과 애잔한 사랑을 보다 살인적인 혐오마저 느낀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눈은 어떨까? 그 둘이 주는 결과물은 같을까? 나는 다르다고 알고 있다. 쌍꺼풀이 짖은 눈에 담긴 표정이 아이에 대한 동질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눈먼 소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게 김종인 말고 누가 있겠나 싶었다. 그에게 교수님이 있었던 것처럼 백현이에게 종인이가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하고 기대했다. 그걸로 답은 나왔다. 나는 백현이에게 종인이를 어서 빨리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지금 들어가 봐도 될까요? 미세스 티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내가 물었다.


 "그럼요! 지금 자유시간이에요. 이왕 가는 들어가는 김에 간식도 들고 가서 친해져 보세요."


우리는 그녀를 따라 키친으로 가서 간식박스를 챙겨 들고 교실의 문을 열었다. 삼삼오오 모여 장난치고 떠들던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잦아들고 우리에게 관심이 몰린 여러 개의 눈이 호기심에 가득 찼다.


 "안녕, 여러분!"
 "안녕하세요! 티나 선생님!"
 "오늘 자유시간에 친구들이 찾아왔어요! 여기 이 귀여운 두 보이의 인사를 들어 볼까요?"
쭈뻣거리는 폼이 먼저 소개를 할 거 같지 않아, 내가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경수입니다! 다 같이 친하게 지내요!"
 "...."
 "...종인아, 인사."
 "....."


그는 첫 만남 때처럼 입술을 떼지 않았다. 이럴 때가 언젠가 올 줄 알고 있었다. 했나 안 했나 이리저리 뜯어 봐야 하는 인사가 아니라 제대로 자신을 소개 해야 할 날이 말이다. 물론 나를 만나기 전에도 이런 순간은 있었겠지만, 성격적 결함이 있다는 이유로 안일하게 넘어 갔겠지 싶다. 그래서 이럴 때를 대비해 집에서 연습해 둔 게 있다. 온종일 쏟아 붓는 엄청난 장대비 때문에 집에 있게 된 어느 날 저녁, 닭다리를 여러 개 꺼내 손질을 하는데 그가 냉장고에 머리를 기대고 섰다. 비린내를 없애려고 우유에 재워두는 걸 유심히 보던 나른한 눈이 조용히 나를 훑어보았다.


 '뭐야. 뭐 할 말 있어?'
 '으음...아,아..니...'


끝을 흐리는 게 아닌 게 아닌 거라 할 말이 있으면 쳐다만 보지 말고 말을 하라고 다시금 재촉했다. 솔직히 이런 식의 눈길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때마다 뚫어질 것만 같은 기운을 느끼는 게 대부분이라 왜 쳐다보는지 모르겠고 내심 불편했었다. 그런데 익숙해지다보니 의외로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냄새, 행동이 익다보니 확실히 둘만 있는 게 편해졌다. 그럼 조금씩 훈련을 해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채소를 자르는 칼에 힘이 들어간 걸 봤는 지 그가 흠칫 했지만 모르는 척 했다.


 '매,매,'
 '응. 맵게 만들 거야. 아주 맵게.'
 '그러,지..마, 마..아.앗,어,'
 '내가 만드는 거 맛없다고 하는 사람한테는 안 줄 거야.'
 '....'
 '마켓 아주머니한테 인사 안한 사람한테도 안 줄 거야.'
 '......'


일부러 보지 않아도 두꺼운 위아래 입술이 오리 주둥이만큼 튀어나왔을 거였다. 그래도 우리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멀뚱멀뚱 서 있는 거 보다는 이 기회에 억지로라도 가르쳐 보는 게 났겠다 싶었다. 닭 다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 잡내를 제거하고 보란 듯 미리 만들어 놓은 묽은 양념장을 들었다. 다른 손에는 고추장을 듬뿍 뜬 숟가락을 들었다. 나의 행동 때문에 잘 생긴 이마에 주름이 쫙 잡히고 집게손가락의 손톱이 아랫입술로 향했다. 빨간 고추장과 그릇 안의 간장 양념장을 번갈아 보는 눈동자가 바쁘다.


 '인사 잘할 거라고 약속하면 매운 거 안 넣을 게.'
 '나,나,이,이인사,자알,해에...'
 '아닌 거 같은데~'
 '나, 자알해에~'
 '잘 들어, 김종인. 앞으로 인사 하라고 할 때 안 하면 이거를 막 두 번 세 번 넣을 거야. 무슨 말인 지 알겠지? 너무 매워서 너는 닭!다!리!를 못 먹을 거라는 말이야. 알았어?'
 '어....'
 '어? 대답하는 거봐. 닭!다!리! 안 먹고 싶은가 보네~?'
 '아,알았어!'


비장한 표정으로 급히 대답하는 게 어찌나 웃긴지 배를 잡고 크게 소리 내 웃고 싶었지만 이를 꽉 물고 참아야 했다.


 '어떻게 인사 할 건데? 지금 해봐.'
 '지,지..그..음? 시,시러.'
 '싫으면 이걸 여기다가 너,'
 '아! 아! 알아,았어!'
 '그러니까, 해보라니까.'
 '...아,안녕하...세에..요, 기...기임 종,조옹이,인 입니...다...'
 '너 오늘 닭다리 하나 먹을 때 그 말 한 번씩 하고 먹어. 알았지?!'


억울한 눈 끝이 확 찢어져서는 체스경기에서 상대방의 반칙에 패한 만 양 씩씩거리는 콧김이 뜨거워도 절대 굴하지 않고 인사연습을 시켰다. 그러니까 지금 그를 올려보는 내 무언의 압박을 잘 알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예상대로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아이들을 둘러 본 후, 입을 열었다.


 "아...안녀..엉 하세에요...조....카아이입..니다..."


어색하게 손을 슬쩍 올렸다 내리고 나서 사지가 굳어서는 눈을 내리 깐 모습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수십 년간 자신의 감정이 만들어 버린 벽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을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비록 덜덜 떨고 있어도 싸웠고 값지게 승리했다. 나는 그가 자랑스러웠다.


"카이랑 경수가 간식을 나눠 줄 건데 받으면 뭐라고 해야 하죠?"
 "고마워요!"
 "맞아요! 재밌게 놀고 있어요, 여러분!"
 "네에!!"


자유분방한 대답 소리에 깔깔거리는 웃음과 아이들만이 아는 잡담이 섞였다. 티나 는 싱긋 웃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실을 나갔다. 신기하게 크게 낯가리는 아이가 별로 없어 간식을 받으러 나오는 줄도 자기네들이 알아서 잘 서서는 사과와 작은 스낵봉지 그리고 우유를 받아들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걔 중에는 나는 이름이 뭐라고 해요 라든가, 되게 하얗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어디에서 왔어요? 라고 질문을 하는 아이도 있고 옆에 앉아서 사과를 베 먹는 애가 있는 가하면 미국식 쌔쌔쌔를 하는 여자애들도 있고 친구와 수다를 떠는 애,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백현이가 있다. 백현이는 간식을 받으러 나오지 않았다. 앉아 있던 구석에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쭈그리고 있었다. 나는 아까부터 그가 백현이를 힐끔거리는 걸 눈치 채고 있었기에 옆구리를 쿡 찔렀다.


 "빨리."


나의 가벼운 재촉에 그는 조심스레 간식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백현이에게로 걸었다. 멀어지는 넓은 등을 약간은 걱정스럽게 지켜보는데, 양 갈래 곱슬머리의 흑인 여자아이가 걸어왔다.


 "굥수! 굥수! 나랑 그림 그리자!"
 "그래! 좋아! 하자!"


슬쩍 곁눈질한 한쪽 구석에서는 덩치만 커다란 아이와 몸 마저 작은 아이가 벽에 붙어 앉아 있었다. 핑크색 콘크리트 벽과 등 사이에 풀이 발라져 있는 듯 서로를 보지 않는다. 바로 옆에 성인 남자가 앉아 있으니 신경이 쓰일만 한데 아이는 연약한 고개를 박아버렸다. 그런 새 친구의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앉아있던 그가 어느 순간 양팔로 무릎을 끌어 안았다. 백현이가 취하고 있는 자세였다. 아이들의 탁자에 턱을 괴고 육지에서 떨어진 섬을 보는 기분으로 주시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흑인 아이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내 관심이 자기에게 있지 않아 뚱한 표정이였다. 나는 환하게 웃어주고 여아이를 달래느라 둘의 사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들과 놀다 문득 생각나 고개를 들고 둘을 찾았을 때는 구석 테이블에서 둘 다 열심히 그림 그리기에 열중 해 있었다. 백현이가 쥔 거친 오일 크레파스가 조심스헙게 도화지에 색을 입혔다. 연하고 작은 손이 검정 크레파스를 잡고 놓치 않았다. 옆에 앉아 있던 그는 딱히 이유에 대해 묻지 않고 아이보리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더니 자신의 앞에 있던 종이에 무언가를 그려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얼굴이 그려졌다. 하얀 피부에 눈이 크고 빨간 입술이 통통한....


"이거 굥수다! 굥수!"
"맞아! 굥수!"
"와! 귀여워!"


그의 주위에 몰린 아이들 모두가 나와 똑같다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삐뚤한 선이긴 하나 아이들의 말은 맞았다. 놀란 눈으로 그의 등 뒤에서 도화지를 응시하는데 큰 어른 손이 그것을 덮어버렸다. 손의 주인은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이들이 정답을 맞춰서인지, 아니면 그림을 못 그렸다고 생각해서 인지에 대해 나는 깊게 궁금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눈치를 보는 눈동자가 이따금씩 나를 향해 있는 이유는 내 얼굴을 그렸는데 본인이 봤으니 그저 부끄러우니까 그렇겠지 정도로 짐작 할 뿐이였다.


"나도! 나도 굥수 구릴꼬야!"
"나도! 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아이의 마음이라더니 갑자기 다들 나를 그리겠다고 성화였다. 어떤 아이의 도화지 위에서 나는 빨간 살갗을 했고, 또 다른 아이는 검은 자위를 개구리 만하게 그려냈다. 저마다 '도경수'를 투영하는 눈은 달랐지만 틀림없이 따뜻하고 순수했다. 어쩌다 내 얼굴 그리기 대회가 되어 버렸는지 모르지만 모두가 즐거워해서 그냥 좋았다. 한편 나는 그의 옆모습을 그리기로 했다. 투박한 굴곡을 지닌 이마와 코 그리고 턱은 척척 그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늘색 크레파스를 집었다. 굵은 선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사이, 백현이는 티끌하나 없던 흰 도화지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줄어만 가는 흰 종이는 빈큼없이 매워져가는 검정에 묻혀 이내 먹지로 변했다. 그제서야 백현이의 손은 멈췄다. 나는 여러가지 의미로 이미 굳어있었다. 어찌할바를 몰라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그는 마치 심연을 뚫을 것 처럼 미동 없이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백현이를 보았을 때, 나는 아이가 쥐었던 크레파스의 색이 단순히 검정일리 없다고 느꼈다. 어쩌면 언어로 설명 해낼 수 없는 저 밑바닥에 있는 색이리라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래봐야 열살도 되지 않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 지 나는 모른다. 나 또한 열살일 때가 있었으나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외로움과 그에 따른 서러움은 없다. 그런데 백현이는 달랐다. 감당 할 수 없이 요동치는 고독은 선명하게 남아 그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 죽기 전까지 괴롭힐 거라고 내 직감이 말해주었다.  나는 고독의 조건을 모른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발현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혼자 있으나 군중 속에 있으나 고독은 찾아오고 결론은 같다. 의식이 점점 내려가다 정신과 육체가 감각을 잃고 사라져버리고 만다. 떄때로 울지도 못한다. 내가 이미 그 곳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램브란트의 '명상에 잠긴 철학자' 라는 그림에서의 철학자가 제목 그대로 명상을 하고 있다고 말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명상을 떠올리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어둠 속의 철학자는 바로 옆 창문으로 들어 오는 환한 빛을 인지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건 내가 본 아이와 같았다. 백현이가 눈을 감은 것과 뜬 것이 뭐가 다를까. 어차피 아이의 세상은 도처의 빛을 모른 채 표현 못 할 고립이라는 잎사귀로 곂곂이 싸여 출구는 커녕 틈도 없어 보였다. 떠오르는 그림이 주는 인상에 가슴이 서늘했다.

        


댓글 21개:

  1. 쭉 읽어봤는데 글 정말 잘쓰시는것같아요 중간중간에 색채에 대한 묘사나 감정 표현같은게 참 좋아요 종인이가 마음을 많이 연것같아서 흐뭇하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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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음 더더더더더 열어야 할거 같아요 아직 손도 못잡았는.....ㅠㅠ 칭찬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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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도 미국 대학다녀서 여럿 부분은 공감하면서 봐요...♥ 글 분위기 너무 예쁘고 경수도 너무 예뻐요ㅠㅠ 6편 이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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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시군여!! 그렇다면 상상이 잘되서 더 이해가 되시는게 많으시겠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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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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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종인이가 경수에게 마음을 열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읽는 내내 입이 귀에 걸려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이런 소재를 좋아하는데 제 취향을 어떻게 아시고..ㅎㅎ 잘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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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읽어주셔서 감사함미다! 이런 소재는 저도 좋아해요 쓰다보면 맘이 질간질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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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종인이를 보다보면 유난히 앨런 튜링이 생각나요. 천재지만 사회적이지 못했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에게 마음을 열고 하는 모습이 겹쳐보이는 느낌...글이 진짜 잘 읽혀요. 갈색 종이에 담긴 내용이 영사기를 통해 눈앞에 보이는 기분이에요ㅎㅎㅎㅎ 다음편 기대하고 있겠습니당ㅎ0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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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저도 최근 이니그마라는 책을 봤어요 재미있더라구요 저는 수학을 못하지만 수학자의 고뇌를 존경해서 언젠가 꼭 캐릭터를 만들고 싶엇어요 이글은 2014년 여름에부터 쓴 글이고 그때는 앨런 튜링님이 이러케 유명하지 않았는데..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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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 튜링머신때문에 대충 알고있기는 했눈데 영화때문에 많이 알려진거같아요ㅎㅎ 설정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저랑 비슷하게 떠올린 분들이 있었나봐요ㅎ0ㅎ 경수랑 종인이가 점점 가까워지는 묘사가 너무 좋아요 잘읽구있어요ㅎ0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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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있었나봐요 저거 의문문....! 댓글수정이 안되네요9ㅅ9.... 아무튼 글 너무 좋아요!!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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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실은 글에도 나온 페렐만교수의 다큐를 보다가 떠오른 캐릭터에요 그와 닮으면 무슨 사고를 할까에 대한 고찰을 하다가 만들엇거든요 암튼 ☺️감사해요!! 열심히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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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좋은작품 알게되서 정말 기뻐요.보는내내 한순간도 흐이름 깨진적없이 집중되고. 마음 열어가는 종인이가 너무 귀엽네요. 백현이가 이야기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 인물인지, 경수가 말한 그 '카이'가 , 종인이가 어떤 인물이 될지, 12년 이라는 시간이 궁금해요! 이렇게 문체부터 이야기까지 흥미있는 작품은 굉장히 오랜만이예요 다음편 너무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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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좋은 작품이라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고민하면서 쓸게요 공금해해주셔서 감사하고 또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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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뿌에 5편이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꿈아니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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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아진짜 굥수그리고 가리는거뭔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사랑스러워으윽..으으윽...으으윽...(심장붙잡 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ㅡ흐윽 백현이는 무슨 사연이있길ㄹ ㅐㅠㅠㅠㅠㅠㅠㅠㅠ종이를 김으로 만들어ㅓㅂ린거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오 빨리 6편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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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6편 드릴게요.....(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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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오늘 처음 봤는데 소재도 특이하고 뻔하지 않아서 좋은것같아요!! 다음편 기대하겠습니다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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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ㅜㅜ세상에ㅜㅜ이번편은 저에게 너무 충격이에여ㅜㅜㅜ배큥이가 대체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랏길래 아직 어린애기가 저렇게도 심리상태가 불안정한지ㅜㅜ...검은 도화지라뇨ㅜㅠ ㅎㅏ..ㅜㅠ개인적으로 죠닌이랑 배큥이가 서로에 의해, 그리구 경수의 보살핌 아래 마음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무뎌지길 바라는 바입니다ㅜㅠ아 이번편은ㅜㅠ생각을 많이 하게되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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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렵네요 백현이는..ㅋㅋ 앞으로 좋은 방향으로 가야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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