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6월 27, 2015

밤에








이유 없이 강가로 걸어가고 싶어졌습니다. 다음날 비가 오려는지 습기 찬 공기가 감겨와 숨쉬기 버거웠지만, 모래밭 길을 걸어 집에서 좀 떨어진 강에 도착했습니다. 야밤이었는데 옷을 갈아입지 않아 교복 그대로였어요. 교복이란 게 어차피 한 종류여서 검정 기지 바지에 흰색 포플린 셔츠에다가 맨발에 때 탄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더랬죠. 강가에 닿아 낮에 봤다면 푸르렀을 수풀 위에 앉았습니다. 엉덩이 밑에 밤벌레가 깔려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어요.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반딧불이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풍경에 혼이 빠져서 신경을 쓸 틈이 없었거든요. 워낙에 사람에 관심이 없어 그런지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는 음악 선생님보다 그네들이 백배는 더 영롱하더군요.


여름이 펼쳐주는 환상에 취해 휘파람을 불뻔했습니다. 입술을 모았는데 번뜩 도서관에서 보았던 소설책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물 주위에서는 휘파람을 불지 말라. 그곳에서 죽은 영혼이 나온다더라. 이런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7년 동안 비슷한 것도 보지 못해서 나는 귀신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게 확실했습니다. 게다가 소설은 영국에서 건너온 번역 책이였으니 양놈들의 미신이 뭐 대단하다고 되내어야 하겠느냐마는 조심이라는 단어가 나쁘지 않아 귀를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대신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흔들었습니다. 뭐라도 해야 할 사람처럼 말입니다. 사방을 촘촘히 감싼 어둠 안에 피어난 생명이 알게 모르게 소리를 내고 있었으니까요. 


그들과 하나가 되고자 했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무법자였습니다. 풀씨에 횡포를 부렸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개의치 않고 연약한 풀을 단단한 나뭇가지로 툭툭 치는데 오른쪽에서 강물이 첨푸덩 쏴악거리더니 철벅 철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 급히 두리번거리니 검은 형체에 달린 사지가 익숙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수많은 반딧불이 똥구멍에서 나오는 빛에 젖은 뒷모습이 비쳐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구나! 알았지요. 남자는 필시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젖어있을 겁니다. 후덥지근한 여름이 아니었다면 곤란한 지경이었겠죠. 입고 있던 젖은 옷을 벗어 던지는 소음이 났습니다. 곧이어 풀잎이 구겨지며 부스럭했습니다. 소리의 거리로 보아 남자가 꽤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몇 번의 소음이 들렸습니다.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싶어 존재를 알려야 하나 진실로 고민하고 있을 때, 연기가 밤하늘로 타오르며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습니다. 그건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봐서 예상했던 담배 그러니까 유행하던 도라지 담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생전에 끊이지 않고 피던 거라 잘 아는데 그거와는 다른 살아있는 풀떼기를 태우는 악취였어요. 얼른 손을 들어 코와 입을 동시에 막았습니다. 괜히 나왔다 생각했죠. 후회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다리에 힘을 주는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한대 줄까?"


다분히 나를 의식하고 한 말이었을 겝니다. 차분한 말투는 내 몸을 경직시켰습니다. 정말로 꼼짝 할 수 없었습니다. 숨마저 속으로 감추어야 했죠. 아시다시피 밤이라 보이지 않을 텐데 머리를 미친 듯 흔들었습니다. 등에서 나는 식은땀이 허리까지 흘러나가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몇 개의 긴 풀 사이로 언뜻 본 남자의 눈은 달빛에 빨갛게 광을 발했습니다. 조용하고 은은한 빛을 흠뻑 씌어 머리카락조차 그 빛과 닮아있었습니다. 나는 말입니다, 살아생전 이런 남자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평소 행동반경이 좁지만, 만약 친우와의 대외활동에 도가 튼 마당발이라 해도 이런 이는 못 만나 보았을 거라 장담합니다. 중년이건 장정이건 전쟁의 군인으로 징집되어 동네주민이라고는 스무 명 남짓한 시골에서 나가지 못하고 새로움에 목말라하던 나에게 딱 맞는 만남이다. 머리로 외치고 있었으나 워낙에 무서워야지요. 토악질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팔 다리가 굳어 주저 없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여기는 왜 왔어?"


남자가 물었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거하게 침을 삼키고 용기를 짜내어 입을 열었습니다.


"자는데, 갑자기 강가에 오고 싶지 않소. 그래서 내 와봤소. 당신은 강에서 물질이라도 한 거요?"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에 쭈뻣거리는 눈길을 주고 물었습니다. 답답하게도 남자는 어디에서 꺼냈는지 모를 종이에 마른 잎을 가로로 넣고 손가락으로 말아 양 끝을 엄지와 검지로 꾹 눌러 돌렸습니다. 그러더니 입술에 끼웠죠. 다음에야 느릿한 말이 나왔습니다.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게 뭐야?"


대답일 줄 알았으니 이걸 듣고 반문 할 뻔 했지요. 하지만 더는 묻지 않고 답하기로 했는데 딱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더군요. 쑥이 잔뜩 들어간 못생긴 개떡에 동치미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싶다가도 커다란 무쇠솥에 찐 염소다리 고기를 소금에 찍어 뜯어먹으면 맛있겠다며 망설이다 결국 훈이네 밭에서 서리한 꿀 수박 한 덩이에 만족한다 했습니다.


"국수는?"


솔직히 국수는 떠오르지 않는다 했더니 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고 있던 담배인지 모를 종이 쌈을 두꺼운 손가락 사이로 옮기고 그와 나를 간간이 가리고 있던 풀가지를 다부진 팔로 쳐냈습니다. 하릴없이 꺾인 풀은 바닥에 엎드려버렸습니다. 남자는 벌레의 깜빡이는 빛을 탓하고 싶게 만드는 나신이었습니다. 사랑마저 규격이 있는 게 세상이라던데 그는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종류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같은 남자의 다른 나체는 꽤 충격이었습니다. 처음이었으니까요.


"같이 가자."




                                                   (all rights reserved by @2500won)



달빛 머금은 손이 나의 뺨을 스쳐 관자놀이로 흐르는 땀방울을 훑고 차갑게 식혀주었습니다. 가지처럼 뻗은 폐의 핏줄이 막혀있다가 터지며 뻥하고 뚫려 안도의 한숨을 쉬어버렸죠. 혈관 안의 피가 대차게 감각을 전달했습니다.


남자는 구름처럼 미소 지었습니다. 숨 막히는 부드러움이 나를 천천히 압도해서 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죽음이란 게 이런 걸지 모른다 생각했습니다.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잠식하는 순간은 다시 못 올 쾌락이라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군요. 타인을 위해 붙잡고 있던 삶의 끈이라는 명분은 사라졌습니다. 지워진 책임감은 나 자신을 원하는 곳에 둘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남자가 누구이고 왜 나를 이렇게 만드는지 물결에게 물을까요, 아니면 저 별이나 더운 바람을 붙잡고 물을까요. 글쎄요. 어느 쪽이든 부질없는 짓이겠지요.
나는 같이 가자는 남자의 두 팔에 폭 싸여 안겼습니다. 두 발이 지면에서 떨어질 때 고무신이 벗겨졌는지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전하게 안겨있음에도 자꾸 뒤가 켕기더란 말입니다. 꽉 차는 평온을 갉아먹는 이름이 지독하게 따라와서는 할퀴고 때리며 울부짖는데, 하도 시끄러워서 가슴의 불안이 골격을 드러냈습니다. 이름은 점점 크게 들려왔습니다. 남자도 들릴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저 어디쯤을 보는 턱 끝은 조용히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를 따랐습니다. 사람이 있더군요.


나는 저 이를 알고 있습니다. 다부지고 당찬 실루엣을 잊을 수 없지요. 사내란 사내는 다 일본과 러시아로 강제집영되는 마당이니 녀석도 끌려갔다가 병에 걸린 날 간호하겠다며 기를 쓰고 살아 돌아온 끈질긴 놈입니다. 자기도 다리를 다쳐서 쩔뚝이면서 무슨 여유로 나를 돌보겠다는 건지 혀를 찼었더랬죠. 그래서였어요. 돌아보게 되는 연유 말입니다. 인사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나는 남자에게 내려달라 부탁했습니다.


"다시 올 거니?"


그러고 싶었습니다. 다른 날 밤에 또 오면 남자를 볼 수 있다는 일이 얼마나 멋진지 모를 겁니다. 두 번 다시 못 마주치는 건 죽기보다 싫더군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습니다. 그리고 빨려가듯 녀석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주저하지 않았어요. 그럴 이유는 없었죠. 남자는 또 만나게 될 것이고, 저 녀석은 울면서 나를 부르고 있더랍니다. 아이의 눈물이 내 육신을 축축하게 적셔낼 기세였습니다. 저놈은 왜 날 저렇게나 불러댈까요.


"형! 경수형!! 일어나봐! 형!!"


어지러웠습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게 흥건했어요. 안 그래도 힘이 없는데 쉬지 않고 흔들어대는 통에 저절로 오만상이 찌푸려지더군요. 겨우 눈만 떴습니다.


"형! 정신 들어? 놀랐잖아!"


녀석의 검은 머리카락을 타고 짠물이 입술 사이로 툭툭 떨어집디다. 얼마나 다급해 보이던지 왜 그러냐고 한마디 했습니다.


"왜 그러긴! 뒷간 다녀왔는데 형이 숨을 안 쉬잖아! 얼굴은 하얗게 질려가지고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고!"


골이 흔들리게 화를 내는데 내가 아픈 건지 놈이 아픈 건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무언지 모르게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강을 보러 갔었는데 어떤 남자를 만났고 너를 멀리서 보았다 했더니 펑펑 울더군요.


"...종인아, 그만 울어."


갈라지는 내 목소리가 연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늘어진 몸이 참으로 쓸모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몸을 녀석은 항상 소중하게 아껴서 미안해졌어요. 나를 끌어안는 팔뚝에 오른 힘줄이 살아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걸 지긋이 관찰하는 게 어찌나 좋던지. 오늘 밤은 살아야겠습니다. 내일 갈게요. 당신에게는.







카디전력 2015.6.27

김참님 감사합니다.

댓글 7개:

  1. 헉..죽을뻔 한걸 종인이가 살려준건가.?꿈에서 사람 따라가지 말라하잖아여ㅠㅜ갑자기 그게 생각나서 오한이...ㅠ 그런데 저 나신의 남자도 종인이 같기도 하고 8ㅅ8 그림까지 같이 있으니까 진짜 문학작품 같아여 이야기 풀어내는 방식이 17세 화자 경수인것도 너무 놀랍구 ㅠ 2n세인 저도 저렇게 느낌있게 말하지 못하는데^^ 오랜만에 레드북님 글 읽으니까 너무 좋네요ㅜㅜ많은 노력의 흔적이 엿보이는 글이었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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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니 알아주셔서 감사해요 엉엉 전력 참여가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서 열심히 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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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 김참님 그림과 레드북님의 글 둘 다 너무 좋아하는데, 콜라보라니요... 너무 좋아서 미칠 것같아요. 레드북님 글 읽으면 항상 글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아른아른하게 떠오르는데, 그 아름다운 장면들이 마음에 새겨지는 느낌 같은게 들어요. 오늘은 김참님 그림과 함께해서 그런지 그 기분이 배가 된 것같네요. 항상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글 써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레드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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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읽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장면들이 마음에 세겨진다니 넘 과분하고 멋진 감상이에요😭😭 좋아해주셔서 고맙고 저도 저지만 앞으로도 김참님 많이 아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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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여기를 안 지 얼마되지않았는데요 레드북님 필력 장난아닙니다 저에게 보물장소가 더 생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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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필력이라니....저에게 필력을 말하시면 저는 쪼그라듭니다...😣 그치만 보물장소라고 여겨주시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생각나면 이따금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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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갑자기 이 글이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다시 읽어도 너무 좋네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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