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7월 18, 2015

author's note 9






'백현이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야 한다.'라는 명제로 가설을 하나 세웠다. 백현이는 어린이다. 어린이는 장난감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백현이도 장난감을 좋아할 것이다. 장난감을 고르려면 토이 스토어로 가야 한다. 무엇을 좋아할지 모르니 장소는 선택의 폭이 넓은 곳으로 한다. 대형매장을 찾는다. 그곳에서 산 선물을 받으면 좋아할 것이다. 라는 가설은 선물을 주었을 때 좋아할 확률이 높은 물건을 주되, 확률이 높다는 의미는 빅데이터로 검증 된 순위, 다시 말하면 가장 많이 팔리는 장난감 리스트를 기반으로 한다는 꽤 논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합리적인 선물 찾기의 맹점이 있었으니, 우리 둘 중 아무도 백현이의 기호를 모른다는 허점이 있었고 이 허점은 가설이 가설로만 그칠 가능성과 더불어 오류를 생산할 지 모른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빽빽한 인파를 헤치고 42가의 뉴욕에서 가장 많은 장난감을 보유하고 있다는 가게로 향했다.

들어서면서부터 압도하는 스케일의 넓은 매장에는 색색의 다양한 완구가 구비되어 있어 아이뿐 아니라 어른까지 사로잡았다. 말이 성인이지 그와 나도 아직 히어로에 열광할 나이라서 선물을 고른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괘나 즐기고 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모인 선물상자를 호기심 있게 바라볼 나이의 경계선이 있는 게 아닌 것처럼 그와 나를 포함한 도처의 어른들도 각기 다른 장난감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특히나 아이언맨을 좋아했다. 어디서 발견했는지 모를 아이언맨 마스크를 쓰고 스윽 옆으로 와서 얼굴을 들이댔지만,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자 비 맞은 강아지만 양 시무룩하게 마스크를 벗어 두고 왔다. 본의 아니게 이런 식으로 그를 실망하게 하거나 화나게 만들 때가 종종 있었는데 고치지 못할 천성이었기에 얼마 안 가 그의 쪽에서 무뎌지는 낌새를 보였다. 바꿔 말하면 나에게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었다고 해석하는 게 좋겠다.

적게는 십 달러에서 많게는 몇백 달러를 호가하는 장난감의 선명한 색깔을 보면서 시간이 갈수록 눈이 시려왔다. 게다가 얼마나 선정적이던지. 신이 나서 매장을 둘러보던 그도 언젠가부터 둘러보기만 하고 물건을 집어 들지 않았다. 나는 철저한 평범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낡은 가설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백현이가 이런 장난감을 좋아할까? 어떻게 생각해?"

나는 결국 참지 못해 그에게 물었다.

"난 왠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 같아."

어지러운 형광색 인형을 잡고 어떠냐는 표정으로 그의 반응을 기다리자, 우물쭈물하던 그는 두 팔로 뒷짐을 진 후 천천히 턱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 그럴 것 같아."

이 한마디를 계기로 장난감가게를 나왔다. 번쩍이는 전광판 밑에 서서 우리는 척 봐도 알 만큼 피곤해하고 있었다. 휩쓸려 떠밀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넘쳐나는 사람들 때문이었고, 조만간 덮치지 않을까 싶을 크기로 혼을 빼는 광고가 원인이었다. 머리 위의 하늘은 건물 꼭대기로 촘촘해서 화려하나 오래 있을 자리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뉴욕에 사는 보통사람의 일상이라 한다면, 그와 나는 서로의 영역에 집중한 나머지 그들과는 동떨어져 버린 것이다. 나는 내가 변했다는 걸 절감했다. 한편, 그는 눈알이 눌릴만한 힘으로 눈꺼풀을 비비고 있었는데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행위였다. 얼른 이곳에서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백현이의 선물을 사지 않는다면 더욱더.

서 있기 버거웠던 그곳에서 나와 우리가 향한 장소가 어디인지 당신은 짐작할 수 있겠는가? 바로 집이었다. 그와 나만의 공간. 우리는 사람이 드문드문 앉은 버스를 좋아하고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부서지는 공원을 좋아하며 역으로 사람이 많지만, 규율로 선을 친 조용한 도서관을 뺄 수 없게 마음에 들어 한다. 하지만, 가장 편하다고 느끼는 공간은 집이며 이 안에서는 어떤 '나'와 '그'라도 싫어하는 사람 하나 없다. 세찬 바람은 불지 않고 비와 태풍은 바깥세상의 이야기이다. 집은 항상 우리의 귀가를 기다리고, 우리는 집이야말로 유토피아라 장담했다. 나는 거칠게 운동화를 벗고 아무렇게나 가방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소파에 털썩 소리가 나게 몸을 던졌다.

익숙한 편안함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쉴 때 즈음, 그가 책상에 올려져 있던 파일을 가지고 내 옆에 앉았다. 면식이 있는 누런 파일은 백현이의 프로필이었다. 이쯤에서 프로필 일부분을 발설하자면, 이름은 변백현. 나이는 8살. 프라이머리 스쿨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에 다니다 말았다. 주된 문제는 불안정한 주변 환경이었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빈민촌으로 이사하게 되면서 학교를 옮기게 되었는데 동양인이 저 뿐이다 보니 따돌림과 구타를 당하여 생긴 멍 자국을 증거 사진으로 찍어놓은 게 몇 장 들어있었다. 어머니는 이사하자마자 칸나비스에 중독되었다. 일주일에 80시간이 넘는 노동강도에 지쳐 손쉽게 사들일수 있는 마약을 즐기다 크랙과 LSD에 빠지게 된다. 이때부터 아들의 사정에 관해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미국은 방과 후 각 가정에서 아이를 마중 나와야 하는 법이 있는데 지켜지지 않아 선생님의 제보로 아동보호센터에서 조사를 나가게 되었고, 뉴욕주 아동보호법에 따라 백현이는 마틴 루터킹 재단 산하의 아카데미에서 보호하게 되고 백현이의 어머니는 NYCATS로 강제 이송되었다. 이제 당신의 머릿속에 궁금증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프로필을 유심히 보던 내가 생소한 단어를 혼잣말처럼 읇었다.         

"칸나비스? 그게 뭐지?"

"카,칸나비디올. 마리화나."

"아...."

의문문이긴 했지만, 그에게 한 질문은 아니었는데 대답이 거침없이 나와서 조금 놀랐다.  

"..그럼 크랙? LSD? 이거...는?"

"크,크랙은 코,코카인의 종류이고 LSD는...그것도 마,마약이야."

마약이란 단어를 쓴 그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이때 내가 정말 원했다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물어봄 직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니, 지구의 모두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었고 이러한 특별한 날을 앞둔 시간에 어두운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다고 오감이 전했다. 그래서 오늘의 대주제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가리켰다.

"여기 찾아가 볼까? NYCAT..S ?"

약자를 풀어 말하자면, 뉴욕 센터 오브 어딕션 트리트먼트 서비스(New York Center of Addiction Teatment Service)로 가자고 권했다. 그의 눈이 단숨에 커졌다.

"여기로?"

"어. 여기에 백현이가 온종일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




*




다음날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NYCATS으로 문의 전화를 넣었다. 변연희 라는 이름의 여성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센터에 있는지 물었더니 내가 그녀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물어왔다. 그래서 백현이와의 만남에 대해 말해야 했고 그 후에야 그녀의 담당 주치의와 통화가 가능했다. 닥터는 우리의 사정을 듣더니 그녀에 관해 설명할 내용이 있다며 전화상으로 말하기에는 길어질 내용이니 한번 방문해 달라고 청했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와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춰 업타운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평일 낮이라 한 칸의 승객이 우리를 포함해 딱 다섯명이었다. 레일과 바퀴의 접촉 소음은 훨씬 크게 들렸다. 평소보다 찢어지는 소리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NYCATS는 맨해튼 위 쪽 브롱크스에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지하 역에서 올라오자마자 공원을 가로질러 흰 빌딩으로 향했다. 우리는 긴장하고 있었다. 쭈뼛거리며 들어서서 닥터의 비서에게 언질을 주고 소파에 앉아 15분이 흘렀다. 폰의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시선을 돌려 비둘기색 벽에 드문드문 걸린 크리스마스 장식을 물끄러미 보는데 드디어 오피스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흰 가운을 입은 삼십 대 후반의 여성이 밝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목에는 사진이 인쇄된 신분증이 걸려있었는데 위에 분홍 사인펜으로 그려진 울퉁불퉁한 꽃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급하게 진료해야 할 환자가 생겨서요. 전 크리스탈 왕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저는 도경수라고 해요."

닥터와 내가 악수를 할 동안 그가 자기 소개를 했다.

"반가워요. 카이 씨. 경수 씨. 제가 아직 점심을 못 먹었는데 밑의 식당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까요?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드시면 좋고요."

우리는 탁터의 제안에 따라 식당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녀는 그와 나를 재빠르게 훑고는 가운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입을 열었다.

"당신들 한국사람인가요?"

내가 그렇다고 말했다.

"그럼, 연희 씨와 같은 나라 사람이겠네요."

 "네."

"연희 씨가 영어에 능하지 못해서 소통때문에 힘들어하는데 잘됐어요."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닥터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간 나는 이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에 대해 긴장하고 있었다. 가볍게 들을 수 없을 게 분명 했기에 숨 고르기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에게 담담한 눈빛을 보냈는데 다행히도 그는 나를 마주보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오히려 내가 안정을 찾았다.




토요일, 7월 04, 2015

author's note 8










방학에 돌입한 지 보름이 넘었고 일이 많아서 만나기 힘들었던 친구, 레이와 약속을 잡았다. 브런치를 해야 할 시간이었는데 친구가 좋은 곳이 있다며 차이나타운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상점과 사람으로 정신없는 거리 안으로 레이를 쫓아가는데 우뚝 선 친구의 옆에 사람들이 길게 줄 선 음식점이 있었다. 유리 벽 안은 이름 모를 물고기들과 갑각류 해산물로 가득했다. 눈이 휘둥그레지자 친구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여기 딤섬이 아주 맛있어."


 "딤섬?"


중국사람은 나라를 막론하고 점심때 딤섬 먹기를 즐긴다고 하던데 과연 늘어선 줄 대부분이 중국어를 쓰고 있었다. 줄은 천천히 줄었다. 겨우 문안에 들어서서 음식점 안을 보니 커다랗고 둥근 테이블이 10개 정도 놓여있고 위에 온갖 먹거리가 늘어져 있었다. 안내를 받고 들어가 앉은 테이블은 적어도 스무 명의 단체가 점령해도 될 자리였는데 자세히 보니 알지 못하는 그룹이 삼삼오오 나누어 앉아 자기네들끼리 이야기하며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손님들의 말소리는 음식점 안을 시끌벅적하게 했지만, 그게 매력인듯했다. 레이는 앉자마자 대나무 통을 여러 개 쌓아 들고 다니는 웨이터를 잡아 세 개를 집어 내렸다.


"먹자."


뚜껑을 여니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며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친구를 따라 하얗고 작은 딤섬을 집어 한입에 넣었다. 향긋한 바다 냄새가 코로 올라왔다.


"그래서 그 애는 어때?"


"봉사활동 다니고 있어."


이따금 문자를 주고받는 레이는 우리의 사정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몇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뭐 그런 귀찮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거야 라는 식으로 말해왔지만, 그와 룸메이트가 된 내가 여러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알게 된 후로 더는 그에 관한 부정적 의견을 내비치지 않았다.


"괜찮은 거야?"


"별일 없어."


아직까지 라는 뒷말은 삼켰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게 당연했다. 레이는 약간의 찝찝함이 남은 얼굴로 대충 끄덕이며 딤섬을 씹다가 갑자기 번뜩 내 어께를 잡았다.


"아, 맞다. 너 얘기 들었어? 그 애가 왜 헨리 교수님을 때렸는지 말이야."


"뭐? 어떻게? 왜? 왜 때렸대?"


당사자가 극구 사양하며 알리지 않았던 폭력사건의 비하인드를 레이가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궁금해 젓가락까지 손에서 놓아버렸다.


"뭐야, 몰랐던 거야? 그 애가 말 하지 않았어?"


"응. 뭔데. 말해봐."


"...고아 새끼라고 했대."


"고...아?"


고아의 뜻을 모른다고 둘러대기에는 내 표정이 드러나게 굳어있었을 거다. 그렇다는 전제하에 레이도 다르지 않은 얼굴로 천천히 끄덕였다.


"헨리 교수님의 말을 들은 애 말로는 남의 인정을 빌러 사는 고아 새끼라고 했대. 헨리 교수님이 그 애를 업신여기잖아. 예의도 없고 자꾸 대든다는 식으로 주위 학생들 선동한대. 헨리 교수가 그 애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그렇다고들 하는데 교수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다들 알면서 뭐라 하지 않더라고. 학교에서의 생활에 못 섞이는 만큼 감싸주는 사람도 없어서 항상 그렇게 혼자였다나 봐. 근데 걔 고아 맞아?"



나는 모르겠다고 하고 남은 딤섬을 입안으로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주위가 텅텅 빈 걸 보면 천재라는 거 좋지만은 않은 건가 봐."


감정을 붙이지 않은 톤으로 얘기한 레이는 다른 음식을 주문하려 손을 들었다. 다음 음식에 기대하며 싱글벙글 웃는 친구는 몇 분 전 무슨 이야기를 해주었는지 잊은 사람 같았다. 이 사건이 남의 일이 되지 못하는 입장의 나는 목구멍으로 뭐가 제대로 넘어갈 리 없었다. 가위로 자른 것처럼 식욕이 잘려나갔다. 젓가락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지 오래였고 손에 들린 물컵은 비어있었다.


"뭐야, 더 안 먹어?"


"응. 배불러."


"어제 뭐 많이 먹었냐?"


"아, 어."


둘러는 댔지만, 많이 먹기는커녕 며칠 주워 먹지도 못했다. 그가 비 오는 날 이후 지독한 감기에 걸려 간호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3일을 고열에 시달리더니 이제야 좀 기운을 차리고 집안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한번 비에 찌들었던 그를 데리고 나갔던 게 잘못이었다는 건 알지만 그래야 했다랄까 그날 이후 우리의 거리는 매우 좁아졌으니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열 때문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괴로워 보였지만, 그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마치 야밤의 외출을 미안해하지 말라는 무언의 배려 같았다. 어젯밤에는 소파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꾸깃한 종이를 무릎에 올리고 열심히 숫자와 공식을 적어나가던 그의 머리가 내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알고 보니 감기에 지쳐 잠이 든 것일 뿐이었다. 장장 16시간 뒤에 깨어나 남들이라면 세끼로 먹을 양의 음식을 한꺼번에 들이키고 기운을 차린 그는, 묻지 않았으나 물어봐서 대답한다는 투로 뜬금없지만 자연스럽게 백현이에 대해 재잘거렸다.


 백현이는 재미있고 애교가 많은 섬세한 아이라고 했다. 남에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눈치를 보지만, 웃는 모습이 정말로 귀엽다고도 했다. 그래봐야 고작 두번 만난 게 다였는데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생글거리면서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백현이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한눈에 알았다. 어떻게 빨리 친해졌느냐고 물었더니, 나와 비슷하니까. 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본인도 엄마를 기다려 본 적이 있다고. 그러니 헨리 교수님의 말은 근본적으로 틀렸다. 이로써 의심한 적은 없었지만, 잘못한 게 없다던 그날 밤의 고백은 모두가 아는 진실이 되었다.  


"너 크리스마스에 뭐 할 거야?"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끌어올린 레이는 눈앞에 닥쳐온 크리스마스의 계획에 관해 물었다. 이렇다 할 약속이 없었던 나는 약간 망설이다 아마 그와 보내게 될 거라고 했다.


"선물은 샀어?"


"선...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는 친한 사람들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라는 걸. 어쩌다가 일 년 중에 가장 큰 휴일을 잊을 만큼 정신없이 보냈는지.


"너는? 넌 여차 친구한테 줄 선물 샀어? 아니, 여자친구는 생겼어?"


나는 답은 않고 되려 친구에게 물었다.


"아, 야. 그런 사람이 있으면 너랑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었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가족 만나러 갈 거야."


"중국?"


"어. 중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그다지 중요한 명절은 아니지만 다들 가족 보러들 가는 거 보니까 나도 보고 싶더라고."


가족이라. 나는 곧 내 가족을 떠올렸다. 얼굴이 닮은 형과 아버지 어머니 딱 네 명밖에 없기에 신경 쓰이고 안녕이 궁금한 사람들.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 게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친구 덕분에 크리스마스 날이 되기 전에 카드라도 보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깨작거리는 내 옆에서 친구는 배불러 올 때까지 먹어댔다. 계산서는 브런치라는 명분이 무색하게 100달러를 훌쩍 넘긴 합계가 나왔다. 백이라는 숫자를 보고 벙찐 날 보며 끅끅 웃던 레이가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올려두었다.


"내가 낼게."


"다음에는 내가 살게."


고개를 흔든 친구는 정말 기대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음식점을 나오자마자 헤어졌다. 방학이 되어도 친구와 나는 자신들의 삶을 사느라 바빴다. 하지만 잊지 않고 짬을 내 만나고 안부를 전한다. 친구란 건 묘해서 우리의 식습관과 닮아있다. 삼 끼 세끼 먹거리처럼 필요하고 때가 되면 반갑다. 그래서 만나면 당연하게 밥 먹었느냐고 묻고 같이 먹으러 가자고 기쁘게 제안하는 게 아닐까 싶다. 구겨진 종이와 끝이 닳아빠진 몽당연필을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는 친구도 예외는 없다. 온종일 연필을 쥐고 있어 생긴 굳은살과 저도 모르게 흑심가루를 턱에 묻힌 친구에게 온정을 머금으면 머금었지 차갑게 돌아설 건덕지는 없다. 그와 내가 함께 밥 먹은 횟수가 몇 번인가. 나는 왠지 이곳저곳이 간지러워져 애꿎은 콧등만 긁었다.


멋쩍어하며 걷는데 두르고 있던 머플러 사이로 빠져나온 입김이 흘러가는 쪽에서부터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커피콩을 바로 갈아 내린 향긋함에 끌려 테이크아웃 종이컵을 사 들고 나와 걸었다. 그냥 커피 하나만 쥐었는데 훨씬 따뜻해졌다. 크리스마스는 겨우 2주밖에 넘지 않았다. 무슨 선물을 골라야 할까 고민할 수 있는 날이 겨우 14일이 전부였다. 평소 무언가에 집착이나 욕심을 보이는 보통사람이었다면 이야기가 빨랐겠지만, 알다시피 그는 뭘 원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선물인데 대놓고 묻기는 뭐하지 않은가.


버스를 타고 백현이를 보러 가면서 계속 선물을 고민하다 목적지의 정류장을 놓칠뻔했다. 서둘러 벨을 누르고 내렸는데 찬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래 봐야 작은 섬인 맨해튼의 날씨는 겨우 몇 블럭 사이로 이렇게나 달랐다. 어쩌면 체감이 아닌 느낌의 차이일지 몰랐다. 서 있는 건물이며 걷는 사람들의 다름이 만든 허전한 기분을 그나마 손에 든 커피가 채워주고 있었다. 뭐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왠지 그가 그리워졌다. 이 가볍고 갑작스러운 공간을 스푼으로 푸딩을 퍼내듯 분리해줄 수 있는 건 '그'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마틴 루터킹 아카데미로 들어가 아이에게 둘러싸여 웃는 그를 보았을 때 내 추측은 확신으로 차올랐다. 드럼통 난로가 떠올랐다. 길에서 자는 노숙자가 어딘가에서 주워온 나뭇조각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불을 붙이면 하얗다 못해 퍼렇게 얼어붙은 거리를 녹이는 절체절명의 철제난로. 내가 서 있는 곳이 이스트 할렘의 한복판이라는 걸 잊게 해준 그의 옆에 백현이가 보였다. 


그의 말대로 백현이는 수줍게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웃음에 그림자가 섞인 걸 보았고 아마 그도 같았겠지만,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가 써주는 무언가가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떼지 못하고 응시하던 아이는 유리창 너머의 시선을 느끼고 문득 고개를 들어 둘러보았다. 뒤이어 나를 발견했다. 조금 어색하게 손을 들어 흔들었는데 아이는 어떠한 행동 없이 나를 무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를 기다린다고 여길 떠나지 않아요. 라던 티나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이가 엄마를 기다린다는 건 뭘까. 단언하건데 저런 표정은 아닐 것이다. 두 시간 남짓 되는 어머니의 외출을 기다려봤던 어릴 적의 나는 엄마가 오면 맛있는 밥을 해주겠지. 라며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오시면 말이 많지 않던 아이였어도, 이런 동화책을 읽었어요, 엄마. 아까보니까 나비가 텃밭 호박꽃에 앉았어요, 엄마. 뭐, 이렇게 재잘재잘할 말이 많았다. 겨우 두 시간 동안의 변화와 감정을 조잘거리느라 점심시간을 모두 허비했는데 백현이의 기다림에 비례하는 가슴 속 이야기는 얼마나 꽉 차있을까. 아이가 저렇게 타인을 볼 때, 눌러 담은 그리움이 눈동자에서 가시지 않아 나의 온 신경을 들쑤셨다. 그래도 나는 활짝 웃었다. 백현이가 무엇보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이를 위해 울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나의 미소가 먹구름 한 점 없기를 바랐다.


"경,경수야."


백현이를 따라 날 발견한 그가 아이들의 방에서 부리나케 뛰어나왔다. 고개를 돌려 본 그는 해맑게 나를 향해 서 있었다. 하지만 기류가 이상했는지 눈알을 위아래로 굴려 탐색에 나섰다.


"왜, 왜 그래? 무,무슨 일 있어?"


사실을 말하자면, 이 순간 그를 껴안고 싶었다. 그의 과거에 대해 쥐뿔도 모르고 묻지 않았으면서. 전날 백현이와 그가 같은 경험을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떤 마음일지 가늠하지 못할지언정 그가 가졌던 혹은 가진 갈등과 가슴의 은신처를 어둠 대신 내가 감싸줄 수 있었으면 했다. 짓눌려 피어나지 않는 일회용 어둠말고 팔이라는 나의 날개가 지켜줄테니 고아라고 천대받은 일을 더 이상은 노여워하지 말기를. 아니, 싹 잊길.


"아니. 아, 곧 크리스마스인데 놀고 나서 같이 백현이 선물 사러 가자."


"어! 좋아."


"백현이한테는 비밀이야."


팔락팔락 고개를 끄덕인 그의 눈이 반짝였다. 이내, 내 손은 그에게 잡혔다.


"가자, 경수. 백현이랑 놀자."                          


"응."


이끌려 들어간 방 안의 아이들이 나의 등장에 환호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 허그로 보여주는 아이가 많았다. 아껴놓은 초컬릿을 주머니에서 꺼내 쥐어준 여자아이는 내가 귀엽다며 옆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백현이는 주위에 인원이 많은 걸 좋아하지 않는지 내 옆으로 오길 꺼렸다. 그는 나와 백현이가 친해지길 바라는 것 같았는데 아이가 나를 피하는 꼴이 이날도 도저히 무리였다. 나는 약간의 아쉬움을 가지고 정해진 시간을 보내야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그가 백현이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그리고는 아카데미를 나가는 내 옆으로 뛰어와 섰다. 뭐라고 했느냐고 물었더니,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초대했다고 헤헤거렸다. 셋이서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라니. 유명 장난감 스토어로 향하는 우리의 걸음이 샘솟는 기대에 차 있었다.







토요일, 6월 27, 2015

밤에








이유 없이 강가로 걸어가고 싶어졌습니다. 다음날 비가 오려는지 습기 찬 공기가 감겨와 숨쉬기 버거웠지만, 모래밭 길을 걸어 집에서 좀 떨어진 강에 도착했습니다. 야밤이었는데 옷을 갈아입지 않아 교복 그대로였어요. 교복이란 게 어차피 한 종류여서 검정 기지 바지에 흰색 포플린 셔츠에다가 맨발에 때 탄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더랬죠. 강가에 닿아 낮에 봤다면 푸르렀을 수풀 위에 앉았습니다. 엉덩이 밑에 밤벌레가 깔려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어요.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반딧불이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풍경에 혼이 빠져서 신경을 쓸 틈이 없었거든요. 워낙에 사람에 관심이 없어 그런지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는 음악 선생님보다 그네들이 백배는 더 영롱하더군요.


여름이 펼쳐주는 환상에 취해 휘파람을 불뻔했습니다. 입술을 모았는데 번뜩 도서관에서 보았던 소설책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물 주위에서는 휘파람을 불지 말라. 그곳에서 죽은 영혼이 나온다더라. 이런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7년 동안 비슷한 것도 보지 못해서 나는 귀신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게 확실했습니다. 게다가 소설은 영국에서 건너온 번역 책이였으니 양놈들의 미신이 뭐 대단하다고 되내어야 하겠느냐마는 조심이라는 단어가 나쁘지 않아 귀를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대신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흔들었습니다. 뭐라도 해야 할 사람처럼 말입니다. 사방을 촘촘히 감싼 어둠 안에 피어난 생명이 알게 모르게 소리를 내고 있었으니까요. 


그들과 하나가 되고자 했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무법자였습니다. 풀씨에 횡포를 부렸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개의치 않고 연약한 풀을 단단한 나뭇가지로 툭툭 치는데 오른쪽에서 강물이 첨푸덩 쏴악거리더니 철벅 철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 급히 두리번거리니 검은 형체에 달린 사지가 익숙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수많은 반딧불이 똥구멍에서 나오는 빛에 젖은 뒷모습이 비쳐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구나! 알았지요. 남자는 필시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젖어있을 겁니다. 후덥지근한 여름이 아니었다면 곤란한 지경이었겠죠. 입고 있던 젖은 옷을 벗어 던지는 소음이 났습니다. 곧이어 풀잎이 구겨지며 부스럭했습니다. 소리의 거리로 보아 남자가 꽤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몇 번의 소음이 들렸습니다.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싶어 존재를 알려야 하나 진실로 고민하고 있을 때, 연기가 밤하늘로 타오르며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습니다. 그건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봐서 예상했던 담배 그러니까 유행하던 도라지 담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생전에 끊이지 않고 피던 거라 잘 아는데 그거와는 다른 살아있는 풀떼기를 태우는 악취였어요. 얼른 손을 들어 코와 입을 동시에 막았습니다. 괜히 나왔다 생각했죠. 후회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다리에 힘을 주는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한대 줄까?"


다분히 나를 의식하고 한 말이었을 겝니다. 차분한 말투는 내 몸을 경직시켰습니다. 정말로 꼼짝 할 수 없었습니다. 숨마저 속으로 감추어야 했죠. 아시다시피 밤이라 보이지 않을 텐데 머리를 미친 듯 흔들었습니다. 등에서 나는 식은땀이 허리까지 흘러나가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몇 개의 긴 풀 사이로 언뜻 본 남자의 눈은 달빛에 빨갛게 광을 발했습니다. 조용하고 은은한 빛을 흠뻑 씌어 머리카락조차 그 빛과 닮아있었습니다. 나는 말입니다, 살아생전 이런 남자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평소 행동반경이 좁지만, 만약 친우와의 대외활동에 도가 튼 마당발이라 해도 이런 이는 못 만나 보았을 거라 장담합니다. 중년이건 장정이건 전쟁의 군인으로 징집되어 동네주민이라고는 스무 명 남짓한 시골에서 나가지 못하고 새로움에 목말라하던 나에게 딱 맞는 만남이다. 머리로 외치고 있었으나 워낙에 무서워야지요. 토악질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팔 다리가 굳어 주저 없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여기는 왜 왔어?"


남자가 물었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거하게 침을 삼키고 용기를 짜내어 입을 열었습니다.


"자는데, 갑자기 강가에 오고 싶지 않소. 그래서 내 와봤소. 당신은 강에서 물질이라도 한 거요?"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에 쭈뻣거리는 눈길을 주고 물었습니다. 답답하게도 남자는 어디에서 꺼냈는지 모를 종이에 마른 잎을 가로로 넣고 손가락으로 말아 양 끝을 엄지와 검지로 꾹 눌러 돌렸습니다. 그러더니 입술에 끼웠죠. 다음에야 느릿한 말이 나왔습니다.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게 뭐야?"


대답일 줄 알았으니 이걸 듣고 반문 할 뻔 했지요. 하지만 더는 묻지 않고 답하기로 했는데 딱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더군요. 쑥이 잔뜩 들어간 못생긴 개떡에 동치미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싶다가도 커다란 무쇠솥에 찐 염소다리 고기를 소금에 찍어 뜯어먹으면 맛있겠다며 망설이다 결국 훈이네 밭에서 서리한 꿀 수박 한 덩이에 만족한다 했습니다.


"국수는?"


솔직히 국수는 떠오르지 않는다 했더니 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고 있던 담배인지 모를 종이 쌈을 두꺼운 손가락 사이로 옮기고 그와 나를 간간이 가리고 있던 풀가지를 다부진 팔로 쳐냈습니다. 하릴없이 꺾인 풀은 바닥에 엎드려버렸습니다. 남자는 벌레의 깜빡이는 빛을 탓하고 싶게 만드는 나신이었습니다. 사랑마저 규격이 있는 게 세상이라던데 그는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종류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같은 남자의 다른 나체는 꽤 충격이었습니다. 처음이었으니까요.


"같이 가자."




                                                   (all rights reserved by @2500won)



달빛 머금은 손이 나의 뺨을 스쳐 관자놀이로 흐르는 땀방울을 훑고 차갑게 식혀주었습니다. 가지처럼 뻗은 폐의 핏줄이 막혀있다가 터지며 뻥하고 뚫려 안도의 한숨을 쉬어버렸죠. 혈관 안의 피가 대차게 감각을 전달했습니다.


남자는 구름처럼 미소 지었습니다. 숨 막히는 부드러움이 나를 천천히 압도해서 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죽음이란 게 이런 걸지 모른다 생각했습니다.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잠식하는 순간은 다시 못 올 쾌락이라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군요. 타인을 위해 붙잡고 있던 삶의 끈이라는 명분은 사라졌습니다. 지워진 책임감은 나 자신을 원하는 곳에 둘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남자가 누구이고 왜 나를 이렇게 만드는지 물결에게 물을까요, 아니면 저 별이나 더운 바람을 붙잡고 물을까요. 글쎄요. 어느 쪽이든 부질없는 짓이겠지요.
나는 같이 가자는 남자의 두 팔에 폭 싸여 안겼습니다. 두 발이 지면에서 떨어질 때 고무신이 벗겨졌는지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전하게 안겨있음에도 자꾸 뒤가 켕기더란 말입니다. 꽉 차는 평온을 갉아먹는 이름이 지독하게 따라와서는 할퀴고 때리며 울부짖는데, 하도 시끄러워서 가슴의 불안이 골격을 드러냈습니다. 이름은 점점 크게 들려왔습니다. 남자도 들릴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저 어디쯤을 보는 턱 끝은 조용히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를 따랐습니다. 사람이 있더군요.


나는 저 이를 알고 있습니다. 다부지고 당찬 실루엣을 잊을 수 없지요. 사내란 사내는 다 일본과 러시아로 강제집영되는 마당이니 녀석도 끌려갔다가 병에 걸린 날 간호하겠다며 기를 쓰고 살아 돌아온 끈질긴 놈입니다. 자기도 다리를 다쳐서 쩔뚝이면서 무슨 여유로 나를 돌보겠다는 건지 혀를 찼었더랬죠. 그래서였어요. 돌아보게 되는 연유 말입니다. 인사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나는 남자에게 내려달라 부탁했습니다.


"다시 올 거니?"


그러고 싶었습니다. 다른 날 밤에 또 오면 남자를 볼 수 있다는 일이 얼마나 멋진지 모를 겁니다. 두 번 다시 못 마주치는 건 죽기보다 싫더군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습니다. 그리고 빨려가듯 녀석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주저하지 않았어요. 그럴 이유는 없었죠. 남자는 또 만나게 될 것이고, 저 녀석은 울면서 나를 부르고 있더랍니다. 아이의 눈물이 내 육신을 축축하게 적셔낼 기세였습니다. 저놈은 왜 날 저렇게나 불러댈까요.


"형! 경수형!! 일어나봐! 형!!"


어지러웠습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게 흥건했어요. 안 그래도 힘이 없는데 쉬지 않고 흔들어대는 통에 저절로 오만상이 찌푸려지더군요. 겨우 눈만 떴습니다.


"형! 정신 들어? 놀랐잖아!"


녀석의 검은 머리카락을 타고 짠물이 입술 사이로 툭툭 떨어집디다. 얼마나 다급해 보이던지 왜 그러냐고 한마디 했습니다.


"왜 그러긴! 뒷간 다녀왔는데 형이 숨을 안 쉬잖아! 얼굴은 하얗게 질려가지고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고!"


골이 흔들리게 화를 내는데 내가 아픈 건지 놈이 아픈 건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무언지 모르게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강을 보러 갔었는데 어떤 남자를 만났고 너를 멀리서 보았다 했더니 펑펑 울더군요.


"...종인아, 그만 울어."


갈라지는 내 목소리가 연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늘어진 몸이 참으로 쓸모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몸을 녀석은 항상 소중하게 아껴서 미안해졌어요. 나를 끌어안는 팔뚝에 오른 힘줄이 살아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걸 지긋이 관찰하는 게 어찌나 좋던지. 오늘 밤은 살아야겠습니다. 내일 갈게요. 당신에게는.







카디전력 2015.6.27

김참님 감사합니다.

목요일, 6월 18, 2015

author's note 7











지금까지 우리의 동거 그러니까, 한 공간에 거주하게 된 일을 이야기함에 있어 빠진 일화가 많다. 되도록 자연스럽게 넘어가려 했던 접은 부분. 그것은 '김종인과 나의 관계'이다. 누락된 일상을 다 말하기엔 쥐고 있는 종이의 양은 한정되어있고, 그와 나의 날에 대해 쓰자니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소소하고 은밀했던 생각이 담겨 대부분 나의 이야기가 될 성 싶다. 글의 취지에서 살짝 비켜간 듯 하지만, 이쯤에서 우리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였다면 생략했을, 마틴 루터킹 아카데미에서 홀로 집으로 돌아온 날 밤을 적기로 하겠다.


그날 밤은 비가 내렸다. 예고 없던 먹구름이 하늘을 빠르게 뒤덮더니 어느 순간 쏟아졌다. 그가 돌아오는 길에 비를 쫄딱 맞을 게 마음 쓰였다. 식탁 의자에 앉아 창문 밖의 비 오는 밤을 보는 내가 유리창에 고스란히 그려졌다. 창에 비친 나는 빗줄기가 죽죽 그여 번져있었고, 얼이 빠져있었으며 실제로는 허탈했다. 이때까지의 노력이 누구를 위한 일이었나에 대해 몇 시간이나 고민했지만 해답은 없었다.
폴 고갱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직선은 무한대로 나아가며, 곡선은 창조를 가둔다고 썼다. 어쩌면 나는 창조라는 눈부신 단어를 가두는 정형화된 곡선이었다. 자유로운 김종인을 가두는 고지식한 도경수. 꼬리를 무는 자학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 사이에서 허탈한 바람이 빠져나왔다.


그와 내가 사는 곳에서 완전히 혼자가 된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공기마저 제자리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달칵하고 현관문이 열리고, 이어 발소리가 났다.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려있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홀로 있을 때보다 두세 배는 가중된 공기가 나를 짓눌렀다. 비 비린내에 코가 찡했다.


"...배, 백현이가 또 오라고..그랬어."


그의 목소리가 키친을 울렸다.


"가..앝이 가,가겠다고 했어."


"미안해."


내가 여유 없이 말했다.


"잘못했어."


"...뭐,뭘...겨,경수는 아,아무것도 잘못하,한,"


"아니."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무서웠고 두려워 눈이 질끈 감겼다. 어쩌면 나는 저번 날의 그와 같은 기분을 맛보고 있었을지 몰랐다. 구제불능인 나를 내칠지도 모른다는 소외감에 전률이 흐르며 오슬오슬 떨려왔다. 그런데 구부린 머리 위에 무게가 실려 오며 온기가 번졌다. 열기를 내뿜는 그의 손바닥이었다.


"저,정말이야. 겨,겨,경수는 아,아무것도 자,알못한게 어,없어. 내가 아,아는 겨,경수는 그,그런 사람이 아,아니야."


울 뻔했다. 산천을 뒤엎는 바람에 쓸린 나뭇잎들의 비명처럼, 크게. 소름 끼치게 어지러웠던 몇 시간이 깡그리 사라지며 남기고 간 쓰라림이 그렇게 만들 뻔했다. 그러나 나는 운이 좋았다. 김종인을 알게 되었고 그는 나와 달랐으며 그래서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았다. 부끄러웠지만 나의 허점을 인정했고 그가 받아들였다. 어째서 이다지도 운이 좋은 지 누구에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혹자는 나의 방법이 최선이었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세상의 절대적 잣대는 우리에게 무용지물이었다. 그와 나는 방법이 달랐다.


"거,걱정하지마. 내가 말했잖아."


다정한 음색과 긴 팔이 담요가 되어 쓸데없는 물음과 답으로 가득 찼던 가슴을 감쌌다. 그의 체취는 꽃향기 같지 않았으나 날 치유했고, 보다 숨 쉬게 만들었다.


"괜찮아..겨,경수야. 내,내가 너..안 아프게, 하,할거야."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를 꽉 안아버렸다. 맞은 비 때문에 그의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지만, 손끝까지 포근해서 12월 초의 차가운 비가 옷을 뚫고 들어와 물들일지언정 소스라치지 않았다. 이 순간 우리의 계절은 푸르렀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봉우리를 피울 수도 있었다. 봄의 푸른 잔디 위에서 웃통을 벗고 씨름을 하는 아이들이 그려진 그림처럼 얼싸안고 몰입했다. 나는 그에게 고마웠고, 또 고마웠다. 하지만 현실은 빨리 돌아왔다. 내 밥 시계가 꼬르륵하고 알람을 울렸다.


"....."


"...배고파."


정말로 뜬금없이 배가 고팠다. 그는 킥킥 웃으며 품에서 나를 떨어트렸다.


"나,나도."


"샤워해. 감기 걸릴라."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를 신경 쓰세 된 게. 나의 눈 끝에 애정이 송글거리고, 그의 얼굴과 움직임에 주렁주렁 매달린 어여쁨을 사랑스럽게 여기게 된 것이.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짖은 살결이 남의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되어 사람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리게 된 날의 시발점. 이날, 그는 자신이 나를 온전히 믿고 있다는 걸 각인시켰다. 그걸 깨닫는 순간 마음은 풍족해졌고, 겁먹었던 시간의 의미는 필요치 않았다. 샤워하러 가라고 말은 해놨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쉽게 놓지 못했다. 그래 봐야 샤워를 하러 들어갈 뿐인데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원하지 않은 거 시켜서 미안해."


그는 대꾸 없이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써줘서 고마워."


이번에는 위아래로 작게 끄덕였다. 덕분에 나는 기쁨을 가득 품은 채 그에게 줄 늦은 저녁을 만들러 키친으로 향했다.






밤은 우리를 응집시켰다. 같은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면서 함께였고,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퍼먹을 땐 그가 따라 왔다. 영어로 웅얼거리는 텔레비전소음이 벽을 울려 나름 시끄러웠는데 그가 보고 있는 건 텔레비전이 이 아니라 나였다. 어떻게 책볼 때나 문제를 풀 때처럼 초집중해서 볼 수 있는지 신기하고 궁금했다.


"내 얼굴이 이상해?"



아이스크림을 입안에 넣으며 물었는데 아니라고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어떻게 보여?"


"어? 어...음...공식?"


"공식?"


나는 그의 말을 되풀이하고 허허 웃어버렸다.


"수,숫자는 와,완벽하지 아,않아. 고,공식의 힘이 있어야 겨,결점이 어,없어져."


완벽은 틀림없이 나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나를 향해 움직이는 그의 도톰한 입술은 다른 날처럼 확신에 차있었다. 반성문을 쓰기 전날 밤 그러니까 전날 그가 단호하게 들먹였지만 나는 흘려버렸던 두 음절의 단어는 이날 또한 불편하고 이질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알고 싶어졌다.


"좋아. 그럼 공식이 나라고 치고. 공식을 만드는 숫자는 누구야?"


나는 텔레비전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괜한 허벅지만 쓸어대며 눈을 피했다.


"말해, 김종인. 빨리."


그의 배를 쿡쿡 찔렀다. 그래도 망설이길래 티비에서 레슬링 선수가 하던 기술인 팔로 목조르기를 시도했다. 아주 있는 힘껏 조여보았다.


"컥컥! 크윽! 겨,경수,컥"


"얼른 말하라니까!"


어느새 웃음이 나와 멈추지 않았다. 바동거리는 그의 얼굴이 있는 대로 찡그려져서 내 팔을 툭툭 치며 놔달라고 조르는 게 좋았다.


"어,알았어! 아,아,알았다고!"


"말하면 놔줄게."


"나! 나!"


"너? 김종인?"


"....응."


암호와 다르지 않은 대답을 곱씹느라 과부하에 걸려 팔이 저절로 풀렸다. 일단 추리를 방해하는 텔레비전은 껐다. 그렇게 해서 소음은 끊겼지만 무슨 말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공식이 도경수이고 숫자가 김종인이라는 소리인데, 뭐지 그게. 날 힐끔 보는 그에게 이때다 싶어 멍청이처럼 머리를 흔들자, 차분한 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 "나,나도 알고 있어. 어떤 것도 누구도 심지어는 숫자도 완벽할 수 없다는 거. 그런데 숫자도 비완벽에 해당된다는 게 인정하기 힘들었어.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 소수의 규칙을 발견하면 숫자의 빈틈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소수는 불규칙하지만, 소수의 집합은 형태의 궁극의 미인 원을 만들고 그건 곧 완벽이거든. 그때부터 나한테는 숫자가 전부였어. 음...열심히 했어. 그런데 어느 정도 연구가 진전되었을 때 이것이 단순히 숫자의 배열을 찾는 게 아니라 상상하지도 못한 원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았어."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내 눈치를 봤다.


(*) "아무튼 세상에 숫자보다 나를 안정 시키는 건 없었거든. 붙잡고 씨름하면 언제가 되었든 답은 나오니까. 사람들이랑 지내는 건 다르잖아. 불규칙하고 불분명해. 그런 건 싫어. 그..런데 겨..경수를 알게 되고 난 후부터는 내가 숫자를 통해서 찾던 게..겨...경수가 아닐까...그, 그러니까, 음, 어...지금 내 말이 뜬금없을지 모르는데 처음 봤을 때...내가 찾던 모든 게 경수에게 있다는 직감이 와서 그래서 나한테 너는 완벽이야."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리던 그는 채념한 듯, 산 만한 몸을 늘어뜨렸다.


"내,내말이 무,무슨 말인지 아,알겠어?"


물음은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있었지만,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 와중에 뒤죽박죽된 언어를 고르고 골라 뱄어 낸 그는 어느 때보다 초조해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그렇게나 선명했던 신호를 읽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고 있었다. 그에게 둘도 없는 좋은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했으니까 말이다. 나라는 인간은 금붕어가 친구 하자고 할 정도로 둔해 빠진 연인이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어색해진 그와 내가 어김없이 적막한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뽀송한 비누 냄새를 풍기는 그를 보며 이 시간을 그냥 보내기 싫다 생각했다. 이건 정말 뜬금없는 아이디어였다. 밖은 아직도 추적추적 비가 오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나가자."


놀란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어딜?"


"어디든."


안달 난 다리는 주체를 못 하고 이리저리 움직여서 두툼한 코트를 가져와 그에게 입히고 서둘러 스니커를 신겼다. 목도리를 칭칭 감아줘도 그는 싫다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준비를 마치고 장우산을 잡았다.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콧노래가 멈추지 않았다. 밖은 어두웠다. 곳곳의 가로등이 비에 번져 몽롱하고 환상적인 오렌지빛을 그려냈다. 우산은 그가 들었는데 덕분에 내 양손은 자유로워졌다. 코트에 쑤셔 박을까 하다 그의 소매를 잡았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맞춰졌다.


"겨,경수는 비 오는 날, 조, 좋아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딱히."


"그,그런데 왜 나,나오자고 해,했어?"


"음...그냥 자기는 싫고, 핫초콜릿도 마시고 싶고."


헤헤거리며 떠오른 대로 말했다. 우리는 정해진 장소 없이 주택가를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었고, 대신 그와 내가 길의 주인이 되었다. 그의 몸이 돌솥처럼 은근하게 따스해서 차가운 밤공기가 상쾌했다. 몇 블럭 걸었더니 작은 카페가 보였다. 망설이지 않고 들어가 핫초컬릿 하나를 사 들고 나왔다. 달짝지근한 갈색 액체를 번갈아 한 모금씩 홀짝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눴다. 아마 스무 블럭은 넘게 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화하며 그가 수줍게 했던 말을 계속 떠올렸다. 자신이 찾던 모든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말. 그것을 곱씹으니 행복이 차올랐다.


내가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된 기분은 풀이할 수 없는 충족감을 주었다. 한 사람에게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누군가를 살게 하는 비결이 아닐까. 따스했다. 없어지지 않길 바랄 정도로. 좁고 검은 우리만의 길에 그의 체온과 순수함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감히 말하건대 이밤은 그와 나의 첫 데이트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기분이 전과 다르게 간질거렸기 때문이다. 둔해 빠진 도경수의 안테나가 아주 조금씩 김종인에게 쏠리고 있었다. 






*




자, 이제 잠시 백현이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당신이 궁금해하는 한 아이와 나 그리고 그의 정답고도 아픈 이야기를 이제부터 나누어야 한다. 그 전에 독자가 준비가 됐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당신이 경험해 본 적 없는 어려운 이야기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모두에게 마음을 열어 놓으라고 덧붙이고 싶다.








(*) 독자도 알다시피 그는 평소 많이 더듬는 편이었다.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걸러서 쓴 것일 뿐이다.






화요일, 6월 09, 2015

author's note 6








몇 시간 후,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올 때처럼 지하철을 탈 수 있었지만 걸어가다 보니 집으로 가는 버스가 보였다. 그게 다였다. 백현이를 등 뒤에 놓고 오는 기분은 말로 설명 할 길이 없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버스 밖 사람들은 단풍 지는 가을을 즐기며 오손도손했다.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들이 전과는 한참 다르게 보였다. 나는 힘이 빠져 유리 창문에 머리를 붙였다. 버스는 천천히 달리고 있었지만,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겨, 경수야."


 옆에 앉아있던 그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응?"


고개를 돌리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또,또 가자."


나는 여러 번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았고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한 아이가 밀어 넣은 소용돌이가 우리의 가슴에 바람을 일으켰다. 나는 보기만 해도 듬직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 보았다. 동질감은 친밀함을 부여했고 작은 면적이 주는 안락은 유리 창문보다 따스했다. 이날을 돌이켜 보면 험난 했던 감정 속의 위안은 김종인이었다. 어찌 보면 '그'라는 사람 때문에 경험하게 된 시간에 '그'라는 존재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이었고, 어린 나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버스는 아파트 근처의 정류장에 우리를 내려놓고 달아났다. 폰을 보니 시간은 네 시쯤이었다. 저녁을 먹기는 이르고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전에 봐두었던 페이퍼북을 사러 서점으로 들어갔다. 그는 서점을 좋아했다. 물론 나도 좋아한다. 특히 전자책이 발달한 요즘, 쥐었다 접었다 하며 읽는 맛이 쏠쏠한 페이퍼북은 갈수록 매력적이다. 그는 아트 섹션에서 원하는 책을 찾는 나의 옆에 서 있었다. 이 책 저 책 둘러보며 종이 인쇄물에 정신을 빼앗겨 알지 못했는데, 문득 느낀 인기척에 돌아보았을 때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쑤셔 박고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다. 정정하겠다. 정확히 말하면 '응시'였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그는 말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왕 서점에 왔으니 본인도 보고 싶은 책이 있을 텐데 따라다니는 게 부담스러워 등을 떠밀었다. 어디든 좋으니 서점을 나가지는 말라고 당부하는 건 물론이었다. 망설이던 그는 마지 못해 내 옆을 떠났다. 얼마 가지 않아 자석이 끌리듯 과학, 수학 섹션으로 걸어가는 넓은 등을 힐끔 봤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다시 흥미로운 페이지로 관심을 돌렸다. 덕분에 수많은 책 속으로 의식을 집중하다 어떤 걸 사야 할 지 고통스러운 결정을 할 순간이 왔다. 3권 정도 손에 들었는데 백오십 불 가까운 금액이 합산되었다. 다 살까 한 권을 살까 머릿속으로 처절한 싸움을 하며 그를 찾기 위해 걷는 데 익숙한 코트와 모르는 금발 머리 여자가 나란히 책장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머리가 좀 멍해졌다. 체구가 작은 여자가 하얀 이를 보이며 웃고 있고 그런 그녀를 내려보는 그는 어딘지 쑥스러워 하는 분위기였다. 분명 좋은 그림, 예쁜 풍경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전시회를 갔는데 처음 보는 난해한 그림을 앞에 두고 섰다랄까. 배치와 구도 그리고 안의 인물이 정해진 규격을 넘어서 이해가 가지 않으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거부감이 드는 그림. 나에게 그들의 뒷모습이 그랬다. 그들 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 다른 곳에서 책이나 읽고 있어야겠다 싶었다. 주의를 둘러보다 비교적 구석에 있는 인문학 섹션으로 가서 바닥에 앉아 책장에 등을 기대었다. 기대자마자 쥐고 있던 책 중 하나를 펴고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는 읽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맞았다. 그는 좀 더 여러 사람과 만날 기회가 있어야 할 사람이었고, 발전에 필요하다면 대인관계를 가져야 할 의무를 지닌 인물이었다. 아무나 가지지 못한 특별한 두뇌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해야 했기에 조금이라도 그에게 이로운 생활을 하는 게 교수님과 내가 인정한 동거의 조건이었다. 그러니까 내 행동이 틀리지 않았다고 자위했다. 그런데 왜 전면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걸까. 어째서 눈앞의 책을 읽지 않고 최선의 결론에 개운해 하지 못하며 곱씹고 있을까. 나는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이마를 받쳐 든 열 손가락에 무게가 느껴졌다. 무엇부터 잘못된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경수야!"


급히 머리를 쳐들었다. 그가 거친 숨을 고르며 내려보고 있었다. 목소리와 다르지 않게 인상이 다급했다. 찰나에 얼굴을 뜯어보았다. 나의 부제가 만든 긴박한 눈은 쌍꺼풀을 더 짖어 보이게 했고, 언제 나의 나른함을 싹 몰아낸 눈코입 덕분에 속절없이 기분이 나아졌다. 이상했다. 참으로 이상했다. 내가 미소 짓자, 그는 눈썹을 찡그렸다.


"여, 여기서, 뭐, 뭐해. 하..안참 찾았잖아."


"책 읽고 있었어."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 무릎 위에 책이 펼쳐져 있어 거짓을 하나 더 보태지 않아도 되었다.


"가,가...버린..줄 알았어."


"내가? 어딜가."


"모,모올라. 그, 그냥..."


그는 내 옆에 앉으며 말끝을 흐렸다. 짧은 상념을 품은 시선은 발끝 아니면 운동화 코 그쯤 어디로 자리 잡았고, 유난히 날이 서 보이는 각진 턱선이 음영을 그리며 아래로 향했다. 망설이던 그가 헛입술 질을 몇 번 했다.


"가,가..지..마. 가,가지,지,마."


나는 잠시 뭐라고 받아쳐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이내 정신을 차렸다.


"...당연히 혼자 못 가지. 저녁에 미트볼 스파게티 해먹을 건데 너 때문에 고기 엄청 많이 사놨어. 너랑 안 먹으면 그걸 누가 다 먹냐?"


내가 제대로 봤다면 그는 불안해했다. 유추해 낼 수 있는 근본은 여러 갈래가 있었다. 앞서 만난 사람들이 그를 남겨두고 각자의 갈 길을 가버렸을지 몰랐다. 또는, 스스로 거부했을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감정적으로 안정 되지 못하면 폭력성이 나온다는 걸 몇 가지 사건으로 체험했기에 불안은 없어져야만 했다. 나는 책을 내려놓았다.

"일어나자. 배고파. 집에 가서 저녁 먹자, 우리."


벌떡 일어나 코트소매를 잡았다. 그리고 '우리'를 붙여 씨익 웃었다. 그가 정말 하고 싶어 하던 말은 듣지 않기로 했다. 그 말을 들으면 안 그래도 백현이의 일로 편하지 못한 마음이 더 허해질 것만 같았다.


'혼자 가지 마.'


'혼자 두지 마.'


....아무것도 말이다.







스파게티는 금세 동이 났다. 그가 혼자 삼 인분을 먹어치웠다. 그런데도 뼈랑 근육만 있는 걸 보면 매일 엄청난 에너지를 머리로 소비하는 게 분명했다. 그의 세 번째 접시는 깨끗이 비어 있었다. 창밖은 깜깜했고 아파트와 주택의 불빛만 반짝였다. 그는 부풀어 오른 배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따라 창문 밖으로 고개를 보냈다. 밤 풍경을 감상 하던 게 아니었다. 헨리 교수님께 드려야 하는 반성문의 기한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어떻게 하면 그걸 쓰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한가하게 여유를 즐길 시간은 없었다. 


"너 학교 계속 다닐 거야?"


내가 물었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응."


"학교 다니는 이유가 뭔데?"


한쪽으로 추가 달린 눈동자가 기울었다. 이유가 있는데 말해주기 싫은지 그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답답해졌다. 일을 벌렸지만, 원인을 모르고 사정을 짐작해야 하는 날이 쌓여가니 언제까지 그의 모든 표현에 긍정하고 들어가야 하나 싶어 끝없게 느껴졌다.


"나는 마법을 부리거나 초능력이 있는 게 아니니까 네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몰라, 종인아."


조금이라도 내비쳐주었다면 이런 식으로 다그치지 않았다.


"나...나는..겨,경수,너,너처럼..와,와,완벽하지 않으니까...그럴수 이,있어. 내,내가 마,말해도 넌 모,모를 거야."


"내가 완벽하다고?"


그는 세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으,응. 넌 완벽..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완벽하다니.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아,아니야, 있어, 있어."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숨을 몰아냈다. 한숨이 몸에서 떠나자 힘이 풀린 두 팔이 식탁 위에서 떨어졌다.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물어보려다 우리가 대화하는 주제가 아님을 상기하고 이 부분은 놔두기로 했다. 반성문 작성이 더 시급했다.


"아무튼, 학교 다니고 싶은 거라면 반성문 써."


"...자,잘못 하,안거 어,어,없어."


"그래도 써. 말도 안 되고 억지스러워도 써. 그래야 학교 다닐 수 있어."


너에게 학교가 무슨 소용이니, 차라리 에니그나연구소로 돌아가서 하던 연구 다시 하는 게 어떨까, 여기에서 인생을 낭비하는 거잖아 같은 훈계 비슷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머릿속에 있는 걸 내놔.


"...나...나는..."


헨리 교수님의 수업을 두 바닥의 칠판 깜지로 반박하고도 학교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대지 못하면 또다시 면전에 대고 한숨 지을 턴데 그런 나 자신이 싫어질 건 당연했다.


"나,나는...경수가...이,있는 곳에 이,있고 시,시,싶어."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는 그가 몸을 말아 움츠렸다. 더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불안정한 호흡은 소리가 너무 커서 이쪽까지 떨림이 전해졌다. 내가 있는 곳에 있고 싶다는 그는 도통 나의 의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금 그의 의식이 심해를 헤엄치고 있다면, 주저 말고 들어가 그를 끄집어내야 했다. 그게 나의 역할이였다.


"김종인."


"....."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하고 의자가 밀려난 사이를 한달음에 걸어 그가 앉은 의자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밑에서 올려 본 그는 질끈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큰일을 저질러놓고 어른의 야단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집은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흔한 텔레비전의 소음조차 나지 않았다. 사방을 가르는 정적이 우리를 파먹으려 했다. 그게 두려웠던 나는 몸을 구부려 단단하게 웅크린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반성문 쓰자, 종인아. 응?"


밤낮 가리지 않고 따뜻했던 몸은 차가워서 금방 내 온기를 앗아갔다. 체온이 식어 가며 머리도 같이 냉정해졌다. 곧 내가 그에게 하고 있는 일이 무언지 깨달았다. 길이 돌길이고 길 같지 않은 길이라도 가야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진실하지 않은 것으로 원하는 걸 얻어야 한다면 기꺼이 거짓을 택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그에게 비겁하고 때 묻은 어른의 세계에 발들이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나의 무지가 그에게 얼마나 힘든 일을 시켰었는지, 이 일로 뒷날 얼마나 후회하게 될 것인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나의 가슴에 둘러싸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방에 없었다. 서둘러 로빈 교수님에게 전화를 해보고 그가 헨리 선생님에게 반성문을 제출하러 나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반성문을 써냈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뒤에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무작정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대충 묶은 머플러 안으로 한기가 들어오는 걸 못 느낄 정도로 그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에겐 흔한 핸드폰도 없었다. 동물처럼 단지 감각으로 그를 찾아야 했다. 그런 게 쉽게 될 리 없었다. 무의미한 한 시간이 흘렀다. 겉옷을 제대로 입지 못한 몸은 초겨울의 냉기를 고스란히 받아 굳어있었다. 가까운 벤치에 상체를 내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를 만난 후로 나는 많이 변했다. 그만큼 여러 경험을 했다. 혼자였다면 해보지 못했을 일들이었다. 특히 감정의 변화무쌍함은 이루어 말할 필요가 없었다. 굴곡도 이런 굴곡이 있을 줄이야. 남들보다 평탄한 성격으로 중도를 지키며 살아온 나에게 이건 어찌 보면 시련이었다. 그런데 싫지 않았다. 밀어내기 아깝고 그럴 수도 없었다. 깨닫고 나니, 그를 찾고 싶어 견딜 수 없어졌다.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처음은 낯설더니 두 번째라고 익숙해진 125가에 발을 디뎠다. 역시나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사람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며 그가 마틴 루터킹 아카데미에 있길 바랐다.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간 데스크에는 운 좋게 티나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화색하며 반겨주셨다.


"올 줄 알았어요, 경수."


그녀의 한마디에 긴장되어있던 어깨가 훅 처졌다.


"종, 아니, 카이가 여기에 있나요?"


"네. 백현이랑 같이 있어요. 들어가 봐요."


"감사합니다, 티나."


나는 지체없이 아이들이 있는 방 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도착한 방의 유리창을 통해 그와 백현이가 보였다. 그런데 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이는 격변하여 이따금 작은 웃음을 지어내고 자세는 편안했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들을 뚫어지게 보느라 티나가 옆으로 걸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둘이 뭐 하는지 알아요?"


티나가 내게 물었다.


"아니요."


"숫자놀이를 하더라고요. 백현이가 카이의 숫자들을 아주 좋아해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유리창 안의 둘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와서는 백현이랑 놀고 싶다고 하기에 들여보내 주었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친구가 됐어요.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와 저렇게 금세 친해지는 건 아무나 못 하는 거에요. 아이의 마음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죠. 카이는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에요."


"네. 맞아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그녀의 말에 온전히 동의했다. 그는 다르다. 나 같은 사람은 비교 대상마저 될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무엇을 했나. 순수하게 나와 있고 싶다는 표현을 했을 뿐인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위한 다는 명목으로 틀에 밀어 넣었다. 따라와 줄 것을 믿고 남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라고 시켰다. 이 얼마나 무모하고 안일한 행동이었는지. '김종인'이라는 사람을 알지 못하고 서둘렀던 부끄러움에 마주 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들어가 봐요."


"아니요. 잘 놀고 있는데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티나에게 인사를 하고 그곳을 나왔다. 나의 작은 몸은 무거워졌다. 덩달아 가슴 깨에 돌을 쑤셔 박은 만 양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실망한 무게는 곂곂히 쌓여만 갔다. 이날을 생각하고 그를 떠올리면 나는 한없이 쓸쓸하다. 그러나 그나마 절망적이지 않은 건 뒤에 우리에게 하나의 사건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지금이 앞서 말하다 접은 부분을 이야기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토요일, 5월 30, 2015

author's note 5







개인이 진행하는 비싼 데이캠프, 섬머캠프가 있는 가하면 공립 도서관이나 아카데미에서 시행하는 무료 겨울나기 프로그램도 있는데 그와 내가 들어가야 할 곳이 바로 그런 행사를 비롯한 여러 키즈관련 이벤트를 진행하고 알리는 커뮤니티였다. -말은 유창하지만 한국 부모들이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과 크게 차이는 없다. 단지 한국에 비해 여가활동에 더 치중되어 있는 편이다.- 공립기관에서 시행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절대 퀼리티가 떨어지는 게 아니며 무시로 미국 어느 지역보다 뉴욕의 교육제도는 수준이 높은 편이다. 특히 저소득층 흑인들이 밀집해 거주하는 할렘은 그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125가 역에 내려 역 계단을 오르는데 그의 얼굴이 몰라보게 굳었다. 깨닫고 돌아본 주위의 풍경에 나 또한 멈칫했다. 넓은 대로. 많은 사람. 정확히는 봇물같이 쏟아져 넘실거리는 흑인들. 낡아 보이는 가게가 즐비한 가운데 서 있는 고층빌딩 몇 개.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지 싶을 정도로 낯설고 날이 선 풍경이다. 나치군인 옆에 서 있는 유태인보다 확연히 차이 나는 생김새의 다름은 잘못한 게 없어도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외투 주머니에 넣고 있던 그의 양손과 온몸이 경직된 게 한눈에 보였다. 관찰하는 나의 시선이 따가운지 모르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발로 걸어 도착한 곳은 마틴 루터킹 아카데미 & 아트 뮤지엄이었다. 그는 들어가길 망설여 했다.


 "안 들어가?"
 "......"


입술은 쭈뻣이고 운동화 끝으로 죄 없는 시멘트 바닥을 찬다. 들어가기 싫다고 외치는 회색빛 아우라가 무섭게 꾸물거리며 목덜미를 스쳤다. 그래도 안 들어 갈 수 없는 거니까 그의 등을 떠밀어 마지 못해 반투명 유리문을 어깨로 밀었다. 타닥탁 운동화 끄는 소리를 달고 들어 간 건물 안 1층은 갤러리였다. 유명 흑인 아티스트가 그린 그림이라고 보이는 몇 점이 보기 좋게 걸려 있었다. 안내 데스크에 서 있던 풍채 좋은 흑인 아주머니가 어떻게 오셨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아, 저기, 윌링턴에서 봉사활동 때문에 왔어요. 여기."


내가 그녀에게 추천 서류를 내밀었다.


 "아, 연락받았어요. 당신들이군요! 이 서류는 본인이 직접 지금 안내해 드릴 곳에서 만나보실 담당자에게 드리면 돼요. 저는 티나 할로우입니다. 티나 라고 불러 주세요."
 "네. 미세스, 티나. 저는 경수고 얜 죠 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죠? 글쎄, 죠 라는 이름을 가질 분위기가 아닌데요? 난 '카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예전에 내가 알던 할아버지의 이름이 '카이'였는데 그와 굉장히 비슷한 카리스마를 가졌어요. 당신이 마음에 드네요."


심한 곱슬머리를 가진 티나 는 나이가 들고 뚱뚱한 아주머니 축에 속하는 외모였지만 푸근하면서도 매혹적인 미소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앞으로의 그의 인생에 획을 그을 '카이'라는 이름을 그에게 던지고 그녀는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생전 처음 얼굴을 대하는 사람이 준 이름에 전혀 거부감이 없는 듯 했다. 그의 어깨와 다리가 보기 좋을 정도로 풀렸다는 사실을 본인은 모르는 듯했으나 나는 그 순간을 생생하게 느끼고 아직껏 기억하고 있다. 익숙함이 뭐더라. 자연스러움이 뭐더라. 이것이 꼭 많이 부대껴보고 교환하고 나눠서 토해 내는 산물이었던가. 시간에 비례하는 익숙함과 자연스러움도 있겠으나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평소대로였다면 너무나 긴장했어야 할 그 같지 않게 티나를 받아들이는 걸 보는 나는 만족했다. 그녀는 가장 낮선 곳에서 팽팽하던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우리의 조력자임이 틀림없었다.


티나는 우리와 함께 담당자의 사무실로 같이 걸었다. 도중에 기초지식 파일을 읽어 왔냐고 물었다. 이틀 전, 우리가 만날 아이에 관한 주요사항을 적은 몇 장의 안내서를 로빈 교수님에게서 받았다. 물론 숙지했고 적힌 내용이 사실일까 많이 궁금했다. 그는 종이를 받아들고 읽으며 온갖 인상을 지어 보였다. 복잡 미묘한 표정을 다 읽을 수는 없었어도 동감은 할 수 있었다. 책방에 가면 이런 게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원작자의 상상에 의해 창작 된 소설. 나는 내가 읽은 아이의 프로필이 허구소설 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고 싶었다. 담당자는 흑인남자였고, 한마디로 말하면 냉소적이었다. 그는 간단히 주의사항만 말하고 바로 티나 에게 우리를 맡기다시피 했다.


 "요즘 인사 관련 문제 때문에 담당자의 신경이 날카로워서 그러니까 이해해줘요. 아, 저기 벽에 붙어서 앉아 있는 게 '백현'이에요. 작아도 눈에 잘 띄죠?"


그녀가 커다란 창문 안의 남자 아이를 가리켰다. 서류에서 5살이라고 봤던 아이는 확실히 작았다. 성별에 상관없는 긴 팔 티셔츠에 바지와 더불어 얼굴이 갸름하고 선이 가는 몸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 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끝이 쳐진 눈꼬리의, 무릎은 모아 안은 백현이가 확연히 구분 되는 건 같은 클래스의 20명 남짓한 모두가 검은색 살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지만, 이전에 그와 억지로 쇼핑을 나갔을 때 사 먹었던 흰 마쉬멜로와 진갈색 초콜릿이 마블 된 아이스크림 같았다. 웃으라고 이렇게 말한 게 아니라 표현력의 문제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아무튼, 곧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의 눈코입의 생김새가 제각기 다를지언정 보여 주는 감정은 같았다. 무기력, 그 자체였다.


 "주의서에 있던 백현이의 프로필을 읽어봐서 알겠지만, 시설을 옮기려고 해봤는데 본인이 싫어해서 여기 두고 있죠."
 "왜 싫어하는 거죠?"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내가 물었다.


 "엄마가 이 근처에 살거든요. 떨어지기 싫겠죠."


아이의 엄마라 함은, 서른일곱의 한국 여성이고 흑인 남자와 재혼을 해서 살고 있었다. 프로필 상으로 주소는 할렘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위험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위험지역에 산다는 건 수입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말이며 그에 따른 아이의 신변이 불안정하다는 뜻이다. 이쯤에서 보기 힘들었던 게 부모의 구타 경력이었다. 숫자로 명시된 횟수만이 아닐 거라는 추측에 백현이를 보는 나는 기분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가능하면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공립 유치원에 갔다가 다른 아이를 때리는 사고를 내고 여기 들어 왔는데 이번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요. 아동 전문 상담사에게 보이기도 했는데 그들에게도 별 반응이 없어서 경수와 카이에게 맡겨보려고 해요."


아무렇지 않게 그를 카이 라고 부르며 우리를 향해 웃는 티나의 눈빛은 신뢰와 기대에 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런 마음을 우리가 채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불안했다. 아무리 곁다리로 끼어든 거라지만, 특수아동을 피부로 접해 본 적 없는 나로는 나름 중책이라 여길만한 봉사활동이었기 때문이다. 부담감이 컸다. 유리창 안을 바라보던 내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양쪽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조용히 아이를 보고 있었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관찰에 가깝게 하나하나 뜯어보던 그의 한쪽 손이 유리창을 짚었다.


나는 눈먼 소녀를 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생일선물로 사주신 365장의 세계적인 명화의 사진이 인쇄 되어 있는 달력에서 화사한 색감과 함께 튀어 나 온 여린 소녀는 들판의 어디쯤에 동생과 앉아 눈을 감고 비가 지나간 뒤의 특유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공기만 들이켜는 게 아니다. 앉아 있는 곳이 어디인지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향으로 만져 확인하는 언니의 옆에 앉은 동생은 손을 잡고 뒤편, 무지개를 보고 있다. 그 자세가 무지개가 어떠한지 설명 해 주는 듯 했다. 나는 이 상황에 존 에버릿 밀레이의 '눈먼 소녀'가 머릿속에 그려진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세상을 눈으로 보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다. 그래서일까 외형으로 많은 판단을 내린다. 밑도 끝도 없는 끌림과 애잔한 사랑을 보다 살인적인 혐오마저 느낀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눈은 어떨까? 그 둘이 주는 결과물은 같을까? 나는 다르다고 알고 있다. 쌍꺼풀이 짖은 눈에 담긴 표정이 아이에 대한 동질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눈먼 소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게 김종인 말고 누가 있겠나 싶었다. 그에게 교수님이 있었던 것처럼 백현이에게 종인이가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하고 기대했다. 그걸로 답은 나왔다. 나는 백현이에게 종인이를 어서 빨리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지금 들어가 봐도 될까요? 미세스 티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내가 물었다.


 "그럼요! 지금 자유시간이에요. 이왕 가는 들어가는 김에 간식도 들고 가서 친해져 보세요."


우리는 그녀를 따라 키친으로 가서 간식박스를 챙겨 들고 교실의 문을 열었다. 삼삼오오 모여 장난치고 떠들던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잦아들고 우리에게 관심이 몰린 여러 개의 눈이 호기심에 가득 찼다.


 "안녕, 여러분!"
 "안녕하세요! 티나 선생님!"
 "오늘 자유시간에 친구들이 찾아왔어요! 여기 이 귀여운 두 보이의 인사를 들어 볼까요?"
쭈뻣거리는 폼이 먼저 소개를 할 거 같지 않아, 내가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경수입니다! 다 같이 친하게 지내요!"
 "...."
 "...종인아, 인사."
 "....."


그는 첫 만남 때처럼 입술을 떼지 않았다. 이럴 때가 언젠가 올 줄 알고 있었다. 했나 안 했나 이리저리 뜯어 봐야 하는 인사가 아니라 제대로 자신을 소개 해야 할 날이 말이다. 물론 나를 만나기 전에도 이런 순간은 있었겠지만, 성격적 결함이 있다는 이유로 안일하게 넘어 갔겠지 싶다. 그래서 이럴 때를 대비해 집에서 연습해 둔 게 있다. 온종일 쏟아 붓는 엄청난 장대비 때문에 집에 있게 된 어느 날 저녁, 닭다리를 여러 개 꺼내 손질을 하는데 그가 냉장고에 머리를 기대고 섰다. 비린내를 없애려고 우유에 재워두는 걸 유심히 보던 나른한 눈이 조용히 나를 훑어보았다.


 '뭐야. 뭐 할 말 있어?'
 '으음...아,아..니...'


끝을 흐리는 게 아닌 게 아닌 거라 할 말이 있으면 쳐다만 보지 말고 말을 하라고 다시금 재촉했다. 솔직히 이런 식의 눈길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때마다 뚫어질 것만 같은 기운을 느끼는 게 대부분이라 왜 쳐다보는지 모르겠고 내심 불편했었다. 그런데 익숙해지다보니 의외로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냄새, 행동이 익다보니 확실히 둘만 있는 게 편해졌다. 그럼 조금씩 훈련을 해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채소를 자르는 칼에 힘이 들어간 걸 봤는 지 그가 흠칫 했지만 모르는 척 했다.


 '매,매,'
 '응. 맵게 만들 거야. 아주 맵게.'
 '그러,지..마, 마..아.앗,어,'
 '내가 만드는 거 맛없다고 하는 사람한테는 안 줄 거야.'
 '....'
 '마켓 아주머니한테 인사 안한 사람한테도 안 줄 거야.'
 '......'


일부러 보지 않아도 두꺼운 위아래 입술이 오리 주둥이만큼 튀어나왔을 거였다. 그래도 우리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멀뚱멀뚱 서 있는 거 보다는 이 기회에 억지로라도 가르쳐 보는 게 났겠다 싶었다. 닭 다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 잡내를 제거하고 보란 듯 미리 만들어 놓은 묽은 양념장을 들었다. 다른 손에는 고추장을 듬뿍 뜬 숟가락을 들었다. 나의 행동 때문에 잘 생긴 이마에 주름이 쫙 잡히고 집게손가락의 손톱이 아랫입술로 향했다. 빨간 고추장과 그릇 안의 간장 양념장을 번갈아 보는 눈동자가 바쁘다.


 '인사 잘할 거라고 약속하면 매운 거 안 넣을 게.'
 '나,나,이,이인사,자알,해에...'
 '아닌 거 같은데~'
 '나, 자알해에~'
 '잘 들어, 김종인. 앞으로 인사 하라고 할 때 안 하면 이거를 막 두 번 세 번 넣을 거야. 무슨 말인 지 알겠지? 너무 매워서 너는 닭!다!리!를 못 먹을 거라는 말이야. 알았어?'
 '어....'
 '어? 대답하는 거봐. 닭!다!리! 안 먹고 싶은가 보네~?'
 '아,알았어!'


비장한 표정으로 급히 대답하는 게 어찌나 웃긴지 배를 잡고 크게 소리 내 웃고 싶었지만 이를 꽉 물고 참아야 했다.


 '어떻게 인사 할 건데? 지금 해봐.'
 '지,지..그..음? 시,시러.'
 '싫으면 이걸 여기다가 너,'
 '아! 아! 알아,았어!'
 '그러니까, 해보라니까.'
 '...아,안녕하...세에..요, 기...기임 종,조옹이,인 입니...다...'
 '너 오늘 닭다리 하나 먹을 때 그 말 한 번씩 하고 먹어. 알았지?!'


억울한 눈 끝이 확 찢어져서는 체스경기에서 상대방의 반칙에 패한 만 양 씩씩거리는 콧김이 뜨거워도 절대 굴하지 않고 인사연습을 시켰다. 그러니까 지금 그를 올려보는 내 무언의 압박을 잘 알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예상대로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아이들을 둘러 본 후, 입을 열었다.


 "아...안녀..엉 하세에요...조....카아이입..니다..."


어색하게 손을 슬쩍 올렸다 내리고 나서 사지가 굳어서는 눈을 내리 깐 모습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수십 년간 자신의 감정이 만들어 버린 벽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을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비록 덜덜 떨고 있어도 싸웠고 값지게 승리했다. 나는 그가 자랑스러웠다.


"카이랑 경수가 간식을 나눠 줄 건데 받으면 뭐라고 해야 하죠?"
 "고마워요!"
 "맞아요! 재밌게 놀고 있어요, 여러분!"
 "네에!!"


자유분방한 대답 소리에 깔깔거리는 웃음과 아이들만이 아는 잡담이 섞였다. 티나 는 싱긋 웃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실을 나갔다. 신기하게 크게 낯가리는 아이가 별로 없어 간식을 받으러 나오는 줄도 자기네들이 알아서 잘 서서는 사과와 작은 스낵봉지 그리고 우유를 받아들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걔 중에는 나는 이름이 뭐라고 해요 라든가, 되게 하얗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어디에서 왔어요? 라고 질문을 하는 아이도 있고 옆에 앉아서 사과를 베 먹는 애가 있는 가하면 미국식 쌔쌔쌔를 하는 여자애들도 있고 친구와 수다를 떠는 애,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백현이가 있다. 백현이는 간식을 받으러 나오지 않았다. 앉아 있던 구석에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쭈그리고 있었다. 나는 아까부터 그가 백현이를 힐끔거리는 걸 눈치 채고 있었기에 옆구리를 쿡 찔렀다.


 "빨리."


나의 가벼운 재촉에 그는 조심스레 간식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백현이에게로 걸었다. 멀어지는 넓은 등을 약간은 걱정스럽게 지켜보는데, 양 갈래 곱슬머리의 흑인 여자아이가 걸어왔다.


 "굥수! 굥수! 나랑 그림 그리자!"
 "그래! 좋아! 하자!"


슬쩍 곁눈질한 한쪽 구석에서는 덩치만 커다란 아이와 몸 마저 작은 아이가 벽에 붙어 앉아 있었다. 핑크색 콘크리트 벽과 등 사이에 풀이 발라져 있는 듯 서로를 보지 않는다. 바로 옆에 성인 남자가 앉아 있으니 신경이 쓰일만 한데 아이는 연약한 고개를 박아버렸다. 그런 새 친구의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앉아있던 그가 어느 순간 양팔로 무릎을 끌어 안았다. 백현이가 취하고 있는 자세였다. 아이들의 탁자에 턱을 괴고 육지에서 떨어진 섬을 보는 기분으로 주시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흑인 아이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내 관심이 자기에게 있지 않아 뚱한 표정이였다. 나는 환하게 웃어주고 여아이를 달래느라 둘의 사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들과 놀다 문득 생각나 고개를 들고 둘을 찾았을 때는 구석 테이블에서 둘 다 열심히 그림 그리기에 열중 해 있었다. 백현이가 쥔 거친 오일 크레파스가 조심스헙게 도화지에 색을 입혔다. 연하고 작은 손이 검정 크레파스를 잡고 놓치 않았다. 옆에 앉아 있던 그는 딱히 이유에 대해 묻지 않고 아이보리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더니 자신의 앞에 있던 종이에 무언가를 그려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얼굴이 그려졌다. 하얀 피부에 눈이 크고 빨간 입술이 통통한....


"이거 굥수다! 굥수!"
"맞아! 굥수!"
"와! 귀여워!"


그의 주위에 몰린 아이들 모두가 나와 똑같다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삐뚤한 선이긴 하나 아이들의 말은 맞았다. 놀란 눈으로 그의 등 뒤에서 도화지를 응시하는데 큰 어른 손이 그것을 덮어버렸다. 손의 주인은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이들이 정답을 맞춰서인지, 아니면 그림을 못 그렸다고 생각해서 인지에 대해 나는 깊게 궁금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눈치를 보는 눈동자가 이따금씩 나를 향해 있는 이유는 내 얼굴을 그렸는데 본인이 봤으니 그저 부끄러우니까 그렇겠지 정도로 짐작 할 뿐이였다.


"나도! 나도 굥수 구릴꼬야!"
"나도! 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아이의 마음이라더니 갑자기 다들 나를 그리겠다고 성화였다. 어떤 아이의 도화지 위에서 나는 빨간 살갗을 했고, 또 다른 아이는 검은 자위를 개구리 만하게 그려냈다. 저마다 '도경수'를 투영하는 눈은 달랐지만 틀림없이 따뜻하고 순수했다. 어쩌다 내 얼굴 그리기 대회가 되어 버렸는지 모르지만 모두가 즐거워해서 그냥 좋았다. 한편 나는 그의 옆모습을 그리기로 했다. 투박한 굴곡을 지닌 이마와 코 그리고 턱은 척척 그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늘색 크레파스를 집었다. 굵은 선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사이, 백현이는 티끌하나 없던 흰 도화지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줄어만 가는 흰 종이는 빈큼없이 매워져가는 검정에 묻혀 이내 먹지로 변했다. 그제서야 백현이의 손은 멈췄다. 나는 여러가지 의미로 이미 굳어있었다. 어찌할바를 몰라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그는 마치 심연을 뚫을 것 처럼 미동 없이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백현이를 보았을 때, 나는 아이가 쥐었던 크레파스의 색이 단순히 검정일리 없다고 느꼈다. 어쩌면 언어로 설명 해낼 수 없는 저 밑바닥에 있는 색이리라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래봐야 열살도 되지 않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 지 나는 모른다. 나 또한 열살일 때가 있었으나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외로움과 그에 따른 서러움은 없다. 그런데 백현이는 달랐다. 감당 할 수 없이 요동치는 고독은 선명하게 남아 그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 죽기 전까지 괴롭힐 거라고 내 직감이 말해주었다.  나는 고독의 조건을 모른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발현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혼자 있으나 군중 속에 있으나 고독은 찾아오고 결론은 같다. 의식이 점점 내려가다 정신과 육체가 감각을 잃고 사라져버리고 만다. 떄때로 울지도 못한다. 내가 이미 그 곳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램브란트의 '명상에 잠긴 철학자' 라는 그림에서의 철학자가 제목 그대로 명상을 하고 있다고 말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명상을 떠올리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어둠 속의 철학자는 바로 옆 창문으로 들어 오는 환한 빛을 인지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건 내가 본 아이와 같았다. 백현이가 눈을 감은 것과 뜬 것이 뭐가 다를까. 어차피 아이의 세상은 도처의 빛을 모른 채 표현 못 할 고립이라는 잎사귀로 곂곂이 싸여 출구는 커녕 틈도 없어 보였다. 떠오르는 그림이 주는 인상에 가슴이 서늘했다.

        


화요일, 5월 26, 2015

author's note 4













교수님 오피스에 방문을 할 때엔 언제나 하나의 목적이 있었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교수님은 나를 보자마자 커피를 권했지만 거절하고 소파에 앉았다. 로빈 교수님은 좀 피곤하셨는지 머그잔에 커피를 가득 채워 맞은 편에 앉으셨다.


 "헨리 교수와 얘기를 해봤는데 말이네. 그는 일주일 뒤 총 교수회의에 이번 일을 이슈화시킬 생각을 피력했네. 아무래도 종인 군이 헨리 교수의 눈에 단단히 빗겨간 모양이더군. 아, 종인 군은 지금 어디 있나?"

 "집에서 자고 있어요. 계속 불안해하다가 잠들었어요. 왜 교수님을 구타했는지 물어봤지만, 말을 안 해요. 뭔가 아시는 거 있으세요?"

 "헨리 교수는 처음부터 종인 군이 이 학교에 입학하는 걸 반대했었지. 미카엘 김 선생님을 통해 알고 있겠지만 아스퍼거장애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기 때문에 제어할 수 없을 상황이 발생할 경우를 곤란해했어. 당연히 나도 그 점은 인지하고 있어서 종인 군의 보호자가 되기로 한 거네. 그래서 우리 학교에 받아들여진 거야. 그렇지만 자존심 높은 헨리 교수는 종인 군이 자신의 물리학 강의를 듣는 것 자체를 싫어하네. 모든 강의에 반론을 제기하기 때문이지. 언젠가 두개의 칠판을 가득매우고 그 뒤의 칠판마저 채운 엄청난 공식으로 많은 학생들 앞에서 헨리 교수를 당황시킨 적이 있네. 그 뒤로 그는 종인군은 벌레 보듯 싫어하지."


기나긴 이야기 끝에 겨우 커피 한 모금을 마신 교수님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말하면, 전에도 말한 것 같지만 종인 군은 이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네. 에니그마 연구소도 그렇지만 여러 단체에서 정기적으로 연락이 오고 있어. 사회성만 조금 좋아진다면 그들 중 한 곳에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문제는 본인이 거부하는 것에 있지. 애써 이곳에 머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네. 이런 문제까지 일으키면서 말이지. 그게 이번 학생회에서 큰 걸림돌이 될 거야. 그리고 종인 군은 싫다고만 표현하지 왜 인지 말하지 않아. 나에게도 단 한 번도 말을 해온 적이 없어. 발단은 알지만, 종국에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네."


한숨은 내가 먼저 쉬었다.


 "일단 총 교수회의에 이 안건이 붙여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네. 그러니까 경수 군은 종인 군이 안정 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네. 교수님. 저, 그런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교수님은 이렇게 곤란한 일이 생김에도 불구하고 왜 종인이를 사회화 시키려 하는 거죠?"
 "그것을 설명하려면 종인 군과 나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니 그건 이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 느긋하게 하기로 하지. 그래도 되겠지? 경수군?"
 "아, 네. 교수님."


그랬다. 나는 이제 슬슬 로빈 교수님과 그의 첫 인연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혼자 불안하게 서성거리는 나를 누가 보고 있다면, '정산 산란하니까 앉아있어!' 라고 호통을 칠지 몰랐다. 입 다물고 가만히 앉아있기는 내 특기였지만 엉덩이에 불이 붙은 원숭이처럼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같은 문을 백 번은 넘게 쳐다봤다. 초조했다. 쳐다보는 문 안에서는 그와 더불어 증인 그리고, 여러 교수를 포함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벌써 두 시간 을 넘겼는데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몸을 떨구듯 몸을 앉혔다. 교수회의가 열리는 오피스 바로 옆 의자에 말이다.


교수회의는 사일 만에 열렸다. 그는 사일동안 일시정학 조치를 받아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나는 학교에 있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에 사건에 대해 다그쳐 물었지만,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앉아서 밥 먹고 떠들고 책을 봤던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멍한 표정으로 숫자와 공식을 써내려갔다. 생각 같아서는 구겨진 종이와 연필을 빼앗아 들고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게 하겠다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엉덩이가 저리도록 부엌 창문틀에 앉아 있다 문득 그가 아보카도와 다를 바 없다 느꼈다. 칼집을 내었을 때 어느 정도까지는 물러서 잘 베어낼 수 있지만, 씨에 다다르면 아무리 비집고 들어가려 애써도 노력은 튕겨 오른다. 결정적인 때에는 언제나 이 모양이었다. 그의 (정확히 그 장애가 아니라고는 하나) 병명도 알고 약간의 공부를 했음에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는 거의 피곤에 절은 상태로 힘들게 눈을 감았다. 어제의 대화가 머리 속을 휘집어 놓았다.


'코코아 마실래?'


음악조차 흐르지 않는 움직임 없는 공기에 질린 나머지 내가 물었었다. 실은 나의 물음은 이것 뿐 만이 아니었다. 앞서 말 했지만 거두지 못 할 의문에 자꾸 그 사건에 관한 일을 틈만 있으면 물어보았다. 그가 나쁜 일을 하지 않은 건 알았고 교수회의까지 잊으려고 했는데, 나라는 사람으로써 무리 였다. 그리고, 끝끝내 그의 침묵에 질렸다.


'이제 안 물어 볼게. 그러니까, 마실래?'
 '...으..응.'


적어도 내 말을 믿어는 주는구나. 들리지 않게 한숨을 터트리며 안심했다. 진한 코코아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옆에 앉았다. 그의 상체가 들리더니 조금 비켜 머뭇거렸다. 초딩도 아니고 이렇게 적나라하게 삐졌다는 표현을 꼭 해야 하나 싶다가도 그 라서 밑도 끝도 없이 이해가 된다. 나는 그의 주먹 쥔 손을 잡아 억지로 손가락을 펴, 머그잔 손잡이를 끼워주었다.


 '맛있게 먹고 내일 교수회의에서 떨지 말고 잘 말해.'


그는 코코아를 깨끗하게 비우고 소파에서 새우잠에 들었다. 비해, 어젯밤을 꼴딱 세운 나의 눈은 무겁고 흰자위에 핏줄이 섰다. 다행히 귀는 먹통이 아니어서 교수님들의 이야기와 증인으로 참석한 학생의 증언이 중간 중간 들려왔다.


 "그래서 헨리 교수님께서 죠에게 질문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보기엔 무시하는 행동처럼 보였습니다."

 "그 뒤 상황도 말해보게, 로버트군."

 "헨리 교수님께서 죠가 쓰고 있던 연필과 종이를 다 거둬 가셨어요. 그랬더니 벌떡 일어나서 헨리 교수님의 배를 주먹으로 강타했습니다."

 "그런 행동을 일으킬 만한 발언을 헨리 교수가 했었나?"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몰아가시면 종인학생의 상태로는 자기 변론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종인 군의 장애를 익히 알면서 경솔하게 행동하신 헨리 교수님에게도 이 사건의 책임은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처음부터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부터 문제가 있어요. 재학할 명분이 없는데 무리해서 넣은 것 아닙니까. 그래놓고 문제가 생기면 교수의 책임이라 몰아가는 건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죠."

 "그렇다고 장애를 빌미로 반론의 여지도 주지 않고 몰아가는 건 교수로서 실격입니다."

 "종인 군이 헨리 교수에게 폭력을 행사한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이상 선처는 불가능합니다. 장애가 있건 없건 학교의 학생은 모두 평등한 처분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저는 학생의 정학에 찬성합니다."

 "종인 학생의 입학은 다수결로 인정된 사안입니다. 당시 협조를 부탁했을 때 긍정적 반응을 보여주시고 이제 와서 일반학생들과 동등하게 대하시겠다는 말은 굉장히 모순입니다."

 "정학이 과하다는 의견이시라면 폭력행사의 정당한 이유를 포함한 반성문을 제출하고 봉사활동을 기준보다 두 배로 늘리는 것을 제안합니다."

 "거기에 정식 사과도 해야죠. 본인의 정식 사과가 없다면 이 학교의 학생으로서 행사한 폭력이 정당했다고 인식한다고 간주하고 학교의 취지에 부합되지 않으므로 정학 처분에 관한 회의를 진행 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발언의 반 정도는 동의했다. 전말이 어찌 되었든 교수에게 폭력을 행사한 행위는 사과해야 마땅하다.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듣기 좋다던 목소리는 어디로 날아가서 돌아오고 있지 않는 것이었을까.








이 모든 것을 뛰어 넘어, 나는 오늘 사건을 계기로 만난 '백현'이라는 이름의 아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전에 결과적으로 어떠한 처분이 그에게 내려졌는지 먼저 말을 해야 하겠다. 정학이 아닌 게 어디냐며 로빈 교수님은 안도 하셨지만 정작 김종인 본인에게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윌링턴대학은 정규 전공과목만큼이나 봉사활동이 학기 스코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점수의 비율을 높게 정한 학교인데 거기서 두 배라니. 학기 중, 170시간 가까이 봉사에 매달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책상에 앉아 공부할 시간이 현저히 부족한 나와 장애를 가진 그의 경우, 학교에서 추천하는 단체에 간접 재능기부로 봉사를 해왔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정해진 곳에 직접 방문해야 했다. 문제는 다른 이들처럼 활동적 봉사가 가능할지였다. 하지만 계속 학교 다니고 싶다면 할당된 시간을 꼭 채워야 했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에 대한 상담을 하러 로빈 교수님의 오피스로 향했다.


 "아, 경수 군. 어서 들어 오게."


얼굴을 보자마자 방긋 웃는 교수님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걱정하셨던 그의 사건이 그나마 가벼운 축에 속하는 벌로 마무리 되어서인 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기 앉게."


교수님의 고갯짓이 가리킨 건 내가 지겹도록 말한 녹색 소파였다. 분명 편하게 아무 곳에나 앉으라는 뜻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의자는 나에게 나름 특별한 의미였기에 올 때마다 앉던 흰 소파에 궁둥이를 붙였다. 교수님은 손에 두 개의 노란 봉투를 들고 오셨고 소파 앞의 테이블에 올려두셨다.


 "이게 경수 군과 종인 군이 봉사를 나가게 될 곳에서 쓰일 서류들이야. 시간 있을 때 잘 읽어보고 가길 바라네. 뒤에 보면 한 아이에 관한 프로필이 있는데 그쪽에서 꼭 숙지해달라고 했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요즘 종인 군은 어떤가."


나도 모르게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그와 나는 반성문 쓰기라는 엄청난 난관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반성문은 기한이 없었으나 늦어질 경우 교수들에게 눈총을 받는 건 불 보듯 뻔했기에 가능한 한 빨리 제출해야 하는 데 그는 쓸 마음이 없어 보였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봉사를 나가기 전에 제출하고 싶지만, 지금까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꽉 막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자, 교수님이 작게 실소하셨다.


 "종인 군이 고집이 세지?"
 "네."


알만 하다는 표정에 나는 바로 긍정했다.


 "나도 그 녀석의 고집 때문에 많이 애를 먹었었지. 하지만 나보다 경수 군의 말을 잘 듣는다는 걸 알아주게. 우리 집에 있었을 때에는 굉장했어."
 "그랬을 거 같아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세히 듣지 않아도 내가 매일 그와 생활 하며 부딪히고 있었으니까.


 "아, 그렇지. 저번에 우리가 얘기하던 거 말이야, 종인 군이 나와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한 이야기 말일세, 길어질지 모르니 여기서 나가서 캠퍼스 산책이라도 해보겠나?"
 "네. 좋아요.“


외투를 챙겨 든 교수님과 나는 뚜벅뚜벅 교정을 나왔다. 나오기 전에 학교 안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 아웃 했는데 2달러의 커피는 서늘한 기운을 녹여주는 역으로 만족해야했다. 그저 그런 커피 맛에 입을 쩝쩝거리는데 교수님이 물어오셨다. 


 "타지에서 학교생활 하기 힘들지 않나? 보통 영어권 학생이 아닐 경우에 수업내용을 알아듣기가 어렵다 하는데 말이야."


 "수업내용을 전부 레코딩해서 다시 듣는 건 여전하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는 거 같아요."

 "그런 와중에 내가 종인 군을 맡기는 바람에 고생이 많겠군.“

"음... 솔직히 말해도 된다면 공부시간이 줄어든 건 좀 신경이 쓰이긴 하는 데 크게 불만은 없어요. 종인 이는 제가 지금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는 많이 달라서... 음... 소통하기 불편할 때가 있긴 하지만 편할 때도 있고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같이 있어서 싫지 않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종인 군이 경수 군을 잘 따른다는 판단에 주위에 있어달라 했지만, 경수 군에게 너무 큰 짐을 안겨준 게 아닌 가 내심 걱정을 많이 했지. 내 욕심이 피해를 준다면 안 되니까 말이야.“


사람이 살면서 맺는 작고 큰 인간관계의 삐거덕거림은 사실 즐거움이다. 삶이 지속되면서 내 머릿속에는 세 개의 분리된 파일이 생겨났다. '잘 맞아', '안 맞아', '모르겠어' 라는 파일 안에는 수많은 인물이 끼워져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쪽을 더 우선시한다거나 그런 건 없다. 나와 안 맞더라도 사람이며 맞아도 몰라도 사람이다. 이쪽에 끼웠다가 저쪽에 붙여봤다 하는 마음의 결정을 하면서 달달하고 행복한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싫은 느낌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걸 크게 보면 삶의 이벤트이며 해야 할 경험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보다 사회라는 놀이공원이 세워진 벌판이 즐거울 게 당연한 일. 그렇다면, 들어가서 만만한 메리 고 어라운드나 무서운 제트코스터를 타자. 이게 내 신조이니 그와의 관계는 천천히 넓고 깊게, 여태껏 사귀었던 누구보다 신중을 기해 즐거워지고 싶었다.


 "저는 공부도 종인 이랑 친구 하는 것도 다 즐거워요, 교수님.“
"경수 군이 좋아지려 하는 군.“
"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수줍게 커피를 홀짝였다. 교수님은 눈앞에 보이는 분수대 턱에 앉자 권하셨고 몇몇 학생들이 있는 틈에 섞여 앉았다. 날씨는 화창했고 하늘은 높았다. 약간 쌀쌀했지만 좋은 날씨였다. 날이 좋다며 커피를 들이켠 로빈 교수님께서 조금 무겁게 입을 여셨다.


 "내가 2년 전에 UCLA에 잠깐 객원교수로 갔었는데 말이야. 알다시피 그곳이 수학계에서는 학교명성에 걸맞게 최고의 선생들이 모여 있어서 수학에 일가견 있는 학생들이 모여들지. 그 학교에서 나는 같은 수학과의 테렌스 교수와 작업을 했는데 어느 날 그의 책상에서 입학 원서를 하나를 발견했지. 그게 종인군의 원서였는데 그는 종인 군을 꼭 UCLA로 데리고 오고 싶어 했어. 나는 궁금했지. 수학계에서 천재라는 말을 듣는 테렌스 교수가 열성적으로 관심을 쏟는 학생이 어떤 사람일까 말일세. 입학원서를 살펴보다가 학력란에 고등학교 중퇴라고 적혀있길래 다른 란을 자세히 읽게 되었어. 집은 흑인빈민촌에 있었고 그 안의 학교에 다녔는데 알고 보니 이 학교가 다른 학교의 문제아들을 모아놓은 학교더군. 보통 그런 학교는 졸업장을 위해 다니는 데 중퇴라니 뭔가 이유가 있겠다 싶지 않은가. 그런데 수상경력에 AMC 12 수학경시대회, AIME, USAMO에서 모두 탑을 차지했다고 나와 있었다네. USAMO는 말이야, 전 대회(AMC 8, 10, 12&AIME)에서 미국에서 천재라고 뽑힌 250명이 겨루는 수학대회인데 250명 중에 속하기만 해도 이미 굉장한 일이야. 종인 군이 국제올림피아드에 나갔으면 거기서도 1등을 했을 거라 장담하네. 어쨌든 대회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그의 비상함에 테렌스 교수와 존 드레이크 씨(에니그마 수학연구소 소장)가 관심을 가졌지. 테렌스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올림피아드에 나가려 했지만 본인의 의지가 없고 무엇보다 가정문제가 있어서 환경이 불안정 하다고 했다네.“


긴 이야기에 교수님은 잠시 숨을 돌렸다. 나도 긴장을 잠시 풀고 커피를 들이켰다.


 "애초에 대회를 나갔던 것부터가 본인의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 하더군. 종인 군이 다니던 학교가 평판이 좋지 않으니까 홍보를 위해서 교장이 억지로 내보낸 모양이야. 나는 종인 군이 대회나 겨루기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네.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거든. 사람이란 본능에 따라 뽐내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지. 그러다보면 욕심이 생겨 본래의 목적을 잃곤 하는데 어린 나이의 아이가 어떻게 과시욕이 없는지 궁금했어. 나는 테렌스 교수에게 그를 만나보고 싶다고 청했네. 하지만 사람과의 접촉을 꺼린다고 했어. 받은 전화번호로 몇 번을 걸어도 전화는 받지 않았지. 그래서 찾아갔네. 찾아가도 단번에 만나지 못했어. 왠지 오기가 생겨서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그 안에서 하루를 보냈지. 늦은 밤에 집으로 들어가는 젊은 동양 아이가 있길래 종인 군이라고 확신했네. 뒤따라가서 전화했던 사람이라 말했더니 경계하는 눈으로 가라고 더듬거리며 말하더군. 나는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어.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네. 매몰차게 집으로 들어가 버렸지. 그 뒤에도 찾아갔네. 두 달을 넘게 찾아갔을 거야. 주위에 사는 흑인 소년들이 종인 군에게 돌이나 쓰레기를 던지면서 시비를 걸길래 쫓아준 적도 있었고 점심이나 저녁을 사 들고 가서 현관문 앞에 두고 오기도 했지. 그리고 기회는 왔어. 내가 자기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늦은 오후에 차창 문을 두드렸네. 그제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거지.“


"가끔 인내를 시험하는 경우가 있곤 하죠."


교수님도 내 말에 동의하며 크게 웃으셨다.          


 "맞아. 마치 내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싶다는 것처럼 말이지.“

"정작 본인은 경계심 밖에 없는데 말이죠.“

"하하하, 경수 군. 그건 맞네. 내가 보기에도 다른 의도는 없어 보여. 어쨌든 그와 나는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했네. 알겠지만 몇 번을 만나도 대화다운 대화는 하지 못했어. 극도로 사람을 싫어해서 방어적이라 묻는 말에 대답하는 정도였지. 하지만 중요한 걸 알게 되었네. 종인 군이 원하는 건 UCLA의 입학이 아니라 안정하고 살 수 있는 주위 환경이라는 걸 말이야. 나는 그걸 알게 되고 바로 테렌스 교수에게 따지러 갔네. 입학원서는 본인이 작성한 게 아니라 테렌스 교수가 존 드레이크 씨와 함께 무력으로 추진하는 일이었어. 나는 격하게 반대했네. 무엇을 하든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고통이 클 테니 종인 군에게 힘든 일일 거라 말하고 인권시위단체에 진정서를 넣을 거라 권고했네. 결국, 테렌스 교수와 존 드레이크 씨는 나에게 종인 군을 맏아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어. 대신 에니그마 연구소에 종인군을 연수시켜야 한다 했지. 그 또한 그가 원해야 할 수 있는 일이라 의견을 물었네. 에니그마 연구소에서 리만가설을 연구해야 할 거라 했더니 종인군의 눈이 번쩍 뜨였네. 말 그대로 번쩍 말이야."

"소수연구를 말하는 건가요?"

"맞아. 종인군의 머릿속에는 소수와 우주가 가득 차 있지. 우리가 몇 세기에 걸쳐 밝히지 못한 모든 가설들과 추측은 곧 물리로 연결되어서 그의 머리 안 세계를 만들어낸단 말이네. 이건 경수군이나 나는 범접할 수 없는 종인 군만의 세계야. 마치 아인슈타인의 뇌 속처럼 탐구하고 싶게 만들고 두근거리게 하지. 뭐든 다 꺼내보라고 재촉하고 싶다고. 아주 매력적이야."

"로빈 교수님에게는 그렇겠어요."

"모든 수학자의 마음이지. 종인군은 에니그마 연구소로 들어갔네. 나는 그가 잘 적응할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어. 아무리 수학이 혼자만의 싸움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도 인간관계는 꽃피우기 마련인데 누구와도 잘 지내지 못했어. 존 드레이크 씨는 그를 상담치료사에게 보냈네."

"미카엘 김 선생님이요?"

"맞아. 나도 종인군의 심리치료를 권하려던 참이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순탄치 않았어. 거부를 심하게 해서, 특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했지. 치료는 이어지지 못했고 나중에는 연구소도 그만두었지. 하지만 존 드레이크 씨는 물적 지원을 멈추지 않았어. 왜냐하면 종인 군이 연구소에서 치룬 테스트에서 단번에 풀어 낸 추측 때문이야."

"아, 그 푸앵카레의 추측이군요?"

"맞아. 그 추측은 수학능력에 물리학 지식과 상상력이 없다면 풀지 못할 철학적 난제야. 알아도 완벽히 이해해서 증명하기 어려운데 갓 17살 된 소년이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여 풀어버렸네."

"종인 이에게 매력을 느낀 건 교수님만이 아니네요."

"그렇지. 존 드레이크 씨는 종인 군이야 말로 리만가설을 증명 할 힘이 있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지. 드레이크 씨는 종인 군을 거의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네."


로빈 교수님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내가 뉴욕으로 되돌아와야 할 즈음 종인군은 나와 같이 갈 것을 원했네. 그의 동의로 내가 재직하는 윌링턴대학에 입학했고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 거야. 나는 종인 군을 어떻게든 사회화 시켜서 그가 이루어 낼 수 있는 일을 좀 더 크고 광대하게 만들어주고 싶네. 그럴 수 있는 자질도 있고 기회도 있어. 하지만 걸림돌이 있지. 사람은 어느 정도는 사람 사이에서 살지 않으면 말라죽어. 이건 만물공통의 법칙이네. 사회화로 그의 장애가 좀 더 순화될 수 있을 거라 나는 믿어."

"어려웠네요. 여기까지 오기가."

"아무래도 쉽지는 않았지. 나 혼자 해결하기에 벅찼지만, 경수 군이 있으니 왠지 이제부터는 일이 잘 풀릴 거 같은 기분이 드네."


나는 보란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럴까요? 반성문 쓰기도 이렇게 진을 빼는데요?"
"걱정 말게. 쓰게 될 거야. 꼭 써야 할 이유가 있을 테니까."
"무슨 이유요?"
"그 이유를 밝히는 건 내 소관이 아니고 또, 증명하기도 어려우니 이 문제는 경수 군에게 넘기도록 하지. 안 그래도 나는 풀 문제가 많아.“
"수학과 교수이신데 어련하시겠어요.“
"그 말 대로네. 긴 이야기였는데 지루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네. 경수군."
"재미있었어요.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수 군에게 필요할 같아 말한 것뿐이니 고마워하지는 말아. 커피도 다 마셨고 이제 나는 다음 수업을 가봐야겠군,"
"네. 들어가세요. 교수님."

손을 들어 보이고 교정을 걸어가는 교수님의 뒷모습은 무언가 모르게 듬직했다. 이렇게 저를 염려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김종인은 알까 싶었다. 이번 대화로 내가 그를 상대하며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교수님의 희망이라는 무게가 얹어졌음을 인식했다.









 ******          

    





모든 이의 방은 방주인의 냄새가 배게 마련이다. 그의 방에서도 그랬다. 숱 많은 머리카락을 휘릭넘기고 남은 반동으로 귀를 괴롭히다가 다물어진 아랫입술을 이 사이로 밀어넣는 뭉툭한 손가락이 그리는 선. 무심하면서 지극히 안정된 선은 정해진 방향으로 선회 해 그의 후줄근한 티셔츠를 잡는다. 쇄골에 닿은 네크라인을 펄럭이는 동작을 훔쳐보는 내 시선의 온기는 그때 떨어져 나간다. 이래서야 봉사활동을 나가는 곳에서 환영 해 줄리가 없는 게 당연했으니까.


싫다는 그를 억지로 잡아끌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럼 기다렸다는 듯 도리도리 급하게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새의 날개처럼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이 풍기는 냄새로 표정이 굳으면 고개도 일시 정지. 눈썹이 요상한 굴곡을 그려도 자비는 저기 외계로 던지고 일주일 넘게 입었을 티셔츠부터 벗겨낸다. 뒤이어 바지버튼도 게 눈 감추듯 풀고 아래로 내린 다음, 욕조에 물이 다 받아지면 쭈뻣쭈뻣 들어간 그를 위해 머리를 감겨준다. 실은 위해서가 아니라 잔소리의 스타트를 알리는 버튼을 누른 것이랄까.


 "갔는데 애들이 너한테 냄새 난다고 피하면 좋아?! 애들은 생각한 걸 바로 입으로 말한단 말이야. 그냥 가면 애들이 너 거지라고 부를 거다!! 하긴, 네가 그걸 알면 매일 씻었겠지."


별말 없이 입술을 쭉 빼고 모아 욕조 안 거품을 부는 저 주둥이를 때려주고 싶은데 말은 못하고 대신 괴수 발톱에 빙의해 벅벅 긁었다. 덕분에 오뚝이처럼 머리가 이리저리 휘둘려도 말이 없다. 그나마 나랑 같이 가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라 라고 우쭐해 보지만 그나마도 반사 당했다. 교수님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애를 데리고 사셨는지 저절로 혀가 쯧쯧 하고 내둘러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유치원 새싹반 아이처럼 손이 간다. 저번 쇼핑에서 사 온 아이보리 색 스웨터를 입히고 검정 바지에 하운드투스 코트도 입혔다. 꾸미고 나니 나름 괜찮게 보였다. 솔직히 많이 멋있었다. 얼마 하지 않았으나, 감상은 접어두겠다. 우리는 서둘러 집을 나왔다.


 "너 왜 학교 다니고 싶어?"


올라탄 서브웨이 빈 좌석에 나란히 앉자마자 물었다. 나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힐끔거리는 시선을 의식했지만, 그는 아예 모르는 듯했다. 그의 눈이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없으니 당연했다. 오히려 내가 그들을 의식하고 불편한 눈길을 주고 있었다.


 "아니, 그렇잖아. 네가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동의했으니까 퇴출은 면한 거잖아. 딱히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되는 스펙인데 다니고 있으니까. 나 같으면 시간 낭비 일 거 같은데. 맨날 푸는 소수도 그렇고."
 "....배...고파."
 "야."


눈알이 빠질 기세로 노려봐야 반응도 없고 배만 부여잡고 있으니 기가 빠졌다. 소리치면 메아리쳐 와야 하는 건데 그냥 먹어버린다. 내가 산에 대고 외친 건 아니지만. 둘 만이 아는 조용함이 흐르고 그가 물었다.


 "....학교 안..다녀..도..., 겨, 경수라, 랑 만나... 알수 있, 어?"
 "어? 어....그렇....겠지?"


나는 그와 별다를 바 없는 속도로 저 짧은 문장을 더듬었다. 백만 가지 중 하나 내지는 두개를 예상 했었지만, 살피는 눈동자와 함께 건 넨 말은 허를 찌른 예상치 못한 대답인 동시에 질문이었다. 한 줄의 문장이 공중에서 떠오른 느낌에 내 목이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어색했다. 정거장 마다 사람이 쌓여가는 전철 칸에 우리만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시끄럽게 떠드는 틴에이저들과 전철이 달리는 소음으로 고막이 진동해도 우리만 느끼는 정적이 있었다. 균형 있게 각진 어깨를 감싼 외투 안으로 하관을 넣은 그의 속눈썹이 조용히 내리깔렸다.









author's note 3







 웬만한 유학생들이 거쳐야 하는 ESL 코스는 유익할지 몰라도 돈이 만만치 않다. 영어 미숙자들을 위해 학교에서 마련한 클래스라지만 3개월에서 6개월을 전공수업을 들을 수 없게 해놓은 학교의 시스템 때문에 한국에서 유학 오기 전에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미술 전공자가 아니기에, 내민 서류로는 원하는 전공분야에 대한 기초 지식 검증을 할 수 없어 더 힘들었다. 열심히 영어공부를 해야 했다. 덕분에 학교에서 요구하는 스코어를 넘겨 ESL 코스를 뛰어 넘고 바로 캠퍼스로 입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생긴 폐해는 엄청났다. 학교강의라는 건 일반 생활영어와는 전혀 다르다. 일상에서 쓰이지 않는 단어의 향연. 적어도 네다섯 개의 서적을 독파해야 나올 수 있는 리포트 작성하기. 단기간에 테스트에서나 리포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건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인고의 육 개월이 지나자 그나마 조금씩 자신이 붙어, 가을학기 마지막 테스트에서 B+을 받을 수 있었다. 평소 세네 시간을 자던 나도 성적을 확인한 뒷날은 마음 놓고 스무 시간을 잠에 투자했다. 몸은 힘들지만, 충실한 생활. 그러나 조금은 단조로운 일상에 들어온 그. 


"저, 저,기...겨,겨..."


산발 된 머리에 퉁퉁 부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채 방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문 손잡이를 잡은 상태로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고 머뭇거리고 서 있었다. 겨우 눈을 뜬 나로 말하자면 침대 시트를 끌어안고 잠에 덜 깨어 무의 상태 그러니까, 멍하게 있었다. 그러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로 스무 시간 하고도 삼십분을 잔 걸 깨닫고 얼른 일어나 앉았다.


"배...아...ㄴ"

"으응. 나도 배고파. 뭐 해먹을까? 하아~아암~~!"


기지개를 쭉 펴면서 뭘 먹어야 할지를 생각했다. 오늘은 기분도 좋고 하니 원하는 걸 만들어 줄까 하고 물었더니 오므라이스를 해달라고 했다. 냉장고를 열어 양파, 당근, 계란, 피망 마지막으로 소고기를 꺼내어 조리에 들어갔다. 요리를 할 동안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텅빈 키친테이블에 앉아 오후의 햇볕을 쬐며 졸고 있었다.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흡사 동물 같았다. 위험하지 않은 나른한, 그런.


"너도 지금 일어난 거야? 오후 네 신데?"
 "......"


대답이 없다. 뭐 어차피 오늘은 토요일이고 뭘 하든 자기 맘이긴 하지. 아예 머리를 대고 본격적으로 자기 시작하는 그를 힐끔 보고 프라이팬을 꺼내들었다. 그와의 동거 두 달 째. 룸메이트가 되기 전 로빈 교수님은 나에게 주의사항 몇가지를 당부하셨다. 몇 가지 중 지키기 힘들고 난해했던 것은 '혼자 두되, 혼자 두지 말라.' 는 사항이었다. 오피스에 방문했을 때 말씀 하셨던, 그가 철저한 고독을 즐긴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방에서나 캠퍼스에서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그가 있었다. 책을 읽거나 소수를 찾고 멍하게 어딘가를 보며 생각하고 어떨 땐 고민하다가 번뜩 떠올랐다는 듯 노트에 공식을 적어나갔다. 안 그래도 헝클진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잡아 뜯다 마른세수를 하다가 캠퍼스 벤치나 집안 소파에 널브러지기도 했다. 꼭 그에 대해 관찰하려 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의 하루는 내가 서술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친구도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나를 제외한 사람과의 공유나 대화는 없다고 봐야 했다.


숟가락과 포크를 세팅하고, 만든 오므라이스가 담긴 접시 두 개를 놓았다. 나름 맛있는 냄새가 났는지 고개를 쳐든 그는 눈을 끔뻑이며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는 없었다. 그래도 그간의 경험으로 그와 같은 마음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셀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많은 사람들과 인연이 되어 만나지만, 소리를 내어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존재를 알게 되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다. 내 말은, 알아듣는 사람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러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사람이 있어 행운인 것이다. 우리가 같은 언어를 쓰고 거의 모든 감정을 표현함에도 너와 나만이 아는 무형체의 새로운 언어가 생기는 일은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다. 모두가 그를 차가운 파란색으로 볼 때, 적어도 나만은 따뜻한 노랑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처럼. 그는 점점 나에게 있어 특별한 노랑이 되어가고 있었다.


 "맛있어?"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잠옷이 꽤 너덜너덜했다. 물론 잠옷이 따로 있지 않았다. 밖에서 입던 옷을 입고 바로 잠들었다가 그대로 나가기도 했다. 샤워는, 글쎄. 다수, 나의 강요가 필요했다. 이 정도면 글을 읽는 사람도 알아들었으리라 확신한다. 무언가를 제시하기 전에 물어보는 습관을 들여야 했기에 한없이 단순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스케줄을 물어봤다. 교수님께 지시 받은 말하기 연습이 목적인 훈련이었다.


 ".....채...ㄱ읽을...거야."


한참을 생각 끝에 그가 말했다. 나는 나중에 읽어도 되는 책이라면 같이 외출하자고 설득했다.


 "나가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티셔츠랑 겨울옷도 사자."
 "......"
 "갈 거지?"
 ".....으..응."


마지못해 끄덕였는지 정말 가고 싶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두 달간 그의 꼬질꼬질함에 혀를 찰 수준이었으니까. 계절은 으스스한 겨울로 달려가고 있었다.







 ******







아파트로 들어와 우편물을 챙겨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는 물리학수업이 하나 더 남아있어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수업 종료 전까지 그로서리에서 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입에는 빨간 사과가 물려있었다. 물건을 들고 열쇠로 문을 열다 우편함 안을 뒤적여 꺼낸 편지 다발 더미를 떨어뜨렸다. 문 먼저 열고 바닥에 떨어진 편지들을 서둘러 줍다가 그의 앞으로 온 우편 두 장에 눈이 갔다. 하나는 에니그마 연구소에서 온 편지였고 다른 하나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힌 손 편지였다.


 "산드라 킴?"


발신인의 이름. 우편도장을 들여다보니 LA에서 온 편지였다. 나머지는 다 나에게 온 우편물이었는데 아버지께서 보내신 편지도 보였다. 세상은 LTE에 인터넷 화상 전화가 당연하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하실 말씀을 직접 적은 편지로 대신하는 낭만적인 분이시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나도 편지가 싫지 않다. 장을 봐 온 물건들을 서둘러 냉장고에 정리해 넣고 식탁에 앉아 가방에서 펜과 종이를 꺼냈다.



 '아버지께,


아버지, 보내주신 편지 잘 읽어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잘 계시죠?

그러고 보니 형의 대학졸업식이 코앞이네요. 형과 이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졸업선물로 원하는 게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없다고 하고 알려주지 않았어요.

형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 싶어서 제가 알아서 사려고요.

걱정하실 거 같아서 미리 말씀 드리지만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최근 학교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고 룸메이트도 생겼어요.

룸메이트에 대해 말하자면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고 교수님도 알아주시는

 수학천재에요. 약간의 장애가 있지만, 저와 아주 잘 맞는 것 같아요.

아, 장애가 있다고 해서 저에게 해를 가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 애 랑은 정말 잘 지내고 있어요.

몇 달 사이 룸메이트와 관계된 많은 일이 있었는데 조만간 또 편지하거나

 전화할게요. 어머니와 형에게 건강 하라고 말씀드려주세요.

그리고 형이 한번 놀러오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여기 오면 형도 아주 좋아할 거에요.

다시 편지 드릴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둘째 아들, 경수올림'



이번 편지는 짧았지만 조만간 다시 보내기로 작정하고 펜을 놓았다. 수업 종료시각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온 우편물을 챙겨 얼른 문을 잠그고 나왔다. 그리고 이 두개의 우편물은 이하의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주인에게 전달되게 된다.









학교캠퍼스는 여러 건물이 있는데 내가 자주 들리는 곳은 미술전공자들이 몰린 '스완관' 이였다. 화통이나 스케치북 등을 들고 이곳저곳을 다니는 그들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부러움에 젖곤 했다. 분수대 옆에서 햇볕을 쬐며 희희낙락하는 학생들의 손에 들린 크로키북이나, 조소를 만들기 위해 커다란 철사나 나무들을 나르며 낑낑거리는 아이들이 지나갈 때 가끔 멍하게 쳐다보는 내가 있었다.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카네기관'에는 수학, 물리학, 생물학 등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몰려 있고, 거의 모든 강의실이 조용하고 다들 무언가를 읽거나 쓰고 있다. 두 건물은 정반대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성질의 원소를 융합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도서관은 딱 중앙에 있었다. 나는 스완관을 가로질러 도서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학생아이디를 신분증명기에 찍고 들어간 도서관은 평소와 다르게 뭔가 웅성거렸다. 계단을 올라 양쪽으로 있는 도서관 중 왼편에 많은 학생이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가장 뒤쪽에 서 있는 여자에게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야?"
 "죠 가 난리를 쳤어."
 '죠' 라는 존재는 김종인이다. 그의 퍼스트네임인 '종인'을 발음하지 못하는 외국 애들은 '종'을 '죠'라고 멋대로 불렀다.
 "무슨 난리?"
 "물리학과 헨리 교수님을 때렸대."
 "뭐?!"


물리학과 헨리 교수가 누군지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단지 교수를 때렸다는 것만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에워싼 군중을 해치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동양인에 키가 좀 작은 편인 헨리 교수는 한 손으로 배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책상을 집고 막 일어나는 중이었다. 사건의 용의자인 그는 거칠게 숨을 쉬며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이 상황을 더는 보지 못하고 힘줄이 튀어나온 팔을 잡았다.


"종인아. 무슨 일이야?!"


그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헨리 교수가 했다.


"보면 모르나? 학생이 교수를 구타했네. 종인 군. 잘 듣게. 조만간 로빈 교수와 함께 총 교수회의에서 보지."


교수는 엄청나게 화가 났는지 이를 꽉 물고 학생들 사이로 사라졌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온 로빈 교수님은 나에게 그를 부탁한다고 하고 헨리 교수가 없어진 방향으로 달려가셨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건지 몰려들었던 애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우리는 이제 시작이었다. 총 교수회의라니. 그럴 만도 했다. 학생이 교수를 구타하는 행위는 월권에 간주되는 중대한 문제다. 학교라는 틀 속에서 무력으로 권위에 도전하는 일만큼 바보스러운 짓은 없다. 잘못하면 강제퇴학을 당할지도 모르는 사안이었다. 그가 왜 교수를 구타했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시선이 몰리는 걸 감수하며 엄청난 힘으로 그를 잡고 학교건물 뒤의 잔디밭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처음에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당황했지만 커다란 나무 밑에 도착했을 때엔 엄청나게 화가 나 있었다.


"너 제정신이야? 어떻게 교수를 때려?! 왜 때린 거야, 도대체?"
 "......"


침묵.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으로 가린 눈을 볼 수 없어서 더 답답했다.


"왜 때렸는지 말하라니까!"


아무리 괴짜에 장애가 있더라도, 그가 말했다. 모든 건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그렇다면 말해야 했다. 로빈 교수님처럼 나도 이제 그를 어느 정도는 보호하는 입장이 되었기에 이 사건에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납득 할 만 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는 말하지 않았다. 불안한 숨을 쉬며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은 굳게 닫아 버렸다. 이런 상황에 내 궁금증 풀어 줄 사람은 교수님 뿐이라 생각했고 다짜고짜 그의 팔을 부여잡았다. 이 상태로는 밖에 있는 게 불안하니까 일단 집에 두고 교수님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내 손은 거칠게 뿌리쳐졌다.


"자, 잡지마! 아,아,안갈거야!!"


울림좋은 목소리가 근처 나무에 부딪혀 잔디밭에 퍼졌다. 날 보지 않으려 돌린 고개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턱선은 꽉 물어버린 이 때문에 근육이 올라와 있었다.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걸 보는 게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지만 그렇다고 흥분한 사람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잡아."
 "시,싫어."
 "집에 갈 거야, 종인아. 그러니까 내 손 잡아."
 "....."


그의 고민이 눈에 보였다. 아까부터 팔을 뻤고 있던 나는 초조해서 아랫입술을 윗니로 물었다. 어차피 억지로 대려 갈수는 없었다. 무엇이든 원하지 않으면 실행하지 않는 외골수이니 내 손을 잡지 않는 이상 나도 그를 도울 수 없다. 팽팽한 긴장감이 서로를 스칠 뿐, 나와 그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머뭇거리며 내밀어진 손에 지지부진했던 침묵은 깨졌다. 그제서야 나는 입을 열수 있었다.


"가자."


들리지 않게 쉰 안도의 숨은 잔디를 날아가던 바람으로 섞여 들어갔다. 놓칠세라 그를 꽉 부여잡고 빨리 걸었다. 끌려오는 쪽이 뭐라 할만 했지만 전혀 말이 없어서 불안했다. 학교 근처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타닥소리를 내며 운동화가 끌려 들어왔다. 0의 손을 내려놓고 망설임없이 뒤돌자, 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마주 본 시선을 피하는 눈길에서 당혹스러움을 봤다. 현관에 서서 우리는 말없이 숨만 쉬었다. 아까 부리나케 걸어오면서 거실에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봐야지라고 다짐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벌을 세워둔 꼴이 되었다. 나는 가슴을 부풀렸다 터지듯 숨을 쏟아내고 양 손바닥으로 그의 볼을 감싸 고개를 나에게로 고정시켰다.


"왜 내 눈 피해?"
"........"
"고개 숙이지 말고. 말해."


그는 말이 없었다. 단지 굳은 표정과 힘줄이 선 목줄기가 지금 상태를 대변했다. 왜 눈을 피하는 지 말해줄 기색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의 반응에 하염없이 상실했다. 반동으로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나자 갑자기 두려워졌다. 이런 사람을 다루어본 적 없는 내가 감성적 직감과 섣부른 판단으로 가까이 하려고 한 게 실수 였을지 모른다. 주먹 쥔 그의 손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늦가을의 날씨에 닿아 그런게 아니라는 게 마음 아팠다. 사람을 때리는 행위가 남긴 상처의 잔상은 선명하게 떠올라 가슴을 파고들었다. 문득 빨강이 남기는 색에 대한 일화가 떠올랐다. 어느날 저녁 괴테가 여관에서 진홍색 조끼를 입은 여자를 발견해 응시 했는데 여자가 떠나고 난 뒤, 초록의 의복이 남았다는 이야기. 이 일을 계기로 색의 보색과 계시대비를 연구했던 괴테는 문제와 씨름했다. 그러나 나는 대문호 괴테가 아니였고 그를 실망시킬지 몰랐다. 손바닥에 붙은 양볼의 뜨거움과는 별개로 방향을 잃은 공황이 시작되려했다.


"화, 화, 화, 내지..마."
"화 안 냈어."

속이 뻔히 보이는 말투였다. 나는 분명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도경수라는 사람은 대담했지만 무너지기 쉬웠다. 이런 내가 싫었다.  

"내,냈잖아."
"....."
"도..겨...경..수."


그가 자기 손으로 내 손을 덮었다. 높은 체온이 살갗을 뚫고 머릿 속을 빠르게 덧칠했다. 그건 타인의 것이고 이질적이여야 하는데 거부감 따윈 없이 안으로 섞여 들어와 퍼졌다. 우리는 이때까지 스킨쉽을 해 본 적이 없었음에도 남자끼리 자연스럽게 살 위에 살을 포개고 있었다. 둘 중 누구도 경기를 일으키거나 어색해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그럴 겨를도 없었으나, 둘 다 돌발적 상황을 당연시 하고 있었다.


"나, 나쁜 짓 아,안했어. 거,거억정 안해도 돼."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왠지 몰라도 그의 말이 사실로 다가와서 그렇다고 믿고 싶어졌다. 내가 봐왔던 그가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은 아닐 지라도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길 바랬고 다른 잡 생각은 하기 싫었다. 그의 마음과 지금을 듣지 않아도 전류가 흐르듯 무언가가 흘러 들러와 날 안심시켜 주었으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네가 아무말 안해도 난 알아들었어. 그런데 교수님은 아닐테니까 꼭 죄송하다고 말해."
"...으응."


어누룩하게 긍정하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힘있게 뻣친 머리카락은 손의 방향을 따라주지 않았다. 마치 그 자체와 같았다. 이러다 부러질라. 바보 같은 사람아.


"이 바보야. 넌 천재가 아니라 바보야."


내 말에 그가 피식 웃고는 미소를 떠나 보내지 않았다.








목요일, 5월 14, 2015

author's note 2








나는, 일찍부터 내가 원하는 세상이 여기에 없음을 알았다. 남들 다 가는 유치원은 스킵했고 대신 내가 선택한 미술학원을 1년만 다녔다. 학원 선생님께서 재능이 있다고 폭풍 칭찬을 하셔서 집단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이다.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지역 미술대회에 그린 그림을 출품해보라고 하셨고 준우승을 했다. 그게 계기가 되어 초등학생 때는 그림을 그리는 게 재미있었다. 계속 그리고 싶었다. 중학교에 가서도 그림을 그렸다. 재능이 있고 노력하여 나보다 수십 배는 잘 그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잘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미술학원을 다녔다. 정확히 말하면 입시 미술학원. 나를 포함한 모두가 같은 걸 그리는 장소. 잘된 작품을 보고 그대로 베끼라고 했다. 데생도 수채화도 모사 그림만 몇백 장이 넘어갔다. 다들 잘해내는 것 같았지만 난 점점 썩어가고 속은 재가 되었다. 그런 상태로 집, 학원, 집 이 단순한 서클을 2년 반을 반복하고 두 손을 들었다. 결국, 원하던 예고실기시험을 치르지 않고 인문계 고등학교와 대학에 갔다.


정신력의 문제야 라고 일침하면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단연하건데 나와 같은 학생이 적어도 한 명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쨌든 그림과 멀어지다 보니 손은 굳었다. 그리고 후회할 때에는 너무 늦었다. 내가 색채학을 공부하려 뉴욕 유학을 마음먹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림은 못 그려도 언저리에 앉아라도 있고 싶었으니까. 나의 과거는 이랬다. 크게 굴곡 없고 다치지 않고 나름 신에게 버림받지 않았었다. 하지만 역시 내 두 발이 서 있고 싶어 하는 장소는 없었다.


책상을 내리치며 그는 어떤 과거를 떠올리나 궁금했다. 물론 행복할 리 없는 표정이어서 어느 쪽인지 짐작 했으나 섣불리 물을 수 없었다. 미카엘 김 의사선생님으로 부터 이메일을 받은 일주일 뒤 그와 학교 앞 다이너에서 만났다. 우리는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 각자가 원하는 음식과 음료를 시켰다. 여전히 빗자루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후줄근한 옷매가 김종인임을 말해주는 트레이드마크 같았고 진한 쌍꺼풀이 내리 앉은 얼굴은 표정없이 숫자를 찾고 있었다. 그와 달리, 나는 읽고 있던 전공 책에 집중 할 수 없었다. 미카엘김 선생님의 이메일 내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스퍼거장애를 겪어본 적 없는데 그와 가까운 증상이라고 해서 체감이 될 리 없다. 그의 손가락에 잡힌 연필이 사각 이는 걸 유심히 보던 나의 시선이 주먹을 가볍게 쥔 왼쪽 손으로 쏠렸다. 계속되는 침묵에 잡념이 섞여 유난히 긴장 되었다. 내가 먼저 말을 붙이기로 결정 했다.


 "너 지금 어디 살아?"


그가 굽어 있던 등을 폈지만 날 보지 않았다. 대신 내가 내려놓은 책에 눈길을 주었다.


 "...교수님이랑 같이..살아."


보호자역을 한다더니 정말 그랬는지 교수님 집에 산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한마디 대답을 듣고나니 정말 그에게 궁금한 게 많아졌다.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


 "너 고향이 어디야? 한국? 미국? 미국이면 미국 어디?"
 "...LA."
 "한국말은 할 수 있어?"
 "조금."
 "해봐."


그는 당황해 했다. 입이 다물려 져서는 열어질 줄 몰랐다. 그때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내 이름을 한 번도 입에 올려본 적 없다는 것을. 나도 같았다. 다른 이에게 말한 적은 있어도 면대 면으로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당연히 의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두 이름을 서로에게 뱄어 본 적이 없었다.


 "내 이름 알지? 말해봐."
 "...도..경..수?"
 "어. 김종인. 종인아."


내가 말하고도 알 수 없는 따스함이 온몸으로 퍼졌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네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꽃이 되었다.' 이런 부류의 글귀 말이다. 이 말을 많은 곳에서 들어왔다. 하지만 하나하나를 뼈저리게 느낀 날은 없었다. 이유를 생각해 낼 겨를도 없이 내가 도경수라서 기쁘다 생각했다.


 "...응?"


그가 답했다. 아니, 종인이가 답했다. 수줍게 삐거덕거리는 공기를 타고 그의 눈길이 조심스럽게 나를 보았을 때, 사방이 막힌 다이너에서 미풍을 느꼈다. 볕이 따스한 날 들판에 서서 쏴아아아 하고 대지를 휘감는 바람을 등지고 눈동자에 보인 모든 자연을 만끽하는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이 떠올랐다. 햇살이 가득히 묻어있는 색감과 하늘, 수풀, 꽃, 여인을 하나로 묶은 위대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치킨 파니니 어느 분이시죠? 펜케이크는 요?"


낭만에 산통을 깬 주인공은 다이너의 웨이트리스였다. 금발의 그녀는 치킨 파니니를 그의 앞에 놓고 내 앞에 팬케이크를 내려놓고는 음식을 주문할 때 같이 시켰던 콜라 캔을 중앙에 두고 다음 오더를 나르기 위해 부엌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왠지 지금이 적절한 때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에니그마 연구소에서 연수했다고 교수님한테 들었는데 거기서 뭐 했어?"


색채학의 심도 있는 이론'이라는 책은 내 손에 의해 이미 덮어져 있었다. 유학 와서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책을 덮어본 적 없는 나에게 이건 중대사건과도 같았다. 그 원인이 윌링턴 대학 내에서 가장 특이하고 멀리 꺼려지고 있는 학생인 김종인이라는 게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음....연구하고..숫자입력하고...문제 풀고..또..."
 "또 뭐 했어?"
 "..어...논문도 쓰..고..소수도 찾..고.."
 "재미있었어?"


파니니 안에서 채소를 고르던 두툼한 손가락이 급정지했다. 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린다. 그래서 재미있지도 않은 걸 왜 했냐고 묻자,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럼 답은 나왔다. 에니그마 연구소가 지겨웠었구나.


"왜 수학이 재미있는데?"


내 질문에 그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저음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알고 있음에도 그때는 못 들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귀가 걸러 냈는데 머리로는 기억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애써 적지는 않겠다. 이 이슈는 후에 자세하게 기록할 것이다.-


"응?"
 "까, 깔끔해서. 단순하고..군더더기 없고..그..아..름다워.."


수학이 아름답다니. 그림도 아닌데 아름답다니.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펜케이크에 버터를 발라 메이플 시럽을 뿌렸다. 팬케이크의 맛은 버터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까다로운 고집은 집중으로 이어지는데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좀 더 고소하고 맛이 풍부한 버터였다면 맛있었겠지만 어차피 다이너니까 이 정도로 만족하자고 자신과 타협하고 있을 때, 앞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설마 했는데 크지 않아도 그의 첫 웃음이었다.


 "왜? 왜 웃어?"
 "..아니야."


그가 웃음기 서린 눈매로 부정하며 어색한 손놀림으로 치킨 파니니를 크게 베 먹었다. 그의 그릇에 양상추와 토마토 오이 등의 채소들이 수북했다. 나는 보기 싫다는 표현을 적나라하게 하며 턱짓했다.


 "야. 김종인. 너 그거 다 먹어."
 "...싫어. 마앗, 맛, 없어."
 "먹으라면 먹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식품군인데. 사이에 끼워서 다 먹어. 알았어?"


정말로 진지하게 말했지만 그는 웃었다. 쓰레기더미 같던 채소를 포크로 찍어 치킨과 빵으로 가득한 입 안으로 넣어주었다. 안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뱄지 않고 씹는 걸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채소를 먹이는 일은 성공했다. 비록 오늘은 채소쪼가리지만 내일은 달라질지 모른다. 앞으로 내가 그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무슨 질문을 하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느리고 더딜지라도 변하리라 그렇게 기대했다.




 ******




 "으아~~ 그런 애랑 일주일에 세 시간이나 있는 거 짜증 나지 않냐? 하~암~"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켠 레이는 오후가 되서까지 하품삼매경이었다. 함께 걷고 있는 캠퍼스 길 잔디밭에 누운 애들도 낮잠을 자거나 나무에 기대어 나른 해 보였다. 나 또한 슬슬 졸음이 찾아왔다. 평소 넉넉히 잠을 자지 못 하는 게 이렇게 기습적으로 찾아온다. 쪽잠이라도 자고 싶지만 요새 파트타임을 시작한 후로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졸음에 못 이겨 가까운 벤치에 앉아 버렸다.


 "아니. 처음에는 말이 되게 없었는데 요즘엔 말 붙이면 잘하더라고. 익숙해진 건지.."
 "말을 잘한다고? 난 걔가 말하는 걸 들어 본 적도 없다. 벙어리인 줄 알았어."
 "벙어리는 무슨, 말 잘해."
 "언어장애인이라는 소문이 있어. 그래서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걔가 한 소문 하잖아."
 "무슨 소문?"
 "가정문제 때문에 십대 때 가출해서 거지였었다는 말도 있고 정신분열증 있다는 소문도 있고,
그 왜 책상 치는 거 말이야. 그게 정신분열증이면 그렇다는데?"


매번 당하는 일이지만 선입견은 무섭다. 의식함과 하지 않음을 떠나 어떤 교육을 받든 자아가 생기면 따라오게 마련인 그것은 단 한 명도 거스르지 않고 모두가 보유하고 있기에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선입견은 몸 안에 품고 있는 칼날의 개수와 비례한다. 많은 순간 알게 모르게 상대방을 흠집 내어 너덜너덜하게 만드니까. 말없이 쓰게 웃었다. 주장대로 라면 나도 레이와 다를 바 없기에 마음이 무거워서 더는 그 주제에 대해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응. 아, 맞다. 주말에 기숙사 애들이랑 술 마시러 가기로 했는데 갈래?“
"시간 나면 전화 할게."
 "전화 꼭 해! 너 대려오라고 여자애들이 난리다! 그래픽 디자인 과에 티파니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알았다고 말하고 뒤돌아 걸었지만 레이는 내가 전화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음먹고 시작한 공부와 싸우고 있고 그게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매번 나를 불러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오늘의 모든 강의가 끝나고 캠퍼스를 나가 버스를 타려는데 로빈 교수님께서 오피스에 들르라고 전화를 주셨다. 오래간만에 들어간 오피스 안의 녹색 소파가 눈에 띄었다. 그를 대면 했을 때가 떠올라 내어주신 머그잔을 들며 그때를 회상했다. 분명 어쭙잖은 인사는 있었으나 방황하는 시선, 소극적인 손짓, 머뭇거리는 입술이 인상적이였던 그를 떠올리는 게 싫지 않았다.


 "마카엘 김 선생님께서 나에게 전화를 하셨더군."


교수님이 주의를 끄는 발언을 하셨다. 물론 단번에 신경이 몰렸다.


 "무슨 일 때문에요?"
 "아니, 특별히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자네에 대해 물어보셨어. 어떤 친구인지 궁금하셨나 보지. 도경수 군은 영리해서 종인 군과의 거리를 잘 파악 할 거라고 말씀드렸네.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도 좋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뭔가 많이...본래의 목적과는 빗나간 거 같아요. 교수님."
 "그게 무슨 말인가."
 "전 단지 용돈을 벌려고 지원한 것뿐이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덫에 걸려든 기분이랄까. 그런 느낌이 들어요."
 "하하하하하하!"


오피스를 울릴 정도로 호탕하게 웃으신 교수님은 자신의 두 손을 깍지끼고 다리에 올려 두셨다.


 "아마도 그의 가치 때문일 것으로 생각하네. 종인 군은 특별한 사람이야. 백만 명 중에 하나가 가지는 천재적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 수학 수재지. 학계의 저명한 인사인 존 드레이크 씨의 총애를 받아 에니그마 연구소(수학연구소)에서 연수를 할 정도니 그의 가치를 환산하면 수천 억, 아니 수조 원이 넘겠지. 열일곱에 그레고리 페렐만의 푸앵카레의 추측 해결논문을 보고 단번에 이해했어."


푸앵카레의 추측. 존 드레이크 씨가 설립이사로 있는 에니그마 연구소에서 제시한 밀레니엄 난제 일곱 문항 중의 하나로 그레고리 페렐만에 의해 유일하게 해결된 난제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앙리 푸앵카레가 1904년 논문 끝에 남긴 추측의 한 줄을 인류가 백 년을 고민해 해결했다.


 "나는 그가 푸앵카레의 난제를 푼 페렐만 씨와 무언가 일맥상통 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네. 페렐만 씨를 직접 만나 본 드레이크 씨가 말하기를 종인 군과 페렐만 씨의 분위기가 닮아있다 했지. 깊이를 모를 만큼의 철저한 고독을 본인이 즐긴다는 말에 나도 동조했네. 종인 군은 타인과 가까이 몇 시간이고 같은 공간에 있기를 편하게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야. 나도 그와 이만큼 가까이하기 힘들었네. 그런데 이유는 모르지만 경수 군에게는 달랐어. 그래서 내가 부탁이 하나 있네."


무엇 때문인지 모르나 조금 당황했다. 교수님의 부탁이라는 게 학생의 입장으로 기분 좋은 일이 될 확률이 적다는 것 정도는 아는 나이다.


 "실은 이번에 내가 이혼을 하게 되어서 말이네. 와이프와 같이 지내던 집을 팔게 되었어. 아, 질리도록 많이 들었으니 위로의 말은 필요 없네. 요점은 그게 아니니까. 아무튼, 집을 내놓은 지 두 달 만에 계약하게 되었네. 약 한 달 뒤면 종인 군이 나와 사는 거처에서 나가야 한다는 말이지. 내가 알기에 경수 군은 캠퍼스 기숙사에서 따로 나가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맞는 건가?"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종인 군은 존 드레이크 재단에서 지원금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가 혼자 살기 원한다면 집을 알아봐 줄 수 있고 사실상 나에게 혼자 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불안해서 말이야. 경수 군만 괜찮다면 룸메이트 형식으로 동거를 해줬으면 하네."
 "...아까 교수님도 말씀하셨지만 타인과 같이 사는 거에 힘들어하지 않을까요? 이런 건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시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물론 물어볼 참이네. 경수 군의 의사를 먼저 알고 싶어서 말이야. 만약 그렇게 해준다면 자네는 방세를 내지 않는 것으로 하고 싶군."


대학 내에서 가장 괴짜로 불리는 녀석과의 동거가 불안하긴 했다. 그렇지만 싫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내 안에서 쓸데없는 사명감 같은 게 고개를 들어 결단력을 부여해 주었다.


 "방세는 내는 걸로 하겠습니다. 파트타임비도 주시는데 방까지 공짜로 쓸 수는 없어요."
 "좋네. 그럼 종인 군에게는 경수 군이 물어보는 걸로 하지."


교수님은 언제나의 사람 좋은 미소 지으셨다. 사실 나는 교수님께서 그에게 직접 물어 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에서부터 흘러 나온 긴장이 몸과 얼굴까지 전해졌는지 이런 말도 하셨다.


"걱정하지 말게. 거절하지 않을테니."
"거, 걱정은 하지 않아요."


생각이 섞인 웃음이 느껴져 머쓱했다. 교수님께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걸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언지 뭐가 말을 더듬게 만든 건지 나조차 의문이 었다. 내일 만나는 구나 라고 되뇌이고 나니, 결전의 날 처럼 느껴져 더 어색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온 몸이 내뿜는 스스로의 변화를 나만 모르고 있었다. 바보처럼.   
  






금요일에 만난 우리는 처음으로 캠퍼스에서 멀리 떨어져 나왔다. 맨해튼시티에 있는 웬만한 대학이 다 그렇지만 넓고 좋은 캠퍼스는 기대하기 힘들다.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바람을 쐬려면 센트럴파크로 올라가는 게 훨씬 났다. 날씨도 좋고 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와 나는 몇 블록을 걸어 센트럴 파크 가장자리의 돌길에 발을 디뎠다.


 "너 나랑 살래?"
 ".....어?"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어떻게 물어봐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평범한 친구 같으면 이게 이래서 우리가 잘 맞는 거 같으니 기회도 좋으니까 룸메이트 해볼래? 이렇게 직구로 던질 수 있었겠지만, 도통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고심하다 아침이 되서 내린 결론이, 기승전 없는 결을 들이대는 방식이었다.     


 "아니, 너 교수님 집에서 나온다며. 혼자 살 거라고 했어? 혹시?"


그가 내 말 따위에는 관심이 쏙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츄러스를 주시했다. 키 작은 스페인계 아주머니가 만들어 가판에 놓고 파는 츄러스는 길고 번들거리는 기름기가 가득했다. 설탕이 잔뜩 뿌려져 보기만 해도 눈썹이 찌푸려졌지만, 그에게는 침 떨어질 음식인 듯했다. 이걸 사주지 않으면 이야기를 듣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2달러를 내밀고 길고 굵은 츄러스를 받아든 건 그의 큰 손이었다. 한 입에 쑤욱 넣어 사 분의 일은 베어 문 입술에 흰설탕가루가 가득했다. 내가 아까 아주머니에게서 받은 냅킨으로 언저리를 대충 털어내 주었다. 그러면서 나보다 키도 체격도 큰 김종인이라는 남자를 이를테면 보호하고 싶은 심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기분은 참으로 생소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나랑 사는 거 싫어? 나 요리 잘해. 청소도 잘하고."


우물거리는 볼이 잔뜩 부풀었다. 눈꺼풀 위의 굵은 선이 내려앉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까치집이 지어진 머리카락이 팔락거릴 때의 만족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한 채로 어쭙잖게 홍보해대는 나에게 딱히 고민하는 기색 없이 허락해 주었으니까. 나는 사실 그가 부정적 행동을 하든지 그게 아니면 역시 혼자 살겠다고 말 할 줄 알았다. 힘들지 모르겠다고 예상했던 제안은 의외로 단순하게 끝나버렸다.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이렇게 우리의 동거가 결정되었다.  







로빈 교수님의 자택은 맨해튼에서 차로 사십 분 정도 걸리는 롱아일랜드의 맨하셋이라는 곳에 있었다. 맨하셋은 늙은 부자들이 살기로 유명해서 모든 집이 저택이라고 불릴 만한 수준이다. 잔디밭에 수영장 정도는 기본 옵션인 곳도 많은데 교수님 집은 그나마 검소했다. 교수님의 부인은 다른 곳에 집을 얻어 나가버린 상태여서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걸린 액자에서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몸뚱이 하나이니 많은 짐이 있을 리 없었지만, 책만 빼곡히 담긴 커다란 이사박스 서른 개와 옷가지가 담긴 한 박스의 이삿짐을 보며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옷 박스 안은 반은 비어있었을 정도였다. - 그와 나는 서로의 집에 들러서 교수님이 빌려온 벤에 이삿짐을 싣고 새로운 거처로 달렸다. 어디에 살게 될지 몰랐는데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파트의 꼭대기 5층을 받게 되었다. 다니는 학교가 뉴욕대학이나 컬럼비아대학이었다면 이스트 업타운의 기숙사를 싼 가격에 빌릴 수 있었을 텐데. 라는 그동안의 안타까움을 한 번에 씻겨 내려줄 만한 위치의, 깔끔하게 리노베이트한 2LDK의 아파트였다. 덕분에 버스비가 굳어서 행복했다.

교수님은 짐을 내려주고 집 열쇠를 건네 준 후, 학교로 가셨다. 우리는 서로의 짐을 각자의 방에 넣기 전에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폰으로 검색해 근처 피자집에 배달주문을 하고 소파에 씌워진 흰 천을 조심히 걷어 앉았다. 천 위에 내려 앉았던 먼지가 사방으로 날리며 햇빛에 존재를 드러냈다. 덕분에 학기초도 아닌데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텁텁한 공기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나자 속에 작은 기대감과 행복이 생겼다. 아무것도 없이 박스만 난무한 거실을 쓱 둘러보며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때, 심하게 머뭇거리던 뭉툭한 손가락이 나의 이마 위로 올라왔다.


 "...이거..안...없어지는..거야?"
 "아, 그런 거 같아. 머리카락으로 가리면 되지, 뭐."


상처를 중간에 두고 양 쪽으로 세 개씩 바늘구멍이 난 상흔. 머뭇거리는 자세로 조심스레 만지던 손가락이 떨어졌다. 그가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둥그렇고 투박한 끝이 떨렸었다. 뭉툭한 떨림을 고스란히 받은 이마 위에 남의 체온이 남았다.


 "미..미,미안해...내가, 그, 그..."


다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들을 수 있었던 말. 여러 감정의 말 중에서도 고마울 때 고맙다고 하고 미안할 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렇기에 그 두 가지를 말하는 법을 어릴 때부터 배운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익숙하지 않아 더듬거리며 설익은 말을 힘들게 꺼내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사실 아주 만족스럽고 마음에 들었다. 이제부터 배우면 된다. 이렇게라도 들었으니 오히려 고마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미안함이 그득한 눈 밑이 무거워 보이는 건 딱히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어졌다. 


 "미안하면 나 그거 가르쳐줘, 푸...뭐의 추측."
 "푸앵..카레?"
 "그래. 그거. 교수님이 그랬는데 네가 그 문제 논문을 한 번에 이해했다고 하더라. 그게 뭔데 로빈 교수님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는 건지 궁금해."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물음은 많았으나 김종인이라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다. 그도 그럴게 수학은 나에게 좌절감만 맛보게 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만나는 일이 쌓일 수록 정작 그를 진정으로 받아드리려고 다가선 일이 없었다는 걸 자각하고 나자, 거부감은 줄었다. 김이 솔솔 나는 따끈한 피자를 앞에 놓고 마치 수학과 학생 둘이 마주 앉아 토론하는 것처럼 질문과 응답을 시작했다. 수학과 물리를 설명하는 그는 마치 딴 사람 같았다. 쉬지 않고 더듬는 버릇은 사라지고 봇물 터지 듯 말하며 신나했다. 나의 예감처럼 그날 하루 새로운 그를 발견했다. 우리는 축제의 주인공처럼 먹고 마시고 웃으며 이야기 했다.
     



 ******




실은 나는 성격적으로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없는 쪽에 속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라고 운을 띄우기에는 이미 멀리 와 있었다. 그만큼 그는 나에게 신기한 존재였다.


 "아니, 좀 더 쉽게 설명해보라고."


수학이나 물리학에 관해 젬병인 나를 다른 수학전공자 대하듯 하면 안 된다고 구박을 주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때마침 학교 근처 공원의 플레이그라운드 안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가 미끄럼틀 옆에 놔둔 고무 볼과 누가 버린 개 목줄을 쓰레기통 안에서 꺼내 들고 왔다. 이사한 날, 푸앵카레 추측의 해설을 들었지만 정말로 한 움큼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내가 어떻게 고등교육을 받았었는지 한숨이 터질 지경이었다.


 "음...그러니까..이...경..계가 없는 단일 연결 3차원이 고무 볼이라고 생각해봐."
 "일단, 응."
 "이 고무 볼에 폐곡선...곡선이 이, 개 목줄인데 내, 내가 위에 고정 시켰잖아. 이걸 이렇게 양쪽 끝을 잡고 교차해서 수축시키면 점이 되잖아. 그럴 경우에는 고무 볼이 3차원 구의 형태이고, 점이 되지 않는다면 중간이 비었다는 가정으로 위, 위상동형 그러니까 도넛 모양이라는 추측이야. ...알겠어?"


의심스러움을 담은 말투는 확신이 없었다. 분명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겠지 싶었다.


 "넌 내 얼굴이 알아들은 걸로 보여?"
 "아니."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은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공간감각과 이해력이 부족한 내가 어째서 이런 것에 시간을 쏟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의외로 지루하지 않았다. 그가 보통사람들처럼 술술 말하는 걸 처음 봐서 그런지 흥미진진했기 때문이었다. 이해를 못한 건 둘째치고 내 눈동자는 전에 없이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어릴 적 봤던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마술도 이보다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이건 발견의 재미였다. 


 "그래서 그게 왜 중요한데."
 "...우주의 모양을 비교적 정확하게 추측할 수 있으니까."
 "더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야."


 내 얼굴을 가만히 보다 피식 웃었다. 그래. 김종인은 잘생겼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웃으면 더 잘 생겨 보인다. 후줄근한 청바지에 흰색이었을 긴 팔 티셔츠를 즐겨 입는 그는 자신의 외모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처음봤을 때부터 변함없는 머리카락은 잘 감지 않을 뿐더러 린스를 쓰지 않아 뻣뻣하고 눈을 가려 보일락 말락 한다. 본인이나 주변 사람은 몰라도, 가까이에서 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가 잘 생겼다는 인식을 하고 나서는 매일 같이 날뛰는 머리카락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밥 먹자, 종인아."
 "나..치..칰키인."


거짓말처럼 다시 더듬기 시작했다.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치킨? 그럼 코리타운 가서 치킨사올까?"
 "어, 어."
 "강의 끝나고 같이 가자."
 "어."


까치집 지어진 머리를 하고 해맑게 웃는 얼굴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힌다. 웃을 때면 항상 그렇게 되곤 했다. 볼 때마다 아이처럼 웃는다 생각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아이스크림을 물고 현관문 안으로 들어 올 때나, 소파에 웅크리고 낮잠이 들었을 때의 그는 더욱 더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순수한 그가 있고 이런 무지한 평화가 금방 깨질 거라 예상하지 못하고 웃는 나도 있었다. 우리는 작은 산을 맞닥뜨리기 위해 숨을 고르는 시간의 사이에 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