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6월 27, 2015

밤에








이유 없이 강가로 걸어가고 싶어졌습니다. 다음날 비가 오려는지 습기 찬 공기가 감겨와 숨쉬기 버거웠지만, 모래밭 길을 걸어 집에서 좀 떨어진 강에 도착했습니다. 야밤이었는데 옷을 갈아입지 않아 교복 그대로였어요. 교복이란 게 어차피 한 종류여서 검정 기지 바지에 흰색 포플린 셔츠에다가 맨발에 때 탄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더랬죠. 강가에 닿아 낮에 봤다면 푸르렀을 수풀 위에 앉았습니다. 엉덩이 밑에 밤벌레가 깔려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어요.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반딧불이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풍경에 혼이 빠져서 신경을 쓸 틈이 없었거든요. 워낙에 사람에 관심이 없어 그런지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는 음악 선생님보다 그네들이 백배는 더 영롱하더군요.


여름이 펼쳐주는 환상에 취해 휘파람을 불뻔했습니다. 입술을 모았는데 번뜩 도서관에서 보았던 소설책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물 주위에서는 휘파람을 불지 말라. 그곳에서 죽은 영혼이 나온다더라. 이런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7년 동안 비슷한 것도 보지 못해서 나는 귀신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게 확실했습니다. 게다가 소설은 영국에서 건너온 번역 책이였으니 양놈들의 미신이 뭐 대단하다고 되내어야 하겠느냐마는 조심이라는 단어가 나쁘지 않아 귀를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대신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흔들었습니다. 뭐라도 해야 할 사람처럼 말입니다. 사방을 촘촘히 감싼 어둠 안에 피어난 생명이 알게 모르게 소리를 내고 있었으니까요. 


그들과 하나가 되고자 했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무법자였습니다. 풀씨에 횡포를 부렸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개의치 않고 연약한 풀을 단단한 나뭇가지로 툭툭 치는데 오른쪽에서 강물이 첨푸덩 쏴악거리더니 철벅 철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 급히 두리번거리니 검은 형체에 달린 사지가 익숙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수많은 반딧불이 똥구멍에서 나오는 빛에 젖은 뒷모습이 비쳐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구나! 알았지요. 남자는 필시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젖어있을 겁니다. 후덥지근한 여름이 아니었다면 곤란한 지경이었겠죠. 입고 있던 젖은 옷을 벗어 던지는 소음이 났습니다. 곧이어 풀잎이 구겨지며 부스럭했습니다. 소리의 거리로 보아 남자가 꽤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몇 번의 소음이 들렸습니다.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싶어 존재를 알려야 하나 진실로 고민하고 있을 때, 연기가 밤하늘로 타오르며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습니다. 그건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봐서 예상했던 담배 그러니까 유행하던 도라지 담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생전에 끊이지 않고 피던 거라 잘 아는데 그거와는 다른 살아있는 풀떼기를 태우는 악취였어요. 얼른 손을 들어 코와 입을 동시에 막았습니다. 괜히 나왔다 생각했죠. 후회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다리에 힘을 주는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한대 줄까?"


다분히 나를 의식하고 한 말이었을 겝니다. 차분한 말투는 내 몸을 경직시켰습니다. 정말로 꼼짝 할 수 없었습니다. 숨마저 속으로 감추어야 했죠. 아시다시피 밤이라 보이지 않을 텐데 머리를 미친 듯 흔들었습니다. 등에서 나는 식은땀이 허리까지 흘러나가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몇 개의 긴 풀 사이로 언뜻 본 남자의 눈은 달빛에 빨갛게 광을 발했습니다. 조용하고 은은한 빛을 흠뻑 씌어 머리카락조차 그 빛과 닮아있었습니다. 나는 말입니다, 살아생전 이런 남자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평소 행동반경이 좁지만, 만약 친우와의 대외활동에 도가 튼 마당발이라 해도 이런 이는 못 만나 보았을 거라 장담합니다. 중년이건 장정이건 전쟁의 군인으로 징집되어 동네주민이라고는 스무 명 남짓한 시골에서 나가지 못하고 새로움에 목말라하던 나에게 딱 맞는 만남이다. 머리로 외치고 있었으나 워낙에 무서워야지요. 토악질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팔 다리가 굳어 주저 없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여기는 왜 왔어?"


남자가 물었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거하게 침을 삼키고 용기를 짜내어 입을 열었습니다.


"자는데, 갑자기 강가에 오고 싶지 않소. 그래서 내 와봤소. 당신은 강에서 물질이라도 한 거요?"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에 쭈뻣거리는 눈길을 주고 물었습니다. 답답하게도 남자는 어디에서 꺼냈는지 모를 종이에 마른 잎을 가로로 넣고 손가락으로 말아 양 끝을 엄지와 검지로 꾹 눌러 돌렸습니다. 그러더니 입술에 끼웠죠. 다음에야 느릿한 말이 나왔습니다.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게 뭐야?"


대답일 줄 알았으니 이걸 듣고 반문 할 뻔 했지요. 하지만 더는 묻지 않고 답하기로 했는데 딱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더군요. 쑥이 잔뜩 들어간 못생긴 개떡에 동치미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싶다가도 커다란 무쇠솥에 찐 염소다리 고기를 소금에 찍어 뜯어먹으면 맛있겠다며 망설이다 결국 훈이네 밭에서 서리한 꿀 수박 한 덩이에 만족한다 했습니다.


"국수는?"


솔직히 국수는 떠오르지 않는다 했더니 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고 있던 담배인지 모를 종이 쌈을 두꺼운 손가락 사이로 옮기고 그와 나를 간간이 가리고 있던 풀가지를 다부진 팔로 쳐냈습니다. 하릴없이 꺾인 풀은 바닥에 엎드려버렸습니다. 남자는 벌레의 깜빡이는 빛을 탓하고 싶게 만드는 나신이었습니다. 사랑마저 규격이 있는 게 세상이라던데 그는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종류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같은 남자의 다른 나체는 꽤 충격이었습니다. 처음이었으니까요.


"같이 가자."




                                                   (all rights reserved by @2500won)



달빛 머금은 손이 나의 뺨을 스쳐 관자놀이로 흐르는 땀방울을 훑고 차갑게 식혀주었습니다. 가지처럼 뻗은 폐의 핏줄이 막혀있다가 터지며 뻥하고 뚫려 안도의 한숨을 쉬어버렸죠. 혈관 안의 피가 대차게 감각을 전달했습니다.


남자는 구름처럼 미소 지었습니다. 숨 막히는 부드러움이 나를 천천히 압도해서 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죽음이란 게 이런 걸지 모른다 생각했습니다.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잠식하는 순간은 다시 못 올 쾌락이라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군요. 타인을 위해 붙잡고 있던 삶의 끈이라는 명분은 사라졌습니다. 지워진 책임감은 나 자신을 원하는 곳에 둘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남자가 누구이고 왜 나를 이렇게 만드는지 물결에게 물을까요, 아니면 저 별이나 더운 바람을 붙잡고 물을까요. 글쎄요. 어느 쪽이든 부질없는 짓이겠지요.
나는 같이 가자는 남자의 두 팔에 폭 싸여 안겼습니다. 두 발이 지면에서 떨어질 때 고무신이 벗겨졌는지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전하게 안겨있음에도 자꾸 뒤가 켕기더란 말입니다. 꽉 차는 평온을 갉아먹는 이름이 지독하게 따라와서는 할퀴고 때리며 울부짖는데, 하도 시끄러워서 가슴의 불안이 골격을 드러냈습니다. 이름은 점점 크게 들려왔습니다. 남자도 들릴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저 어디쯤을 보는 턱 끝은 조용히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를 따랐습니다. 사람이 있더군요.


나는 저 이를 알고 있습니다. 다부지고 당찬 실루엣을 잊을 수 없지요. 사내란 사내는 다 일본과 러시아로 강제집영되는 마당이니 녀석도 끌려갔다가 병에 걸린 날 간호하겠다며 기를 쓰고 살아 돌아온 끈질긴 놈입니다. 자기도 다리를 다쳐서 쩔뚝이면서 무슨 여유로 나를 돌보겠다는 건지 혀를 찼었더랬죠. 그래서였어요. 돌아보게 되는 연유 말입니다. 인사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나는 남자에게 내려달라 부탁했습니다.


"다시 올 거니?"


그러고 싶었습니다. 다른 날 밤에 또 오면 남자를 볼 수 있다는 일이 얼마나 멋진지 모를 겁니다. 두 번 다시 못 마주치는 건 죽기보다 싫더군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습니다. 그리고 빨려가듯 녀석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주저하지 않았어요. 그럴 이유는 없었죠. 남자는 또 만나게 될 것이고, 저 녀석은 울면서 나를 부르고 있더랍니다. 아이의 눈물이 내 육신을 축축하게 적셔낼 기세였습니다. 저놈은 왜 날 저렇게나 불러댈까요.


"형! 경수형!! 일어나봐! 형!!"


어지러웠습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게 흥건했어요. 안 그래도 힘이 없는데 쉬지 않고 흔들어대는 통에 저절로 오만상이 찌푸려지더군요. 겨우 눈만 떴습니다.


"형! 정신 들어? 놀랐잖아!"


녀석의 검은 머리카락을 타고 짠물이 입술 사이로 툭툭 떨어집디다. 얼마나 다급해 보이던지 왜 그러냐고 한마디 했습니다.


"왜 그러긴! 뒷간 다녀왔는데 형이 숨을 안 쉬잖아! 얼굴은 하얗게 질려가지고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고!"


골이 흔들리게 화를 내는데 내가 아픈 건지 놈이 아픈 건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무언지 모르게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강을 보러 갔었는데 어떤 남자를 만났고 너를 멀리서 보았다 했더니 펑펑 울더군요.


"...종인아, 그만 울어."


갈라지는 내 목소리가 연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늘어진 몸이 참으로 쓸모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몸을 녀석은 항상 소중하게 아껴서 미안해졌어요. 나를 끌어안는 팔뚝에 오른 힘줄이 살아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걸 지긋이 관찰하는 게 어찌나 좋던지. 오늘 밤은 살아야겠습니다. 내일 갈게요. 당신에게는.







카디전력 2015.6.27

김참님 감사합니다.

목요일, 6월 18, 2015

author's note 7











지금까지 우리의 동거 그러니까, 한 공간에 거주하게 된 일을 이야기함에 있어 빠진 일화가 많다. 되도록 자연스럽게 넘어가려 했던 접은 부분. 그것은 '김종인과 나의 관계'이다. 누락된 일상을 다 말하기엔 쥐고 있는 종이의 양은 한정되어있고, 그와 나의 날에 대해 쓰자니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소소하고 은밀했던 생각이 담겨 대부분 나의 이야기가 될 성 싶다. 글의 취지에서 살짝 비켜간 듯 하지만, 이쯤에서 우리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였다면 생략했을, 마틴 루터킹 아카데미에서 홀로 집으로 돌아온 날 밤을 적기로 하겠다.


그날 밤은 비가 내렸다. 예고 없던 먹구름이 하늘을 빠르게 뒤덮더니 어느 순간 쏟아졌다. 그가 돌아오는 길에 비를 쫄딱 맞을 게 마음 쓰였다. 식탁 의자에 앉아 창문 밖의 비 오는 밤을 보는 내가 유리창에 고스란히 그려졌다. 창에 비친 나는 빗줄기가 죽죽 그여 번져있었고, 얼이 빠져있었으며 실제로는 허탈했다. 이때까지의 노력이 누구를 위한 일이었나에 대해 몇 시간이나 고민했지만 해답은 없었다.
폴 고갱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직선은 무한대로 나아가며, 곡선은 창조를 가둔다고 썼다. 어쩌면 나는 창조라는 눈부신 단어를 가두는 정형화된 곡선이었다. 자유로운 김종인을 가두는 고지식한 도경수. 꼬리를 무는 자학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 사이에서 허탈한 바람이 빠져나왔다.


그와 내가 사는 곳에서 완전히 혼자가 된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공기마저 제자리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달칵하고 현관문이 열리고, 이어 발소리가 났다.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려있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홀로 있을 때보다 두세 배는 가중된 공기가 나를 짓눌렀다. 비 비린내에 코가 찡했다.


"...배, 백현이가 또 오라고..그랬어."


그의 목소리가 키친을 울렸다.


"가..앝이 가,가겠다고 했어."


"미안해."


내가 여유 없이 말했다.


"잘못했어."


"...뭐,뭘...겨,경수는 아,아무것도 잘못하,한,"


"아니."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무서웠고 두려워 눈이 질끈 감겼다. 어쩌면 나는 저번 날의 그와 같은 기분을 맛보고 있었을지 몰랐다. 구제불능인 나를 내칠지도 모른다는 소외감에 전률이 흐르며 오슬오슬 떨려왔다. 그런데 구부린 머리 위에 무게가 실려 오며 온기가 번졌다. 열기를 내뿜는 그의 손바닥이었다.


"저,정말이야. 겨,겨,경수는 아,아무것도 자,알못한게 어,없어. 내가 아,아는 겨,경수는 그,그런 사람이 아,아니야."


울 뻔했다. 산천을 뒤엎는 바람에 쓸린 나뭇잎들의 비명처럼, 크게. 소름 끼치게 어지러웠던 몇 시간이 깡그리 사라지며 남기고 간 쓰라림이 그렇게 만들 뻔했다. 그러나 나는 운이 좋았다. 김종인을 알게 되었고 그는 나와 달랐으며 그래서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았다. 부끄러웠지만 나의 허점을 인정했고 그가 받아들였다. 어째서 이다지도 운이 좋은 지 누구에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혹자는 나의 방법이 최선이었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세상의 절대적 잣대는 우리에게 무용지물이었다. 그와 나는 방법이 달랐다.


"거,걱정하지마. 내가 말했잖아."


다정한 음색과 긴 팔이 담요가 되어 쓸데없는 물음과 답으로 가득 찼던 가슴을 감쌌다. 그의 체취는 꽃향기 같지 않았으나 날 치유했고, 보다 숨 쉬게 만들었다.


"괜찮아..겨,경수야. 내,내가 너..안 아프게, 하,할거야."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를 꽉 안아버렸다. 맞은 비 때문에 그의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지만, 손끝까지 포근해서 12월 초의 차가운 비가 옷을 뚫고 들어와 물들일지언정 소스라치지 않았다. 이 순간 우리의 계절은 푸르렀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봉우리를 피울 수도 있었다. 봄의 푸른 잔디 위에서 웃통을 벗고 씨름을 하는 아이들이 그려진 그림처럼 얼싸안고 몰입했다. 나는 그에게 고마웠고, 또 고마웠다. 하지만 현실은 빨리 돌아왔다. 내 밥 시계가 꼬르륵하고 알람을 울렸다.


"....."


"...배고파."


정말로 뜬금없이 배가 고팠다. 그는 킥킥 웃으며 품에서 나를 떨어트렸다.


"나,나도."


"샤워해. 감기 걸릴라."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를 신경 쓰세 된 게. 나의 눈 끝에 애정이 송글거리고, 그의 얼굴과 움직임에 주렁주렁 매달린 어여쁨을 사랑스럽게 여기게 된 것이.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짖은 살결이 남의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되어 사람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리게 된 날의 시발점. 이날, 그는 자신이 나를 온전히 믿고 있다는 걸 각인시켰다. 그걸 깨닫는 순간 마음은 풍족해졌고, 겁먹었던 시간의 의미는 필요치 않았다. 샤워하러 가라고 말은 해놨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쉽게 놓지 못했다. 그래 봐야 샤워를 하러 들어갈 뿐인데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원하지 않은 거 시켜서 미안해."


그는 대꾸 없이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써줘서 고마워."


이번에는 위아래로 작게 끄덕였다. 덕분에 나는 기쁨을 가득 품은 채 그에게 줄 늦은 저녁을 만들러 키친으로 향했다.






밤은 우리를 응집시켰다. 같은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면서 함께였고,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퍼먹을 땐 그가 따라 왔다. 영어로 웅얼거리는 텔레비전소음이 벽을 울려 나름 시끄러웠는데 그가 보고 있는 건 텔레비전이 이 아니라 나였다. 어떻게 책볼 때나 문제를 풀 때처럼 초집중해서 볼 수 있는지 신기하고 궁금했다.


"내 얼굴이 이상해?"



아이스크림을 입안에 넣으며 물었는데 아니라고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어떻게 보여?"


"어? 어...음...공식?"


"공식?"


나는 그의 말을 되풀이하고 허허 웃어버렸다.


"수,숫자는 와,완벽하지 아,않아. 고,공식의 힘이 있어야 겨,결점이 어,없어져."


완벽은 틀림없이 나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나를 향해 움직이는 그의 도톰한 입술은 다른 날처럼 확신에 차있었다. 반성문을 쓰기 전날 밤 그러니까 전날 그가 단호하게 들먹였지만 나는 흘려버렸던 두 음절의 단어는 이날 또한 불편하고 이질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알고 싶어졌다.


"좋아. 그럼 공식이 나라고 치고. 공식을 만드는 숫자는 누구야?"


나는 텔레비전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괜한 허벅지만 쓸어대며 눈을 피했다.


"말해, 김종인. 빨리."


그의 배를 쿡쿡 찔렀다. 그래도 망설이길래 티비에서 레슬링 선수가 하던 기술인 팔로 목조르기를 시도했다. 아주 있는 힘껏 조여보았다.


"컥컥! 크윽! 겨,경수,컥"


"얼른 말하라니까!"


어느새 웃음이 나와 멈추지 않았다. 바동거리는 그의 얼굴이 있는 대로 찡그려져서 내 팔을 툭툭 치며 놔달라고 조르는 게 좋았다.


"어,알았어! 아,아,알았다고!"


"말하면 놔줄게."


"나! 나!"


"너? 김종인?"


"....응."


암호와 다르지 않은 대답을 곱씹느라 과부하에 걸려 팔이 저절로 풀렸다. 일단 추리를 방해하는 텔레비전은 껐다. 그렇게 해서 소음은 끊겼지만 무슨 말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공식이 도경수이고 숫자가 김종인이라는 소리인데, 뭐지 그게. 날 힐끔 보는 그에게 이때다 싶어 멍청이처럼 머리를 흔들자, 차분한 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 "나,나도 알고 있어. 어떤 것도 누구도 심지어는 숫자도 완벽할 수 없다는 거. 그런데 숫자도 비완벽에 해당된다는 게 인정하기 힘들었어.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 소수의 규칙을 발견하면 숫자의 빈틈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소수는 불규칙하지만, 소수의 집합은 형태의 궁극의 미인 원을 만들고 그건 곧 완벽이거든. 그때부터 나한테는 숫자가 전부였어. 음...열심히 했어. 그런데 어느 정도 연구가 진전되었을 때 이것이 단순히 숫자의 배열을 찾는 게 아니라 상상하지도 못한 원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았어."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내 눈치를 봤다.


(*) "아무튼 세상에 숫자보다 나를 안정 시키는 건 없었거든. 붙잡고 씨름하면 언제가 되었든 답은 나오니까. 사람들이랑 지내는 건 다르잖아. 불규칙하고 불분명해. 그런 건 싫어. 그..런데 겨..경수를 알게 되고 난 후부터는 내가 숫자를 통해서 찾던 게..겨...경수가 아닐까...그, 그러니까, 음, 어...지금 내 말이 뜬금없을지 모르는데 처음 봤을 때...내가 찾던 모든 게 경수에게 있다는 직감이 와서 그래서 나한테 너는 완벽이야."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리던 그는 채념한 듯, 산 만한 몸을 늘어뜨렸다.


"내,내말이 무,무슨 말인지 아,알겠어?"


물음은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있었지만,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 와중에 뒤죽박죽된 언어를 고르고 골라 뱄어 낸 그는 어느 때보다 초조해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그렇게나 선명했던 신호를 읽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고 있었다. 그에게 둘도 없는 좋은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했으니까 말이다. 나라는 인간은 금붕어가 친구 하자고 할 정도로 둔해 빠진 연인이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어색해진 그와 내가 어김없이 적막한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뽀송한 비누 냄새를 풍기는 그를 보며 이 시간을 그냥 보내기 싫다 생각했다. 이건 정말 뜬금없는 아이디어였다. 밖은 아직도 추적추적 비가 오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나가자."


놀란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어딜?"


"어디든."


안달 난 다리는 주체를 못 하고 이리저리 움직여서 두툼한 코트를 가져와 그에게 입히고 서둘러 스니커를 신겼다. 목도리를 칭칭 감아줘도 그는 싫다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준비를 마치고 장우산을 잡았다.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콧노래가 멈추지 않았다. 밖은 어두웠다. 곳곳의 가로등이 비에 번져 몽롱하고 환상적인 오렌지빛을 그려냈다. 우산은 그가 들었는데 덕분에 내 양손은 자유로워졌다. 코트에 쑤셔 박을까 하다 그의 소매를 잡았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맞춰졌다.


"겨,경수는 비 오는 날, 조, 좋아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딱히."


"그,그런데 왜 나,나오자고 해,했어?"


"음...그냥 자기는 싫고, 핫초콜릿도 마시고 싶고."


헤헤거리며 떠오른 대로 말했다. 우리는 정해진 장소 없이 주택가를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었고, 대신 그와 내가 길의 주인이 되었다. 그의 몸이 돌솥처럼 은근하게 따스해서 차가운 밤공기가 상쾌했다. 몇 블럭 걸었더니 작은 카페가 보였다. 망설이지 않고 들어가 핫초컬릿 하나를 사 들고 나왔다. 달짝지근한 갈색 액체를 번갈아 한 모금씩 홀짝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눴다. 아마 스무 블럭은 넘게 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화하며 그가 수줍게 했던 말을 계속 떠올렸다. 자신이 찾던 모든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말. 그것을 곱씹으니 행복이 차올랐다.


내가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된 기분은 풀이할 수 없는 충족감을 주었다. 한 사람에게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누군가를 살게 하는 비결이 아닐까. 따스했다. 없어지지 않길 바랄 정도로. 좁고 검은 우리만의 길에 그의 체온과 순수함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감히 말하건대 이밤은 그와 나의 첫 데이트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기분이 전과 다르게 간질거렸기 때문이다. 둔해 빠진 도경수의 안테나가 아주 조금씩 김종인에게 쏠리고 있었다. 






*




자, 이제 잠시 백현이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당신이 궁금해하는 한 아이와 나 그리고 그의 정답고도 아픈 이야기를 이제부터 나누어야 한다. 그 전에 독자가 준비가 됐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당신이 경험해 본 적 없는 어려운 이야기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모두에게 마음을 열어 놓으라고 덧붙이고 싶다.








(*) 독자도 알다시피 그는 평소 많이 더듬는 편이었다.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걸러서 쓴 것일 뿐이다.






화요일, 6월 09, 2015

author's note 6








몇 시간 후,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올 때처럼 지하철을 탈 수 있었지만 걸어가다 보니 집으로 가는 버스가 보였다. 그게 다였다. 백현이를 등 뒤에 놓고 오는 기분은 말로 설명 할 길이 없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버스 밖 사람들은 단풍 지는 가을을 즐기며 오손도손했다.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들이 전과는 한참 다르게 보였다. 나는 힘이 빠져 유리 창문에 머리를 붙였다. 버스는 천천히 달리고 있었지만,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겨, 경수야."


 옆에 앉아있던 그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응?"


고개를 돌리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또,또 가자."


나는 여러 번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았고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한 아이가 밀어 넣은 소용돌이가 우리의 가슴에 바람을 일으켰다. 나는 보기만 해도 듬직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 보았다. 동질감은 친밀함을 부여했고 작은 면적이 주는 안락은 유리 창문보다 따스했다. 이날을 돌이켜 보면 험난 했던 감정 속의 위안은 김종인이었다. 어찌 보면 '그'라는 사람 때문에 경험하게 된 시간에 '그'라는 존재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이었고, 어린 나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버스는 아파트 근처의 정류장에 우리를 내려놓고 달아났다. 폰을 보니 시간은 네 시쯤이었다. 저녁을 먹기는 이르고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전에 봐두었던 페이퍼북을 사러 서점으로 들어갔다. 그는 서점을 좋아했다. 물론 나도 좋아한다. 특히 전자책이 발달한 요즘, 쥐었다 접었다 하며 읽는 맛이 쏠쏠한 페이퍼북은 갈수록 매력적이다. 그는 아트 섹션에서 원하는 책을 찾는 나의 옆에 서 있었다. 이 책 저 책 둘러보며 종이 인쇄물에 정신을 빼앗겨 알지 못했는데, 문득 느낀 인기척에 돌아보았을 때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쑤셔 박고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다. 정정하겠다. 정확히 말하면 '응시'였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그는 말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왕 서점에 왔으니 본인도 보고 싶은 책이 있을 텐데 따라다니는 게 부담스러워 등을 떠밀었다. 어디든 좋으니 서점을 나가지는 말라고 당부하는 건 물론이었다. 망설이던 그는 마지 못해 내 옆을 떠났다. 얼마 가지 않아 자석이 끌리듯 과학, 수학 섹션으로 걸어가는 넓은 등을 힐끔 봤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다시 흥미로운 페이지로 관심을 돌렸다. 덕분에 수많은 책 속으로 의식을 집중하다 어떤 걸 사야 할 지 고통스러운 결정을 할 순간이 왔다. 3권 정도 손에 들었는데 백오십 불 가까운 금액이 합산되었다. 다 살까 한 권을 살까 머릿속으로 처절한 싸움을 하며 그를 찾기 위해 걷는 데 익숙한 코트와 모르는 금발 머리 여자가 나란히 책장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머리가 좀 멍해졌다. 체구가 작은 여자가 하얀 이를 보이며 웃고 있고 그런 그녀를 내려보는 그는 어딘지 쑥스러워 하는 분위기였다. 분명 좋은 그림, 예쁜 풍경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전시회를 갔는데 처음 보는 난해한 그림을 앞에 두고 섰다랄까. 배치와 구도 그리고 안의 인물이 정해진 규격을 넘어서 이해가 가지 않으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거부감이 드는 그림. 나에게 그들의 뒷모습이 그랬다. 그들 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 다른 곳에서 책이나 읽고 있어야겠다 싶었다. 주의를 둘러보다 비교적 구석에 있는 인문학 섹션으로 가서 바닥에 앉아 책장에 등을 기대었다. 기대자마자 쥐고 있던 책 중 하나를 펴고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는 읽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맞았다. 그는 좀 더 여러 사람과 만날 기회가 있어야 할 사람이었고, 발전에 필요하다면 대인관계를 가져야 할 의무를 지닌 인물이었다. 아무나 가지지 못한 특별한 두뇌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해야 했기에 조금이라도 그에게 이로운 생활을 하는 게 교수님과 내가 인정한 동거의 조건이었다. 그러니까 내 행동이 틀리지 않았다고 자위했다. 그런데 왜 전면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걸까. 어째서 눈앞의 책을 읽지 않고 최선의 결론에 개운해 하지 못하며 곱씹고 있을까. 나는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이마를 받쳐 든 열 손가락에 무게가 느껴졌다. 무엇부터 잘못된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경수야!"


급히 머리를 쳐들었다. 그가 거친 숨을 고르며 내려보고 있었다. 목소리와 다르지 않게 인상이 다급했다. 찰나에 얼굴을 뜯어보았다. 나의 부제가 만든 긴박한 눈은 쌍꺼풀을 더 짖어 보이게 했고, 언제 나의 나른함을 싹 몰아낸 눈코입 덕분에 속절없이 기분이 나아졌다. 이상했다. 참으로 이상했다. 내가 미소 짓자, 그는 눈썹을 찡그렸다.


"여, 여기서, 뭐, 뭐해. 하..안참 찾았잖아."


"책 읽고 있었어."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 무릎 위에 책이 펼쳐져 있어 거짓을 하나 더 보태지 않아도 되었다.


"가,가...버린..줄 알았어."


"내가? 어딜가."


"모,모올라. 그, 그냥..."


그는 내 옆에 앉으며 말끝을 흐렸다. 짧은 상념을 품은 시선은 발끝 아니면 운동화 코 그쯤 어디로 자리 잡았고, 유난히 날이 서 보이는 각진 턱선이 음영을 그리며 아래로 향했다. 망설이던 그가 헛입술 질을 몇 번 했다.


"가,가..지..마. 가,가지,지,마."


나는 잠시 뭐라고 받아쳐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이내 정신을 차렸다.


"...당연히 혼자 못 가지. 저녁에 미트볼 스파게티 해먹을 건데 너 때문에 고기 엄청 많이 사놨어. 너랑 안 먹으면 그걸 누가 다 먹냐?"


내가 제대로 봤다면 그는 불안해했다. 유추해 낼 수 있는 근본은 여러 갈래가 있었다. 앞서 만난 사람들이 그를 남겨두고 각자의 갈 길을 가버렸을지 몰랐다. 또는, 스스로 거부했을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감정적으로 안정 되지 못하면 폭력성이 나온다는 걸 몇 가지 사건으로 체험했기에 불안은 없어져야만 했다. 나는 책을 내려놓았다.

"일어나자. 배고파. 집에 가서 저녁 먹자, 우리."


벌떡 일어나 코트소매를 잡았다. 그리고 '우리'를 붙여 씨익 웃었다. 그가 정말 하고 싶어 하던 말은 듣지 않기로 했다. 그 말을 들으면 안 그래도 백현이의 일로 편하지 못한 마음이 더 허해질 것만 같았다.


'혼자 가지 마.'


'혼자 두지 마.'


....아무것도 말이다.







스파게티는 금세 동이 났다. 그가 혼자 삼 인분을 먹어치웠다. 그런데도 뼈랑 근육만 있는 걸 보면 매일 엄청난 에너지를 머리로 소비하는 게 분명했다. 그의 세 번째 접시는 깨끗이 비어 있었다. 창밖은 깜깜했고 아파트와 주택의 불빛만 반짝였다. 그는 부풀어 오른 배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따라 창문 밖으로 고개를 보냈다. 밤 풍경을 감상 하던 게 아니었다. 헨리 교수님께 드려야 하는 반성문의 기한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어떻게 하면 그걸 쓰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한가하게 여유를 즐길 시간은 없었다. 


"너 학교 계속 다닐 거야?"


내가 물었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응."


"학교 다니는 이유가 뭔데?"


한쪽으로 추가 달린 눈동자가 기울었다. 이유가 있는데 말해주기 싫은지 그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답답해졌다. 일을 벌렸지만, 원인을 모르고 사정을 짐작해야 하는 날이 쌓여가니 언제까지 그의 모든 표현에 긍정하고 들어가야 하나 싶어 끝없게 느껴졌다.


"나는 마법을 부리거나 초능력이 있는 게 아니니까 네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몰라, 종인아."


조금이라도 내비쳐주었다면 이런 식으로 다그치지 않았다.


"나...나는..겨,경수,너,너처럼..와,와,완벽하지 않으니까...그럴수 이,있어. 내,내가 마,말해도 넌 모,모를 거야."


"내가 완벽하다고?"


그는 세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으,응. 넌 완벽..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완벽하다니.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아,아니야, 있어, 있어."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숨을 몰아냈다. 한숨이 몸에서 떠나자 힘이 풀린 두 팔이 식탁 위에서 떨어졌다.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물어보려다 우리가 대화하는 주제가 아님을 상기하고 이 부분은 놔두기로 했다. 반성문 작성이 더 시급했다.


"아무튼, 학교 다니고 싶은 거라면 반성문 써."


"...자,잘못 하,안거 어,어,없어."


"그래도 써. 말도 안 되고 억지스러워도 써. 그래야 학교 다닐 수 있어."


너에게 학교가 무슨 소용이니, 차라리 에니그나연구소로 돌아가서 하던 연구 다시 하는 게 어떨까, 여기에서 인생을 낭비하는 거잖아 같은 훈계 비슷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머릿속에 있는 걸 내놔.


"...나...나는..."


헨리 교수님의 수업을 두 바닥의 칠판 깜지로 반박하고도 학교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대지 못하면 또다시 면전에 대고 한숨 지을 턴데 그런 나 자신이 싫어질 건 당연했다.


"나,나는...경수가...이,있는 곳에 이,있고 시,시,싶어."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는 그가 몸을 말아 움츠렸다. 더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불안정한 호흡은 소리가 너무 커서 이쪽까지 떨림이 전해졌다. 내가 있는 곳에 있고 싶다는 그는 도통 나의 의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금 그의 의식이 심해를 헤엄치고 있다면, 주저 말고 들어가 그를 끄집어내야 했다. 그게 나의 역할이였다.


"김종인."


"....."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하고 의자가 밀려난 사이를 한달음에 걸어 그가 앉은 의자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밑에서 올려 본 그는 질끈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큰일을 저질러놓고 어른의 야단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집은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흔한 텔레비전의 소음조차 나지 않았다. 사방을 가르는 정적이 우리를 파먹으려 했다. 그게 두려웠던 나는 몸을 구부려 단단하게 웅크린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반성문 쓰자, 종인아. 응?"


밤낮 가리지 않고 따뜻했던 몸은 차가워서 금방 내 온기를 앗아갔다. 체온이 식어 가며 머리도 같이 냉정해졌다. 곧 내가 그에게 하고 있는 일이 무언지 깨달았다. 길이 돌길이고 길 같지 않은 길이라도 가야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진실하지 않은 것으로 원하는 걸 얻어야 한다면 기꺼이 거짓을 택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그에게 비겁하고 때 묻은 어른의 세계에 발들이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나의 무지가 그에게 얼마나 힘든 일을 시켰었는지, 이 일로 뒷날 얼마나 후회하게 될 것인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나의 가슴에 둘러싸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방에 없었다. 서둘러 로빈 교수님에게 전화를 해보고 그가 헨리 선생님에게 반성문을 제출하러 나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반성문을 써냈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뒤에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무작정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대충 묶은 머플러 안으로 한기가 들어오는 걸 못 느낄 정도로 그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에겐 흔한 핸드폰도 없었다. 동물처럼 단지 감각으로 그를 찾아야 했다. 그런 게 쉽게 될 리 없었다. 무의미한 한 시간이 흘렀다. 겉옷을 제대로 입지 못한 몸은 초겨울의 냉기를 고스란히 받아 굳어있었다. 가까운 벤치에 상체를 내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를 만난 후로 나는 많이 변했다. 그만큼 여러 경험을 했다. 혼자였다면 해보지 못했을 일들이었다. 특히 감정의 변화무쌍함은 이루어 말할 필요가 없었다. 굴곡도 이런 굴곡이 있을 줄이야. 남들보다 평탄한 성격으로 중도를 지키며 살아온 나에게 이건 어찌 보면 시련이었다. 그런데 싫지 않았다. 밀어내기 아깝고 그럴 수도 없었다. 깨닫고 나니, 그를 찾고 싶어 견딜 수 없어졌다.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처음은 낯설더니 두 번째라고 익숙해진 125가에 발을 디뎠다. 역시나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사람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며 그가 마틴 루터킹 아카데미에 있길 바랐다.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간 데스크에는 운 좋게 티나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화색하며 반겨주셨다.


"올 줄 알았어요, 경수."


그녀의 한마디에 긴장되어있던 어깨가 훅 처졌다.


"종, 아니, 카이가 여기에 있나요?"


"네. 백현이랑 같이 있어요. 들어가 봐요."


"감사합니다, 티나."


나는 지체없이 아이들이 있는 방 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도착한 방의 유리창을 통해 그와 백현이가 보였다. 그런데 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이는 격변하여 이따금 작은 웃음을 지어내고 자세는 편안했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들을 뚫어지게 보느라 티나가 옆으로 걸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둘이 뭐 하는지 알아요?"


티나가 내게 물었다.


"아니요."


"숫자놀이를 하더라고요. 백현이가 카이의 숫자들을 아주 좋아해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유리창 안의 둘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와서는 백현이랑 놀고 싶다고 하기에 들여보내 주었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친구가 됐어요.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와 저렇게 금세 친해지는 건 아무나 못 하는 거에요. 아이의 마음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죠. 카이는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에요."


"네. 맞아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그녀의 말에 온전히 동의했다. 그는 다르다. 나 같은 사람은 비교 대상마저 될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무엇을 했나. 순수하게 나와 있고 싶다는 표현을 했을 뿐인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위한 다는 명목으로 틀에 밀어 넣었다. 따라와 줄 것을 믿고 남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라고 시켰다. 이 얼마나 무모하고 안일한 행동이었는지. '김종인'이라는 사람을 알지 못하고 서둘렀던 부끄러움에 마주 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들어가 봐요."


"아니요. 잘 놀고 있는데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티나에게 인사를 하고 그곳을 나왔다. 나의 작은 몸은 무거워졌다. 덩달아 가슴 깨에 돌을 쑤셔 박은 만 양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실망한 무게는 곂곂히 쌓여만 갔다. 이날을 생각하고 그를 떠올리면 나는 한없이 쓸쓸하다. 그러나 그나마 절망적이지 않은 건 뒤에 우리에게 하나의 사건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지금이 앞서 말하다 접은 부분을 이야기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